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꿈, 의식 3

선불교와
융 심리학에서의 의식

전병술
건국대학교 학술 연구교수

 

당나라 어느 승려가 신라 출신 백암(百巖) 선사에게 선(禪)이 무엇이냐고 묻자, 백암
선사는 “옛 무덤을 집으로 삼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모든 교조적 사고는 무덤 속
에 있을 뿐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교의의 권위가 무덤일 수 있으며, 불립문자(不立
文字)의 경전의 권위가 무덤일 수 있다. 무덤을 깨고 나와야 참된 삶이 전개된다.

근대 이후 동서양 학술 교류 가운데 특히 서양 심리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
은 불교와 도교다. 심리학은 전통적인 철학에 반기를 들고 출발했다. 그런 그들에
게 불교 사유는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특히 스즈키의 『선불교 입문』이 지대한 영향
을 끼쳤다. 정신분석학파는 실존주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정신분석과 선불교가
존재의 본성을 새롭게 깨닫게 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치유의 담론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들 이론과의 유사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들의 이론을
불교를 통해 인증했다. 융은 선불교의 ‘깨달음’이 기독교에서의 소수의 신비가들의 종
교적 변환의 체험과 부합된다고 보았으며, 참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자기를 이해하고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내면을 정신, 의식, 자아, 무의식으로 나눈다. 정신은 인격 전체를 의
미하는데 의식적 및 무의식적 모든 사고, 감정, 행동을 포함하고 있다. 정신 속에서
개인이 직접 알고 있는 것은 의식뿐이다.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을 포함하는 의식은
아마도 출생 이전에 나타나는 것으로, 개인의 의식이 타인에게서 분화되거나 개성화
되는 과정을 개성화라고 부른다. 개성화의 목표는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히 자기 자신
(self)을 아는 것, 즉 자기의식에 있다. 자아(ego)는 의식의 기구로서 의식화 과정을 위
해 없어서는 안 된다, 자아는 의식적인 지각, 기억 사고,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
격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보장한다. 하지만 우리의 심리적 인식은 구속과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의 존재를 마음속에 받아들이도록 준비되
어 있는데 융은 이것을 무의식이라 부른다. 무의식은 융 심리학의 핵심 개념이며 선
불교 해석에서도 핵심적으로 작용한다. 개인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의식적인 개성화
나 기능과 조화되지 않은 모든 정신적 활동과 내용을 받아들이는 저장소다.

융은 서양에서 심리학을 포함한 전통적인 사유 체계에서 ‘정신’은 중세 이후 형이
상학적 의미를 잃어버리고 ‘심리 기능’, 즉 인식을 위한 불가피한 조건으로만 표현하
게 된 반면 동양에서 사용되는 정신이란 용어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닌다고 이해
했다. 그는 동양에서는 정신이 우주의 원리이며, 존재의 정수로서 형이상학적 실체
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불교의 심을 실체로 표현할 수 없다. ‘연기성공(緣起性空)’은 모
든 것에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
에 따로 마음이 없다고 한 보리달마와 2조 혜가 사이에 다음의 대화가 오갔다.

“저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부디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마음을 가지고 오라. 편안하게 해주겠다.”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 없습니다.”
“내가 네 마음을 이미 편안케 했다.”

 

물질을 포함한 모든 정신 현상은 영구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연기하는 존재다.
혜가는 스승을 통해 마음의 치유를 구했다. 융은 정신요법이란 근본적으로 의사와
환자 사이의 대화술의 변증법적 관계로서 두 정신의 전체 사이의 대좌이며, 그 속에
서는 모든 앎이 단지 수단일 뿐이고 그 목표는 변환이며 유일한 판단 표준은 아집의
제거라고 했다. 이 공안에서 마음은 실체가 없는 공(空)이며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
에 편하고 말고 할 것이 없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마음이 곧 부처’라는 진리는 형이
상학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현대 신유학자 모종삼(牟宗三)은 ‘경지형태의 형이
상학’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이나 존재
의 근본 원리가 실재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존재의 양태에 대한 설명이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은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생로병사의 고통받
을 자성이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다다르는 경지다. ‘공’은 동사로 쓰여 비워나가는 활
동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고정된 생각이나 사상, 감정 등을 비워 거기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근본적인 변환을 이룰 수 있다. 이 점에서 ‘공’은 존재이면서 동
시에 작용이고, 존재와 경지가 일치하는 ‘경지형태의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융은 개인의 기질적이거나 체질적인 태도를 내향성과 외향성으로 나눈 다음 집단
으로 확장해 설명하면서, 내향성은 동양인의 유형이며 하나의 관습적이고 집단적인
태도라고 보았다. 동양에서 외향성은 허위와 탐욕으로서, 즉 생사의 윤회 속에서의
존재로서, 그리고 이 세계의 온갖 고통 가운데에서 절정을 이루는 인연 사슬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로 평가된다고 했다. 선불교는 특히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
成佛)’을 강조하는데 융은 이를 ‘내향적 심성의 자기 해탈 능력’이라 표현한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일심에 대한 이해는 지적 탐구가 아닌 직관적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고 여기는데 특히 선불교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언어도단적 대화에서
일어나는 심인(心印)을 통한 깨달음이 가장 직선적이고 명확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융은 선불교의 대화를 통한 순간적인 깨달음이나 공안(公案)에 대한 이해를 무의식

