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행복을 말하다 ② 진화심리학과 불교, 그리고 행복의 공통점

진화심리학과 불교,

그리고 행복의 공통점

 

우리가 고통스럽고 남에게도 고통을 주는 이유는 세상을 보는 눈이 명징하지 못 하기 때문이라고 불교는 말한다. 나 자신과 타인, 세상을 보는 눈이 미혹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측면을 잘못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 전통은 무수하고 다양하지만 진화심리학을 다룬 나의 저서에서는 모든 전통 에 공통으로 포함되어 있는 요소, 즉 무아와 공성에 주목했다. 무아는 자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공성은 사물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 지 않다는 개념이다. 현대 심리학 특히 진화심리학은 무아와 공성을 입증하는 데 많 은 도움이 된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이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진 화하게 된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나의 저서 『도덕적 동물(The Moral Animal: Why We Are, the Way We Are; 1995)』을 쓰면서 두 가지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첫째, 마음은 세상 을 명징하게 보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 인간은 행복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이 일상의 세상을 잘 인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자연선택이 중요 하게 여기는 범주가 아니다. 자연선택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물려 주는 과업을 잘 수행하는 형질이다. 따라서 만약 자신과 타인에 대한 허상(illusion)이 유전자를 잘 물려줄 수 있게 돕는다면 자연선택은 허상 쪽을 선호할 것이다. 이는 분 명 불교와도 연결되는 것이 불교에서는 우리가 허상을 없애기 위해 수행하지 않는 한 허상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진화심리학이 밝힌 또 하나의 주장, ‘우리는 행복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것도 불교와 분명한 연관이 있다. 우리 인간은 사물의 상태에 대한 불만을 거듭 느끼도록, 그리고 특정한 방식으로 고통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두려움, 슬픔, 불안 등의 감정이 차세대로 유전자를 전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연선택은 사 회적 위치에 대한 개인적 불안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진화적 측면 에서는 높은 사회적 지위가 차세대로 유전자를 전달하는 것과 상관관계가 있기 때 문이다.

마지막으로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고통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불교 의 가르침을 입증할 뿐 아니라 이 둘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가르침에도 증거를 제공 한다. 예를 들면 불교는 우리가 무상을 잘 알지 못하고 무상의 원리에 맞게 삶을 살 지도 못한다고 한다. 만족이 잠시만 존재하는 것임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음식을 먹 거나 섹스를 하는 등 하나의 목표를 이루어 얻은 행복은 빠르게 사라진다. 진화심리 학에서는 만약 그렇지 않고 행복이 지속된다면 동물은 차세대 유전자 전달에 도움 이 되는 행위인 음식 섭취와 섹스를 계속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고통이 유전자 확산에 도움이 되므로 인간에게 고통을 내장해놓았다 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어떤 목표를 이루었을 때, 만족감은 신속히 사라지고 불안감과 불행감이 남을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그로부터 얻을 만족감에 더 집중하도록 인간이 설계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이런 고통은 매우 미세하고 심오하게 내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든 고통은 다 자연선택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 고통의 일정 부분은 자연선택에서 ‘의도된’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를 보면 인간이 몸담고 진화해온 환경에 속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대중 연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날 밤에 잠을 잘 수 없다든지 등의 역효과를 일으킬 정도로, 불안감을 조성한다. 하지만 자연 환경에서는 큰 규모의 대중 연설이 없었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 대처하도록 설계되 지 않은 것이다.

대중 연설의 경우 수렵 채집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형태의 고통이었던 불안감이 수반되지만 이 불안감은 자연선택이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형식으로 일어난다. 따라 서 이 불안은 자연선택과 연관되어 있지만 자연선택에서 직접 나온 것은 아니다.

자연선택이 의도한 불안의 예를 등산으로 들어보겠다. 독사가 있으리라는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풀숲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하고 경계를 할 것이다. 이 경우 두려움이라는 고통은 설계된 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뱀 자체가 없어서 두려움이 허상인 경우도 있겠지만 이 경우 자연선택은 잘못 된 경보를 더 선호한다. 후회보다는 안전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계된 대로 작동해서 고통받는 경우와 우리가 처한 환경 때문에 잘못된 경보로 인해 고통 받는 경우가 있다.

불교의 무아 개념은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인 선언이다. 심리학을 보면 자아에 대한 직관이 틀렸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 우리는 자아를 ‘사고하고 결정을 내리는 경 영자’로 보지만, 인간 의식은 ‘무의식적으로 생성되는 사고와 결정의 관찰자’라는 증 거도 많이 있다. 의식이 생성자라는 생각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승객이 자기가 비행 기를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왜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러고는 그 이야기를 믿는다는 실험적 증거가 있다. 또한 자신이 평균 이상의 선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통계적, 과학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사람의 윤리성이 평균 이상일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연구 결과가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 생각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렇게 근본적으로 자아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지니고 있다. ‘경영자 자아’가 실제보 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또한 자아가 모범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가장 위대한 점은 사물의 진실을 보게 되면 사람이 더욱

