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13

무아(無我) 1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우리는 지금까지 연기(緣起)와 공에 대한 논의로부터 만물이 조건에 의해서만 생성 지속 소멸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 존재(自在)할 수도 또 자성(自性)을 가질 수도 없어서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어떤 사물도 언제나 그것의 조건 가운데 일부는 변하기 마련이어서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도 함께 논했다.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은 불교에서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힌두교와 그 전신인 바라문교, 그리고 서양 종교에서는 고정불변한 자성을 가지고 스스로 영원히 존재(自在)한다는 ‘참된 나’, 즉 아트만(atman)이나 영혼(soul)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 가운데 이렇게 영원불변 불멸하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들 종교의 신자들은 참나와 영혼을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트만이나 영혼의 존재에 대한 주장은 불교의 가르침인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을 정면으로 거스르게 된다. 아트만과 영혼은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 substance)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굉장한’ 자성을 가지고 영원불멸 불변한다. 불교에서는 마땅히 그런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아야 이치에 맞겠고,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직접 그런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펴셨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무아론을 논의하기에 앞서 아트만과 영혼 그리고 자아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바라문교와 힌두교의 아트만

그 옛날 힌두교의 전신인 바라문교의 성전(聖典) 베다(Vedas)에는 ‘진정한 나’ 또는 ‘절대적인 주체로서의 나’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들은 물었다.

“이 육신이 참된 나인가? – 그럴 리가 없다. 육신이란 결국 소화된 음식물에 불과한데, 그런 하찮은(?) 것이 참된 나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물질의 차원을 넘어 우리 의식 세계에 존재하는 감각 경험이 절대적인나인가? – 감각 경험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의식에는 감각의 기능을 넘어서 언어를 사용하며 논리적 추론을 하는 고차원의 사고(思考) 능력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의식의 최고 기능인 사고 기능이 참된 나인가? – 아니다. 사고 기능 자체가 아니라 그런 기능을 포함해 모든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존재의 근저에 있는,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성을 가진 기체(基體)가 있고, 그것이야말로 참된 나이다.”
바라문교에서는 우리의 모든 의식을 안으로부터 주체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기체를 아트만이라고 불렀다. 이 아트만은 ‘절대적인’ 주체(subject)로서, 절대적이다 보니 그것은 결코 객체(object)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트만이 가진 어떤 속성을 표현하려면 아트만을 표현의 대상(object)으로 보아야 하는데, 아트만은 결코 대상화 또는 객체화될 수 없기 때문에 아트만의 속성은 말로도, 그림으로도, 그리고 그 밖의 어떤 수단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ineffable, indescribable). 종교적 수행으로 깊은 명상에 들어 스스로 아트만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 해탈(moksha, liberation)하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이런 아트만을 언어로 기술할 수는 없다.

아트만을 영어로는 셀프(self, 자아 自我)로 번역하는데, 최근의 영어권 불교학자들은 자아(self)와 영혼(soul)을 같은 것으로 보며 논의를 전개한다. 한국어로는 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참나’에 해당된다. 여기서 영혼은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어떤 연기(smoke) 덩어리 같은 것이 아니라 철학적 및 종교적 의미에서의 추상적 존재인 영혼을 말한다. 불교의 무아론은 이러한 아트만, 영혼, 또는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서양 종교의 영혼

나이가 5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 찍은 흑백으로 된 백일이나 돌 사진 한 장은 가지고 있다. 어느 날 우리 친구 길동이가 우리에게 그의 돌 사진을 보여주며 “얘가 나야”라고 한다. 우리는 보통 “그래? 귀엽다”라고 대꾸해준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사진 속의 아이는 오십이 넘은 길동이와 생긴 것도 다르고, 말도 몇 마디 못하고, 키도 작고, 몸무게는 훨씬 적고, 길동이가 잘하는 영어는 한마디도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사진 속의 아이와 오십이 넘은 길동이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영혼을 믿는 서양인들은 쉽게 답할 수 있다. 그들은 흑백사진 속의 아이와 우리 길동이의 영혼이 동일하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영원히 불변 불멸하다는 영혼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이런 철학적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굉장하다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아온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이 답변은 논리적으로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begging the question)를 범한다. 왜냐하면 서양인들이 영혼의 존재를 먼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한 이후에야 사진 속 아이와 우리의 길동이의 영혼이 동일하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증은 철학적으로 너무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도 더욱더 서양 종교에서는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식으로 철학이 아닌 신앙으로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혼(soul) 또는 자아(self)는 ‘어떤 사람을 동일한 그 사람이게끔 해주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라고 표현할 때의 ‘사람’은 실은 영혼이나 자아가 아니라 (성격을 가진) 인격체(person)를 의미한다. 다음의 두 문장을 비교해보면 이 차이를 쉽게 볼 수 있다.

