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세상 읽기

1. ‘해독 가능한 평범한 이미지’에서
‘꿰뚫으며 상처를 파헤치는,
아름다움’으로
『롤랑 바르트의 사진』

 

낸시 쇼크로스 지음,
조주연 옮김,
글항아리 刊, 2019

 

사진관에 전시된 천편일률적인 포즈의 가족사진과 오직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의 사진’은 어떻게 다를까. 누구에게나 쉽게 전시되고, 사진사의 요구에 따라 포즈를 맞춘 전형적인 사진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향하지 않는다. 평범하고 상투적이며 정형화된 이미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의 사진’은 나의 가슴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뚫는 듯이 아프고 괴롭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애틋하며, 아픔을 주면서도 애정을 불러일으킨다. 문학비평가이자 철학자였던 롤랑 바르트는 바로 이 천편일률적인 이미지를 ‘스투디움(studium)’, 가슴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뚫는 듯한 아픔을 주는 이미지를 ‘푼크툼(punktum)’이라고 불렀다.

오래전 ‘푼크툼과 스투디움’이라는 개념에 대한 바르트의 글을 읽고 받았던 엄청난 충격을 기억한다. 바르트의 후기 대표작 『밝은 방』에서 소개된 이 개념은 사진의 역사를 뒤흔드는 폭발력을 지닌 것이기도 했다. 이 책은 난해하지만 중요한 저서임에 분명한 바르트의 『밝은 방』에 이르기까지 바르트의 글쓰기와 사유의 흔적을 추적하며 바르트 사상의 현재적 의미를 차분하게 재구성해낸다. ‘전쟁’ 하면 떠오르는 흔하고 전형적인 전투 장면의 이미지들, ‘굶주림’ 하면 떠올리는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깡마른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바로 스투디움이다. 스투디움은 상업적이고, 천편일률적이며, 우리의 예민한 감각을 마비시키는 정형화된 이미지다. 하지만 푼크툼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끊임없는 사유와 반성을 멈출 수 없게 하며,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마음속을 파고드는 잊을 수 없는 이미지다. 시리아 난민의 참상을 전 세계에 고발한 바로 그 사진, 겨우 세 살의 나이로 바닷가에서 홀로 죽어간 쿠르디의 사진이 바로 푼크툼의 사례다.

이 책은 바르트가 걸어간 길을 좀 더 친절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해설해준다. 바르트의 난해한 언어를 바르트에 대한 깊은 애정과 명철한 지성의 힘으로 분석해낸 낸시 쇼크로스의 글쓰기가 놀랍다. 바르트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가득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난해하면서도 매력적인 책’을 ‘이해 가능한 언어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손잡아주는 학자의 글쓰기가 지닌 따스한 매력을 배운다.

 

 

2. 고독사 시대의
새로운 죽음의 패러다임
『죽음과 장례의 의미를 묻는다』

 

고타니 미도리 지음,
현대일본사회연구회 옮김, 한울아카데미 刊, 2019

 

‘고독사’라는 말이 노년층뿐 아니라 중장년층과 젊은이들에게도 적용되어가는 시대. 사람들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의 방식’을 사유하기 시작했고, 살아 있을 때미리 차분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싶어 하거나 죽음의 방식을 가족들과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단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일본인들의 죽음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죽음과 장례의 의미는 단지 ‘의례’나 ‘묘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갈 것인가, 어떤 생의 의미를 추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을 조용히 마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죽음과 장례의 문제는 좀 더 일상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고인과 조문객 사이의 만남이 불가능하다. 장례식은 철저히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의례에 그치는 한계가 있다. 이런 장례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생전장’을 꿈꾸고 실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전장(生前葬)’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사망 후에는 조문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생전에 스스로 자신의 장례식을 주최한다는 취지이다. 어느 여성은 암이 진행되어 반년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은 것을 계기로 친구들을 불러 생전장을 했다. 죽으면 화장만 해주면 좋겠다는 것이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그 여성의 소망이었다.” 보다 소박하고 간결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은 소망,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직접 하고 가고 싶은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죽음을 공포의 대상이 아닌‘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의 선택이 바로 생전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장례 문화’와 ‘지금부터의 장례 문화’는 전혀 다를 것임을 강조하고,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 죽음의 방식을 미리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강조한다. “사람이 죽을 때 침대 옆에 가족이 있는 모습을 TV 드라마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앞으로는 죽을 때 남은 가족이 있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회가 된다. ‘지금까지’와 ‘지금부터’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인생의 마지막을 맞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사회안전망이나 시스템에 의지하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네트워크, 나의 주체적인 결정과 주변 사람들의 애정 어린 도움이 중요하다.

저자는 ‘고령자 생활협동조합’ 같은 형태, 즉 살아 있을 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챙기는 느슨한 공동체를 제안한다. 저자는 ‘묘우(墓友)’라는 표현을 쓰며 ‘함께 묻힐 친구’를 구하는 것을 제안한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과 얼마나 의미 있는 관계맺음을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최근 일본에서 혈연을 초월한 공동묘나 고령자 공동주택 등 새로운 공동체가 늘어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노년의 삶’을 보다 의미 있고 외롭지 않게 보내기 위한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고령자들이 노화나 죽음을 서로 지원하는 시스템이 바로 공동묘나 고령자 생활협동조합이다. 고령자 생활협동조합에서는 노인들이 취향과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모임을 만들고, 합동묘를 조성해 사후에도 회원들이 같은 묘에 들어가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생활 방식이 너무도 다르고,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현대 사회에서는 ‘자식이 부모의 장례와 묘지와 제사를 모두 책임진다’는 과거의 공식이 깨져가고 있다. 이것을 슬퍼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기보다는 ‘내 삶을 어떻게 의미 있게 마무리할 것인가’라는 미래의 문제를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현재의 문제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허례허식이나 체면치레를 모두 버리고, ‘생존장’이나 ‘합동묘’라는 보다 소박한 형태의 죽음을 꿈꾸는 것은 단지 경제적인 선택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진지한 문제의식의 소산이기도 하다.

꼭 무덤에 함께 묻힐 묘우를 찾지 않아도 좋다. 언젠가 함께 묻힐 친구를 사귀어도 좋지만, 그것이 너무 부담스럽다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더라도, 장례식이나 묘지를 모두 생략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줄 ‘일’과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멋진 죽음의 준비가 아닐까. 지금 이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줄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정여울 작가. 저서로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월간정여울-똑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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