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담 대선사 법문

영원한 행복의 길

 

 

 

 

 

 

 

이 세계는 사실 각자 자신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내 몸 밖에 세계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으므로 세계가 있습니다. 내게 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식(識)이 밖으로 나타나서 표현된 것이 우주법계, 삼라만상 두두물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면 온 세계가 다 좋게 보이고, 내 마음 하나가 슬프고 괴로우면 온 세계가 다 보기 싫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었거나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어도 내 마음이 슬프면 꽃도 슬프고 하늘의 밝은 달도 슬픈 것입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기쁘고 행복하면 저 밝은 달이 그렇게 좋을 수 없고 꽃도 그렇게 고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 세계의 모든 것은 내가 좋아야 좋은 것입니다. 친구도 내가 좋아야 친구를 보면 반갑지, 내가 불행하면 친구도 반가운 줄 모르고 이 세상에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세계가 곧 나요, 내가 곧 세계입니다. 따라서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려면 내 마음이 행복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행복하게 될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많은 재산을 모으고 높은 벼슬을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면 잠시는 참 좋다는 생각이 들고 기뻐하지만 그 시간도 얼마 가지 않고, 또 얼마 안 가서 재산이 없어지거나 벼슬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고통이 배가 돼서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 년 천 년 하면 긴 것 같지만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 년 천 년 하면 긴 것 같지만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법성게(法性偈)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입니다.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은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입니다.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 있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줄과 씨줄이 서로 이렇게 교차해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할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가 부처님이 계신 자리라는 말입니다. 삼세제불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

 

생사차무승여속(生死且無僧與俗) 생로병사는 승과 속이 없고

성진나유오화미(性眞那有悟和迷) 진여성품은 깨친 이와 미혹한 이가 차등이 없다

가타사기동참자(伽陀寫寄同參者) 이 게송을 써서 동참 도반들에게 기증하노니

두우성건일우서(杜宇聲乾日又西) 두견이는 쉬지 않고 우는데 해는 서쪽으로 지는구나.

– 중봉명본 ‘경세입이수(警世卄二首)’ 중에서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나 속가에 계신 여러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이나 누구에게나 생사는 다 있다는 것입니다. 진여(眞如) 성품은 깨달은 사람이나 미(迷)한 사람이나, 깨달은 부처님이나 미(迷)한 중생이나 다 똑같습니다. 깨달은 성현이라고 해서 진여 성품이 더 크고 위대하고 좋고,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해서 진여 성품이 작고 추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진여 성품 그 자리에 가서는 다 똑같습니다. 출가한 스님이라고 해서 생로병사가 없고 속가에 계신 분만 생사가 있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게송을 써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동참 도반들에게 기증하노니, 두견(杜鵑)은 쉬지 않고 소쩍소쩍 울고 있는데 해는 또 서쪽으로 지는구나.

‘한 생각’ 일어났다 없어지고 또 ‘한 생각’ 일어났다 없어진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生死)입니다. 일념(一念) 속에 구백 생멸(九百生滅)이 있습니다. ‘한 생각’ 속에도 미세하게 보면, 원자 현미경 같은 그런 미세한 현미경으로 일념을 들여다보면 구백 생멸이 있다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 모공(一毛孔) 속에 구억 충(九億蟲)이 들었다. 구억 개의 벌레가 우글거리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현미경도, 원자 현미경도 없었는데 부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일념 속에 구백 생멸이 있어,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로 그것이 생사고, 그 생사가 결국 우리에게 육체적인 생사 또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게 하는 원인이요 장본인인 것입니다. 그 일념 일념을 단속하는 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의 자물통입니다. 그 자물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휩쓸려 나가느냐’, ‘거기에 끌려들어가지 않고 화두를 드느냐’에 따라서 삼악도(三惡道)로 가느냐 해탈도(解脫道)로 가느냐의 분간이 있는 것입니다. 소쩍새는 쉴 새 없이 울고 있는데 해는 오늘도 또 서쪽으로 넘어갑니다. 이 게송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고 알뜰히 정진하시기를 부탁합니다.

 

 

이 글은 송담 대선사의 1989년 11월 용화선원 일요 법회 법문을 편집부에서 녹취, 정리한 것이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6 −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