 

(1) 너무도 많은 시련 끝에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He has become a different person after too much suffering.
(2) 너무도 많은 시련 끝에 그는 다른 자아가 되었다.
He has become a different self after too much suffering.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첫째 문장은 옳은 표현이라고 받아들이지만 둘째 문장은 불가능한 표현으로 되어 있어서 그 내용이 무조건 거짓이라고 판단한다. 위에서 ‘사람’이라고 표현한 ‘인격체’라는 의미의 person은 환경에 따라 또 시간이 흐르며 성격 등이 변해 ‘다른 사람 a different person’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영혼 또는 자아’라는 의미의 셀프는 결코 변하지 않는 어떤 무엇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다른 자아 (또는 영혼) a different self’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이기 때문에 그런 대상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둘째 문장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돌 사진 속의 아이와 지금의 길동이를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동일한 자아 또는 영혼이다. 자아/영혼은 결코 변하지 않는 무엇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파괴될 수 있으려면 그것에 물리적이거나 화학적 또는 어떤 다른 변화가 가능해야 할 텐데, 영혼과 같이 전적으로 불변하는 것은 파괴될 수도 없다. 그래서 불변하는 것은 불멸하게 된다. 그리고 불멸한 것은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영혼이나 아트만에 대해 영원불변 불멸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달아주는 이유다. 불교의 무아론은 이렇게 영원불변 불멸하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불교와 철학에서의 자아(self, 참나)

불교와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self)’란 어떤 주어진 사람(인격체, person)의 본질(essence)을 의미한다. 본질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해주는 무엇, 또는 이것이 없이는 어떤 것이 그것일 수 없는 무엇(that without which something is not what it is)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성(自性, self-nature)이 철학에서 말하는 본질에 해당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계속적으로 그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어떤 부분이 자아(self)인데, 이것은 서양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soul)의 철학적 의미와 일치한다. 그래서 최근 영어권 불교학자들은 self와 soul을 동일시하며 두 단어를 서로 바꿔 쓰기도 한다.
힌두교와 그 전신인 바라문교의 아트만은 영어로 ‘self’로 번역된다. self는,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나”라는 단어의 지시체가 된다. 그것은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무엇’이며, ‘진정한 나, 진아(眞我), 참나’이며, ‘내게 나의 정체성(identity)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self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는 두 개의 가능한 답변이 있다. 다음 호까지 이어서 논의하겠지만, 불교는 이 두 답변이 모두 옳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self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붓다의 무아론(無我論)을 진리의 가르침으로 자리 잡게 한다.

(1) 어떤 주어진 사람 전체를 일컬어 self라고 한다.
(2) Self란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기 위해 필수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가지는 한 부분이다.

철학자들에 따라서는 (1)의 답변을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부분들이 실재한다고(real)해서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마저도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밀린다왕문경』과 현대 형이상학에서의 미리올로지(mereology)1)의 논증을 도입해 ‘전체로서의 self’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fiction)라고 증명하기도 한다.2) 그러나 나는 이 첫째 답변은 철학적 논증을 통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쉽게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격체 전체로서의 self’라면 몸과 마음의 모든 것이 모여 있는 집합체를 의미하는데, 우리 몸도 끊임없이 변하고 또 마음의 상태도 언제나 변하는데 심신의 전체 집합체로서의 인격체가 영원불변 불멸한 self라는 주장은 처음부터 설득력이 없다. 이렇게 직관적으로 쉽게 그릇됨을 보일 수 있는 답변을 복잡한 철학적 논증을 동원해 반박할 필요는 없겠다. 인격체 전체가 self라면 영원불변 불멸하다는 self는 존재하지 않는다.

(2)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반박하신 여러 논증이 니까야에 기록되어 있다. 부처님의 원음으로 되어 있는 논증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한번 이 답변을 고찰해보자.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바로 그것’이 나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언뜻 생각하기에도 그것이 우리 육신의 일부일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몸의 모든 부분이 어려서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끊임없이 변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동일한 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항상(恒常)한 참나가 모든 부분이 무상(無常)한 육신의 일부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만약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고정불변의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마음 또는 의식 속에 존재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생각조차도 어려움에 직면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깨닫게 된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아주 단순한 질문을 통해 self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마음속에 self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한번 눈을 감고 내성(內省, introspection)을 통해 마음속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당신의 self를 찾아보라. 오랫동안 열심히, 아주 열심히 그렇게 해보라. 당신은 과연 당신의 self를 만날 수 있는가? 답은 자명하다. 우리가 마음속을 아무리 열심히 뒤져보아도 self 자체를 만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내성의 과정을 통해 부딪치는 것들은 주로 현재의 감정 상태이거나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것들에 대한 기억들이다. 사진 속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에 관한 이미지나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들도 마주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상 또는 관념들(ideas)일 뿐이지 셀프 자체는 아니다. 기뻤던 추억, 회한(remorse), 고통스러운 경험 등 자신과 관련된 많은 기억과도 마주치겠지만 이것들도 모두 상 또는 관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 뿐, 그 어느 것도 self 자체는 아니다.