적 본성의 대답이라고 이해하고 이 무의식적 본성이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자연 그
대로의 인간’을 드러낸다고 하면서 혜능 선사의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을 예
로 든다. ‘선이라고 생각지 않고 악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는 말은 악한 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생각하지 않아야 되지만, 또한 선한 것도 생각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
로, 도덕적으로 판단하기를 멈춘다는 의미를 넘어서 상대적인 인식을 하지 않는 경
지를 말한다. 그 까닭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식은 모두 개개인의 의식
에서 나오는 분별심으로 어느 한쪽을 절대적이라고 여기고 집착하게 되는 도그마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융은 무의식이 현존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심리적 성향으로 자연으로 부여받은 요
소로써 스승에 대해서 혹은 공안에 대해서 무의식적 본성이 대답으로써 자연스럽게
제시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했다. 융은 깨달음이 자기 본성의 통찰을 포괄하는 것
이며, 자기에 관한 착각적인 파악으로부터 의식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자

기 본성과 관련된 착각이란 ‘자아’와 ‘자기’와의 통상적인 혼동을 말한다. 융에게 있
어서 자기와 자아가 서로 대극을 이루며 서로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거나, 혹은 대립
관계로 나타난다. 대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아는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생사의 인
과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의식에서 영위되는
시비 판단과 좋고 싫음의 감정이 참이라고 여기고 집착하게 된다. 즉 자성은 원래 청
정한 그대로인데,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자신의 주체라고 착각해 집착하며 번뇌의 굴
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융의 설명 방식에 따르면 원래 자신의 참모습이 ‘자
기’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아가 자신의 주체라고 착각해 참된 주체인 자성을
소외시키며 살아가면서 온갖 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대승기신론』에서의 ‘생멸문’
에 해당하고 자기는 모든 인과의 속박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상태인 ‘진여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일심(一心)’에서 나간다.

심리학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실현에 있다. 융에게 있어서 자기는 인격의 전일성을
이루는 조직 원리를 가리킨다. 융은 동양에서의 마음이라는 개념이 자신의 무의식
개념에 상응한다고 여기고 서양의 정신이라는 개념은 다소 의식성과 동일시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양에 있어서 의식성이란 자아 없이는 생각될 수 없으며 의식성은
자아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만일 자아가 없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것을 의식할 수 있
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동양인의 마음에 있어서는 자아 없는 의식을 생각
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누구나 의식이 자아의 상태를 넘어설 수 있는 것으
로 생각했으며 의식의 높은 단계에서 자아는 도리어 완전히 사라진다고 했다. 이는
조사선 이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조사들은 자신들의 대화 혹은 문답을 통해 깨달
음에 도달한다. 융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실현을 완성한 두 인격체의 대화를 통해 서
로의 깨달음을 인증하기도 하고, 완성 단계에 있는 제자가 스승의 말 한마디나 행동
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내용은 물론 자신이 바로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구지(俱) 선사는 어떤 물음이든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수하의 동자승이 세
간으로 외출했을 때 한 사람이 구지 선사의 설법에 관해 묻자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

를 들어 보였다. 암자로 돌아온 동자승은 스승과 똑같은 동작으로 손가락 하나를 들
자 선사는 칼로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동자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려 할 때 선
사가 불러 세운 다음 손가락 하나를 들었고, 이에 동자승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공안
이 있다. 이 공안이 참이라는 전제하에 어떻게 미성숙한 인격의 어린아이가 스승의
행동 하나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간화선은 이러한
공안, 혹은 화두를 참구해 깨달음을 얻는 데 목적이 있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데,
융은 무의식, 특히 집단 무의식 개념에서 그 가능성을 설명한다. 그는 자기는 집단
무의식 속의 중심적인 태고유형이라고 했다. 즉 동양인은 무의식 속에 이미 동일한
깨달음의 내용이 들어 있어서 누구나 끄집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자기는 질서, 조
직, 통일의 태고유형으로 모든 인격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임(selfhood)과 자기실현
의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다. 참된 종교적 체험에 의해 자기를 이해하고 실현할 수 있
다. 여기에서 종교는 정신의 발달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가리
키는 것은 아니다. 융은 완전한 자기실현을 달성하는 것보다 자기를 인식하는 데 중
점을 두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 융은 서양에서는 인간이 무한히 조그맣고 신의 은
총이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반해, 동양에 있어서는 인간이 신이고 인간 스스로가 해
탈한다고 하면서도 돈오(頓悟)가 아닌 점수(漸修)의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융의
입장에서 볼 때 주체는 자기 자신이면서 나아가 사회의 일원임을 인식해야 한다. 분
석심리학에서 견성성불에 해당되는 상태를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라 할 수 있다. 개
인이 개성화 과정을 진행시키면서 자신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외적 권위를 내세
우지 않고 사회적 일원이 되어 공동체의 질서와 조화에 동참해야 함을 융은 강조한
다. 즉 ‘견성성불’이 공동체 안에서 실천을 담보해야 비로소 자기실현을 말할 수 있
다는 의미다.

 

전병술 건국대학교 철학과와 대만 문화대학 철학연구소를 졸업하고 양명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 학
술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죽음학회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생태문화와 학』(공저),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
라인』(공저), 『철학의 시대』(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죽음 그 마지막 성장』, 『죽음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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