선해진다는 주장이다. 아직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 주장은 좀 더 깊이

이해되어야만 한다. 실재의 진리가 나의 행복과 윤리적 진리와

수렴한다면 그보다 굉장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면 자연선택이 내장해놓은 기전으로부터 해방 이 시작된다. 특히 감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처음에는 혐오와 집착(피하기와 접근하기)에 서 시작해 서서히 복잡한 감정까지 올라간다. 이 모든 감정은 자연선택이 우리 인식 과 사고를 제어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경쟁자에 대한 반감은 그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쳐 좀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게 한다. 명상 수행을 통해 그런 감 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물을 볼 수 있게 되면 당연히 사물을 더욱 명료하게 볼 수 있 다. 미혹의 근본적인 기전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명상을 고통 완화 기법이나 생산성 향상 도구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스트레 스 감소 등 단지 치유의 목적으로 명상 수행을 하는 사람도 좀 더 깊은 탐구의 길을 가고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불안을 대함에 있어 더 이상 불안과 동일시하지 않 는 방식으로 관계를 바꾸면 서서히 무아를 깨달아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관점은 붓다가 『무아경(無我經; Anatta-lakkhana Sutta; SN 22.59)』에서 밝힌 것과 일 치한다. 붓다는 오온을 하나씩 예를 들어가며 “이 의식이 ‘나’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 인 생각인가? 나는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래서 번뇌가 생긴다. 그러니 마음 을 나 자신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설명했다. 경전의 끝부분에서 붓다는 “이전에 ‘나’ 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이런 사고 과정을 계속 적용해간다면 완전한 해탈을 이루 게 되리라”고 말한다. 어떤 복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깨달음을 얻어 한순간 무아 를 체험한다. 나는 그들이 부럽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과정은 점진적이다. 단지 치유적인 수행이라 간주하는 것이 때로 깊이 영적이고 철학적인 것일 수 있다.

내 경우 명상 수행은 불안과 스트레스 관리에 도움이 되었다. 스트레스가 심한 날 은 밤에 좌정하고 명상을 한다. 돌이켜보면 그를 통해, 특히 집중 수행의 경우, 더 깊 은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집중 수행에서 나는 가끔 ‘나’라는 경계가 사라짐을 느 꼈다. 내가 저서 『불교는 왜 진실인가(Why Buddhism is True: The Science and Philosophy of Meditation and Enlightenment; 2018)』에서 밝힌 것처럼 선방 밖에서 지저귀는 새가 저린 발 처럼 나의 일부로 느껴졌다.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나의 일부라고 생 각하던 다양한 것들에 대한 집착이 줄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평소보다 더 확대되 고, 덜 뭉친 것처럼 느꼈던 것은 ‘내 마음’이라는 동일시가 줄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평소 나의 내부라 여겼던 것과 나의 외부라 여겼던 것들이 좀 더 연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나의 자아가 어디서 끝나고 세상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가 불분명해진 것이다.

이는 윤리적으로 의미가 크다. 나와 세상 사이에 커다란 경계선을 보지 않는 그만 큼 나의 복지와 바깥세상 존재들의 복지에 대한 윤리적 구분이 줄어들 것이다. 물론 이것도 불교 가르침이다. 무아의 체험적 이해와 윤리적으로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연관되어 있다.

불교의 가장 위대한 점은 사물의 진실을 보게 되면 사람이 더욱 선해진다는 주장 이다. 아직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 주장은 좀 더 깊이 이해되어야만 한다. 실재의 진리가 나의 행복과 윤리적 진리와 수렴한다면 그보다 굉장한 일은 없을 것 이다. 사물을 좀 더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미친 놈’의 성향이 덜해진다는 것이 불교 의 멋진 주장이다.

『불교는 왜 진실인가』 책에서 펼친 지적 주장은 현대 심리학에 기반하고 있고 체 험적 주장은 개인적 명상 체험에 근거한다. 나의 명상 체험을 실은 것은 지적 논리를 보조하고 풍성하게 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동시에 내가 펼친 논리를 명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이해하기를 나는 희망한다.

역사적으로 불교 철학자들이 논리를 펼 때 서양 철학자들과 같은 방식을 사용한 것은 흥미롭지만 불교 철학자들은 동시에 자신이 논증하는 진리가 직접적으로 체험 적으로 이해될 것이라 믿었다. 단지 지적인 이해는 진리라는 느낌과 같지 않다. 물론 내 경험이 숙련된 명상가들처럼 깊이 있는 것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일부 통찰의 경 우 나도 충분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지적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자연선택이 마음을 왜 그런 구조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나의 주장이 많은 사 람에게 좀 더 명상을 통해 직접적 체험을 해보도록 독려할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한 번도 명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명상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 지만 이미 명상을 하고 있고 그로부터 치료적 혜택을 받았음에도 명상의 깨달음적 측면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들도 이제는 좀 더 열심히 명상을 수행해보기를 바란다.

 

발췌, 번역|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이 글은 2018년 1월 2일 https://heleo.com에 게재된 내용으로, 미국 뉴욕시 맨해튼에 위치한 유니온신학대학에서 종교와 과학 담당 객원교수인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와 「리니지(Lineages)」의 편집장 샘 모우(Sam Mowe) 의 대화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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