특집|꿈, 의식 2

가상, 현실 그리고
마음의 출현

조용현
인제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1. 마음의 출현

일찍이 피히테는 자아(自我)를 원리로 해 그 자아로부터 모든 것을 이끌어내는 ‘지
식학(Wissenschaftslehre)’을 구성하고자 했다. 지식학의 근본 원리로서의 자아는 비아(非
我)까지도 자기의 소산으로 한다. 이 자아의 활동을 피히테는 ‘사행(事行; Tathandlung)’
이라고 불렀는데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정립시키는 자아의 무한한 활동이다.
이 사행을 통해서 자아는 근원적으로 절대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는 나다’이다. 이것이 첫째의 정립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근원적으로 절
대적으로 정립된 자아는 그것이 비아와 구별됨으로써 비로소 정립된 것이다. 즉 자
아에는 절대적으로 비아가 반정립되는데 이것이 ‘나는 비아(非我)가 아니다’이다. 이
것이 두 번째의 반정립이다.

 

첫째의 정립을 편의상 ‘적극적 의식(positive consciousness)’, 둘째의 반정립을 ‘소극적
의식(negative consciousness)’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의식의 진화의 역사를 볼 때 그 역도
타당하다고 보인다. 즉 소극적 의식에서 적극적 의식에로의 전환이며 이 정점에 인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소극적 의식은 동물 일반에 관련된 의식이며 이것을 설명하기 위
해 정신을 가져올 필요는 없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동물 일반에서 출발해보자.
생물에 있어서 자기를 아는 것은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자기를 탐지하
는 데는 두 가지 수준이 있다. 하나는 자기 아닌 것의 인식을 통해 반사적으로 자기
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 경우 자기를 알기 위해서 자기를 전면적으로 통찰할 필요는
없다. 자기 아닌 것의 표식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 자기란 자기 아
닌 것을 뺀 모두이다. 앞서의 소극적 의식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나는 B가 아니다.
나는 C가 아니다.
나는 D가 아니다.

이 경로는 무한히 되풀이할 수 있지만 여기서 ‘나는 A다’는 적극적 (자기) 의식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소극적 의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이다. 이 경우 이
시스템은 세포 가운데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을 식별하는 능력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
다. 이 면역 시스템에서 자기의식의 진화론적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체내가 이물질
에 의해서 감염되었을 때 몸은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항체를 만들어 그
것을 침입자와 화학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상대를 무효화시켜버린다. 그러나 이것
은 자신을 전면적으로 통찰하는 ‘나는 나다’의 ‘적극적 의식’의 의미가 아니고 타자
의 표식을 인지한 것, 즉 ‘소극적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소극적 의식은 타자를 통해 반정립된 자아이다. 여기서 자아는 타자 의존적이다.

타자가 자아에로의 침투를 저지당한 곳, 그것이 다만 자아일 뿐이다. 여기서 자아는
타자의 반사면일 뿐 그 자체 자립적 존재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독립적 내부를
갖지 못하므로 독립적 외부도 없다. 여기서 객관적 외부 세계는 존재하지 아니한다.
여기에 반해 적극적 의식에서 자아는 타자에 독립해 있으며, 타자는 자아에 독립
해 있다. 그가 밀고 나가기를 멈춘 곳 그것이 바로 타자이고 외부 세계이다. 여기서
타자의 반정립으로서의 자아가 아닌 일정한 규정성을 가진 자기동일성이 생겨나는
데 이것이 본래의 의미에서의 자아(마음)이다. 여기서 자아는 자신에 저항하는 것을
외부 세계로 지각하며 여기서 자아와 독립된 대상 세계가 주어진다.

객관적 대상 세계의 존재는 의식의 뚜렷한 징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타
자를 항상 객관적 실재로 인식한다. 인간의 인식 구조는 근본적으로 실재론적이다.
이것은 적극적 의식이 만들어놓은 중요한 귀결이다. 반면 소극적 의식에 기초하는
인식론은 오히려 주관적 관념론의 형태에 가깝다.

이것은 대상의 주관에의 의존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을 대상 측에서 본다면 주관의
대상 의존성의 주장이 되고 모순되는 두 명제가 주관적 관념론에서는 함께 성립한
다. 그 이유는 주관과 대상을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주관적 관념론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으며 안도 없고 밖도 없다.

