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본 아름다운 우리 절|봉화 태백산 각화사__우태하·윤제학

7월의 각화사, 깨달음의 광휘

 

 

 

 

초여름 숲은 잘 자란 청년 같습니다. 아직은 태풍으로부터도 상처 입은 적이 없으니, 세상 에 대한 두려움이나 호오의 감정도 없겠지요. 담대하기도 바람 탄 범 같아서 곧 다가올 한여름 뙤약볕이 두려울 리 없습니다. 이런 젊은 숲의 혈기에 무모가 없지 않겠으나 세상사의 불 가해함에 비하면 일소에 부칠 일일 테지요. 그렇다 하여 모든 젊은 숲이 용맹만을 자랑삼는다 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젊은 숲이 한가롭기까지 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역시 산사만 한 곳이 없을 것 같 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나이테 속에 켜켜이 쌓인 염불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산사 의 숲 말입니다. 봉화의 각화사라면 이런 기대에 실망을 안기지 않을 것입니다. 봉화는 장대한 산줄기 사이의 고을입니다. 동쪽으로 낙동정맥, 서쪽으로 백두대간입니다. 태백산과 소백산의 그늘이 누우면 그 아래가 봉화입니다. 각화사는 봉화의 북쪽, 금강송의 산 지로 이름난 춘양면의 각화산(1,117m) 남쪽 허리쯤에 자리한 절입니다.

각화사의 역사를 알게 하는 가장 오랜 유물은 도량 입구 숲길 가에 자리한 거북 모양의 비 받침돌인 귀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입니다.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입니다. 현재의 비신과 머릿돌은 새로이 만든 것입니다. 이 비 석의 안내판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6년(686)에 원효 스님이 창건하고, 고려 예종 때 계응 스님 이 중건, 1926년에 달현 스님이 중수했다고 합니다.

각화사의 역사 가운데 가장 흥성했던 시기는 각화사 위쪽에 태백산 사고가 세워졌을 때입니다. 조선 왕조는 오대산·마니산·적상산·춘추관·태백산, 이렇게 다섯 곳에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했는데 태백산 사고는 선조 39년(1606)에 지어져 300여 년 동안 존속되었습니다. 각화사는 『조선왕조실록』을 수호하는 사찰이 되면서 800여 명의 스님들이 수도하는 대도량을 이루었다 합니다.

각화사의 도량으로 드는 문루에는 ‘태백산 각화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실제로 각화사 를 품은 산은 각화산인데 왜 태백산이냐는 의문이 들 법합니다. 이 의문을 해소하려면 창건 당 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당대인들에게 각화사는 태백산의 품속이었습니다. 각화산은 인식조차 없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물론 「대동여지도」에도 ‘각화산’은 보이지 않습니다. 각화산 이라는 지명은 근세에 들어 각화사의 이름을 빌려 붙인 산명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문루를 지나 돌아보면 ‘월영루(月影樓)’라는 편액이 붙어 있습니다. 왜 이 누각의 이름이 월 영루인지 다시 돌아서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알게 됩니다. 대웅전 용마루 위로 모난 곳이라고 는 없는 각화산 능선이 펼쳐집니다. 달빛처럼 부드럽습니다.

각행원만(覺行圓滿). 깨달은 이의 행위는 마땅히 저 부드러운 능선과 같아야겠지요. 온갖 풍 상에 온몸을 내 주고도 안온한 경지. 정녕 깨달음의 광휘입니다. 각화(覺華)입니다. 7월의 각화사는 젊은 숲의 용맹에 한 도인의 무위로 충만합니다.

 

사 진 │ 우 태 하 ( 항공사진가), 글│윤 제 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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