이렇게 내성을 통해 마주치는 관념들은 고정불변하게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쉽게 잊히기도 하고 또 새로운 관념들로 교체되기도 한다. 단지 이렇게 잊히고 교체되는 과정이 대단히 신속하고 또 지속적이어서 우리는 마치 동일한 self가 계속 존재하는 듯이 착각하게 될 뿐이다. 우리가 데이비드 흄과 같이 경험주의적 및 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self의 존재를 결코 경험적으로 확립할 수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에는 여전히 참나(self)의 존재를 주장하는 출재가자들이 있다. 이분들에게는 위와 같은 흄의 논증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되겠다. 이분들은 흄이 제시한 논증 과정에서 내성을 통해 마음속을 살펴보는 주체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참나라고 강조한다. 눈이 사물을 보지만 정작 사물을 보는 눈 자신은 볼 수 없듯이,3) 내성을 하는 self는 마음속의 여러 관념들과 마주칠 수 있지만 self 자신을 마주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내성의 주체로서의 참나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흄에 대한 이러한 반박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일 뿐이다.

신경과학자들은 주체로서 주관적 관점을 가지게 하는 self의 기능을 담당하는 고정불변한 뇌의 부위를 찾아내기가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해왔다. 모든 정신 및 심리작용을 그것의 물질적 기반으로부터 이해하려는 과학자들에게 self의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물리적 바탕이 사람마다 다르고 또한 사람에 있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이 변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온 self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서양에서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을 직간접적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사람들이 신경과학자들이라는 흥미로운 관찰도 있다. 실제로 신경과학자 출신으로 무아론을 주장하는 책을 쓴 학자들도 있다.

 

한편 사물의 상을 사진에 담아내지만 그런 자신을 찍을 수 없는 카메라가 전통적으로 말하는 self의 기능을 일부 수행하지만 우리는 카메라가 self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아가 요즈음 잘 만들어진 컴퓨터 시스템은 자체를 관찰하고 검사하는(self-monitoring) 기능을 가진 것이 많은데, 자신이 자신의 시스템 안에서 수행하고 있는 모든 기능을 관찰하면서 무슨 문제점이 있으면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컴퓨터가 self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기능을 수행한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컴퓨터에 따라서는 이런 자체 검사 기능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어서, 한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프로그램이 그 기능을 대체하기도 한다. 동시에 여러 프로그램이 자체 검사 기능을 수행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도 있다. 또 자체 검사 기능 프로그램들이 각각 서로를 관찰하고 검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우리는 이 컴퓨터가 여러 개의 self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자체 관찰 및 검사 기능의 존재로부터 self의 존재를 도출하고 주장할 수는 없다.

간단한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을 통해서도 우리는 self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우주인이라면 우리 뇌세포 하나하나를 전적으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컴퓨터 칩으로 교체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전적으로 기계로 된 뇌가 여전히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꺼번에 그런 교체 작업을 완성할 필요는 없고, 오랜 세월 예를 들어 20여 년에 걸쳐 어떤 사람이 스스로 알지도 못하게 그의 뇌세포를 하나하나 실리콘 칩으로 바꾸어간다고 가정해보자. 20여 년 후 완전히 컴퓨터 소재로 만들어진 뇌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 사람도 스스로는 self를 가지고 주관적 관점으로 그의 의식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내성하며 산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컴퓨터 뇌가 self(아트만, 영혼, 또는 참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기계가 self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현재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 뇌에도 self가 자리 잡을 곳은 없다고판단해야 옳을 것이다. 기계와는 달리 유기물이 특별히 굉장한 존재론적 위치를 차지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엄밀히 검토해보면 영원히 고정불변한 self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인격을 가진 개인 인격체(individual person)로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가 영원불변의 자성(自性)을 가진 참나로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는 몸과 여러 심리 상태가 (오온五蘊이) 잠시 (약 80여 년 동안) 모여 있는 집합체로 존재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음 호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원음으로 된 참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증을 검토하면서 불교의 무아론을 철학적으로 논증해보겠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 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를 출판했고, 유선경 교수와의 공저 『(가제)생명현상과 불교』가 출판 예정이다. Buddhism for Thinkers를 집필 중이며,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4 ×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