소극적 의식이 주관적 관념론에 가깝다면 지각되는 세계는 주관이 만들어내는 가
상인가? 아니, 오히려 그것은 현실이다. 그 단계에서는 가상이라는 것이 없다. 가상
은 현실과 대비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극적 의식의 단계
에로의 이행을 통해서 출현한 것은 현실 세계가 아니고 가상 세계이다.

2. 가상의 출현

이제 의식은 2종의 대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는 내 바깥에 나와는 무관

하게 주어져 있는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에서 주관적으로 만들어지는 대
상이다. 전자는 내 마음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사과’가 하나 있다. 이 사과가 ‘있음’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눈으로 봄
으로 안다. 그렇다. 그렇다면 눈을 제거해버리자. 그래도 사과는 여전히 있다고 확신
하는가? 물론이다. 코로 냄새 맡아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고, 두드려 소리들
들어볼 수도 있다. 내친김에 후각,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기관을 다 제거해버리자.
이제 사과는 있는가? 사과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버클리와 견해를 같이하는
셈이다. ‘있음’은 ‘지각됨’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거꾸로 말해서 사물은 지각됨으로
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각하기를 그치는 순간 존재는 사라진
다. 이제 우리는 이 세계는 나의 지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아론(solipsism)을 받아들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신은 이 주장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사과의 ‘있음’은 객관적 사태이므

로 그것이 인식 능력의 주관적 요소에 좌우된다고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과를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을 제거해버린다 하더라도 그래도 사과는 있
다고 본다. ‘있음’은 우리의 주관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사과… 내 마음속에 만들어지는 사과가 있다. 앞서의 사과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 사과는 ‘있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가상
세계의 사과이다. 이것은 우리의 주관에 의존함으로 지각하기를 멈추면 사라진다.
마음의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의 ‘사과’가 아니고 이 가상의 ‘사과’다. 이
가상 세계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세계이다. 현실 세계는 하나지만
가상 세계는 복수여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중요한데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그 현실 문제를 가상의 세계로 가져가서
해답을 시도해보고 틀렸으면 지우고 새로운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가상을 만들고 그 가상에 기반해서 가상의 가상을 만들 수도 있다. 우리의 마음속
에서 만들어지는 세계이므로 얼마든지 짓고, 허물 수 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마음(cogito)이 우리 세계가 가상이 아니고 현실임을 보증한다
고 한다.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의 진정한 목적은 내 안에 가상 세계를 구축하
기 위한 것이다.

이 가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현실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을 현실 세계와 구분
하게 해줄 표지가 필요하다. 그 표지가 ‘있음’이다. 이 있음의 딱지가 가상이 현실로
폭주하는 것을 막아준다. 딱지를 떼어내면3)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없어지고 결과적
으로 가상 세계는 사라진다.

 

3. 영화 <위험한 게임>의 메시지

인간은 두 개의 세계에 동시에 산다. 하나는 사실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가상 세계
(에른스트 카시러 Ernst Cassirer가 말하는 의미 세계, 상징 형식의 세계다) .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마음이 가진 중요한 기능이다. 거꾸로 마음이 존재
하지 않을 경우 그 구분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실제 전쟁을 할 수도 있고 전쟁 게
임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든 이 차이를 안다. 그러나 기계의 경우 그것이 아무
리 성능 좋은 슈퍼컴퓨터라 하더라도 이 차이를 알 수 없다. 그 인공지능에게 현실이
따로 있고 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위험한 게임(War Games)>(1983)은 컴퓨터가 실제와 시뮬레이션을 구분하지 못
함으로써 미·소 간에 핵전쟁의 전면전으로 치닫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그리고
있다. 컴퓨터 마니아인 데이비드는 새로 출시되는 컴퓨터 게임 프로그램을 해킹으로
입수하려다가, 우발적으로 엉뚱하게 노래드에 설치된 주컴퓨터 조슈아(Joshua)로 들어
가, 그 안에 내장된 전쟁 게임 프로그램과 연결된다. 데이비드를 자신의 제작자인 스
티브 폴큰으로 생각한 조슈아는 예전처럼 게임을 하자고 한다. 게임 좋아하는 데이비
드,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라, 게임 목록을 쭉 훑어보고 ‘세계 핵전’을 제의한다.

