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본 아름다운 우리 절|제주도 한라산 약천사__우태하·윤제학

가장 제주도스러운 절에서

한국 불교의 미래를 본다

 

 

 

절 오백, 당 오백. 제주 불교를 이야기할 때면 으레 등장하는 말입니다. 절도 많고 신당도 많았었다는 얘기지요. 그럴 수밖에요. 화산섬의 척박한 땅과 늘 죽음을 마주한 바다에 기댄 삶이 오죽했겠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신라를 섬기면서 ‘탐라’라는 이름을 갖게 된 후에도 독립 국가에 가까웠던 제주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부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삼별초의 항쟁과 몽골의 지배, 유배의 땅이 된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노략질과 관리들의 횡포, 일제 침탈과 태평양전쟁 말기의 전쟁 기지화, 그리고 4.3사건. 눈물과 한숨을 빼고 제주의 역사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절 오백, 당 오백도 모자랄 제주에 무불(無佛) 시대가 있었습니다. 조선조의 억불 정책이 근본주의적으로 작동된 곳이 제주였습니다. 숙종 28년(1702)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1년가까운 재임 기간에 제주 사찰의 대부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이후 약 200년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만 살아 있던 불교가 공식적으로 되살아난 건 1908년 비구니 안봉려관(1865~1938) 스님이 관음사를 다시 창건하면서부터입니다.

국제적 관광도시가 된 지금의 제주에서 과거의 아픔을 의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2006년부터는 행정구역으로서의 명칭도 ‘제주특별자치도’로 바뀌었습니다. 제주의 변화만큼이나 제주 불교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약천사’가 있습니다.

약천사는 한라산이 남쪽으로 길게 자락을 펼친 곳에 자리했습니다. 조금만 뻗으면 태평양에 발을 담글 수 있습니다. 중문관광단지와 서귀포시청의 가운데쯤입니다. 관광자원으로서도 최고의 입지입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관광 코스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합니다.

약천사는 우선 압도적 규모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큰법당인 대적광전은 외부 3층 내부 4층 구조로 높이는 29.5m에 이릅니다. 한국 전통 양식의 단일 법당으로는 동양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셨는데 그 높이가 4.5m로 목불 좌상으로는 국내 최대라고 하는군요. 하지만 눈요깃거리로서 외관과 규모는 절의 진정한 존재 의미와 무관합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약천사의 정녕 ‘제주도 절다운’ 모습과 현대적 역할입니다.

약천사는 제주의 고유성을 사찰 장엄에 끌어들임으로써 제주의 풍광 속으로 녹아들었습니다. 야자수가 일주문인 양하고, 돌하루방이 사천왕 구실을 합니다. 귤나무로 정원을 가꾸어 자연스러우면서도 편안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 귤은 귤 재배 농가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하귤(여름귤)입니다. 창건주의 따뜻한 마음을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사찰로서의 고유 기능입니다. 요즘 세간에서 완강히 거부하는 중증장애인 복지시설인 자광원을 운영합니다. 관광 사찰의 기능을 넘어 제주 사회의 ‘약수’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약천사는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창건주 혜인 스님이 1,488m2(450평) 남짓한 터에 59m2(18평)의 초가삼간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암자를 대찰로 바꾸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1988년 불사에 착공해 1996년에 대적광전을 세움으로써 오늘의 약천사를 이룬 기적 같은 절입니다.

관음사가 제주 불교 재건의 상징이라면, 약천사는 제주 불교 혁신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그 새로움은 몰역사적 새로움이 아닙니다. 약천사 입구의 ‘태평양전쟁 희생자 위령탑’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통절한 역사 인식과 투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새로움입니다. 현대 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진│우태하(항공사진가), 글│윤제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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