이 시각에 노래드 본부 사령실에서는 난리가 난다. 데이비드의 게임 장난이 노래
드 사령실 스크린에 마치 실황인 것처럼 나타난 것이다. 소련의 대륙간탄도탄 8기가
극점을 통과 11분 후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시애틀을 강타할 것이라는 것이다. 데
프콘 3(데프콘 1이 핵전쟁 상황, 5가 평화 상황)이 선포되고 미사일이 발사 대기하고 폭격기가
출격한다. 그러나 위성이나 레이다상에서는 어떤 공격의 징조도 포착되지 않는다. 결
국 노래드에서는 그것이 실제 상황이 아니고 시뮬레이션 게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조슈아가 게임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 조슈아는 공격 준비를 완료하고
실제 미사일을 발사시킬 암호를 찾기 시작한다. 이대로 두면 조슈아가 실제 모스크바에
핵폭탄을 떨어뜨릴 것이다. 이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조슈아로 하여금 이것이 실제 상
황이 아니고 게임임을 설득시켜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조슈아는 실제 상황과 게임을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게임이 아니라는 것으로 조슈아를 설득시킬 수
없다.
아주 고약한 상황이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조슈아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가상(시뮬레이션) 간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철학적 담론만을 되풀이하
겠는가? 조슈아 개발자인 폴큰 박사가 이런 방식으로 조슈아를 설득하느라 허둥대
고 있는 동안 데이비드는 아주 통찰력 있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게임의 목적은 이기
는데 있다는 것이 게임 시뮬레이션의 자명한 제1원칙이다. 이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게임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데이비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슈아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는 서
로 최선의 수를 쓰면 무승부가 될 수밖에 없는 ‘틱-택-토’ 게임을 조슈아에게 제시
한다. 조슈아는 자신의 내부에서 수십만 번의 시행 끝에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것
을 알고,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4. 튜링 테스트

조슈아는 발사를 중단하는데 게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고 이 게임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가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게임으로서의 전쟁과
현실의 전쟁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조슈아는 그 성능이 아무리 우수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기계에게 가상과 현실의 구분
여부를 테스트하는 것이 기계(인공지능)가 마음을 가졌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튜
링이 본래 제시했던 것보다 더 좋은 튜링 테스트(Turing Test)가 아닐까?

튜링 테스트는 1952년 앨런 튜링이 제안한 테스트로 지능, 인공지능에 대한 기준
선을 정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인간이 보기에 인간처럼 보이는 것을 인간
에 준하는 지능이 있다고 간주한다. 질의자 하나와 응답자 둘을 준비하는데, 응답자
중 하나는 컴퓨터이고 나머지는 인간으로 질의자가 어느 쪽이 컴퓨터인지 판별할

수 없다면 컴퓨터는 테스트를 통과한다. 즉 컴퓨터가 인간처럼 대화할 수 있다면 그
컴퓨터는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대화를 그럴듯하게 이끌어가서 관찰자가 보아서 그것이 기계인지 사람인지 구분
할 수 없다는 정도로 그것이 ‘마음’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너무 소박해 보인다. 그러
나 만일 그 기계가 <위험한 게임>이 제시하는 기준- 게임과 현실의 구분-을 충족시
킬 수 있다면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할 용의가 있다.

이 기준은 보기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개와 같은 동물들도 이 기준을 충족시
키지 못하며(영화 속에 출연한 개는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사람의 경우, 자
폐증(Autism) 환자도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오티즘(Autism)은 희랍어 ‘아우타(auta)’에서 온 말로 영어로는 ‘self(자기 자신)’와 같
은 의미다. 이 용어는 자폐증이 self(자기, 영혼, 마음)와 연관되어 있다는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오티즘(Autism)의 우리말 번역 ‘자폐증(自閉症)’은 오해의 소지가 있
는 잘못된 번역이다. 이 용어는 자아가 있는데 그것이 바깥과 차단되어 있다는 의미
로 들리는데 정확한 의미는 마음(적극적 의식)의 부재(不在)이다. 그것은 계통발생적으
로 의식의 출현 그 이전의 어떤 단계의 개체 발생 과정에서 미완성 상태로 고착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감히 추정해본다.

 

조용현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버클리대, 포항공대 과학문화센터 객원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인제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로 있다. 『칼 포퍼의 과학철학』, 『정신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컴퓨터
속의 생명』, 『상생의 철학』 등의 공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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