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행복을 말하다 ④ 신경과학과 불교 수행자의 행복__이영의

신경과학과

불교 수행자의 행복

이영의

강원대학교 교수

 

최근 들어 불교에 대한 신경과학자들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불교 수행자의 뇌를 연구하는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선(禪)을 통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 뇌의 과정을 탐색하고 행복한 불자의 뇌를 연구하고, 중관사상을 신경과학적으로 해 명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행복에 이 르는 길을 더 잘 제시한다는 점이 밝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가 신경과학과 잘 어 울리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신경과학의 입장에서 불교가 말 하는 무아, 고락, 행복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무아와 무상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선언을 통해 ‘생각하는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확실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런 ‘나’가 실제로 존재하는 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런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난다. ‘나’가 생성·소멸하고 고정불변하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떻게 고정불변하는 ‘나’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고정불변하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법무 아(諸法無我)이다!

현대 신경과학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는 무아의 발견이다. 뇌에는 내가 없다. 기 쁨과 슬픔, 기억과 욕망, 자아동일성과 자유의지에 관한 우리의 감각은 실제로는 수 십억 개의 신경세포들과 그것들과 연결된 수많은 분자로 구성된 거대한 네트워크 의 산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자아를 믿고 있는가? 노벨상 수상자인 크릭 (Crick)에 따르면, 첫째로 우리는 자아와 의식을 신경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반기 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로 맛있는 차를 마시면서 느끼는 것과 같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의식의 주관성을 믿기 때문이고, 셋째로 자유의지를 믿기 때문이다. 신경과 학은 그런 믿음들이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나’의 존재를 믿고, ‘나’의 행복과 고통을 느끼며 살아간다. 고정불변하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어떻게 그런 ‘나’로 생각하게 되었는가? 이런 의문에 대답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내러티브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러티브는 ‘말한 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활동이다.

이처럼 자아와 세계는 내러티브의 구성물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와 나 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면, 세계와 자아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 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다. 신화, 소설, 영화, 예술 작품 등을 비롯해 인 간이 상상력을 동원해 구성한 이야기 속에는 수많은 대상이 나타나며, 그것들은 영 원히 존재하지 않고 이야기 안에 존재하며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마음 안에 존재한 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상대적인 존재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불교의 주요 원리인 무아와 무상은 신경과학을 통해 해석되고 정당화될 수 있다.

자아는 내러티브적 구성을 통한 구성물로 이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어떤 이야기를 통해 구성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면서 나에 관한

이야기의 중요성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마음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내러티브는 삶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구성된 삶을 이해하는 기능도 있다. 구성하기와 이해하기라는 양방향성을 통해 내러티브는 나와 세계를 연결한다. 언어 와 문화는 우리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을 지도한다. 언어와 문화를 통해 우리는 경험을 구조화하고 기억을 조직하며 삶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건을 목적적으로 구 성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가 내러티브를 통해 이야기한 ‘자전적 이야기’인 셈이다.

신경과학은 뇌가 어떻게 자아를 구성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뇌는 깨어 있는 마음 안에서 자아를 생성해 의식을 만든다. 둘째, 자아의 본성은 마음이 몸에 집중하도록 하는 데 있다. 셋째, 자아는 원자아, 핵심 자아, 자전적 자아로 발전 한다. 여기서 원 자아는 기초적 자아로 안정된 몸에 나타나는 상태로서 살아 있는 몸 에 대한 동시적 느낌을 갖는다. 핵심 자아는 원 자아가 발달한 것으로 원 자아와 세 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다. 그런 상호작용은 내러티브로 나타나고 그 일부는 느낌으로 나타난다. 자전적 자아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상들이 핵심 자아를 생성할 때 나타난다. 핵심 자아가 ‘여기 지금’에 관심을 두는 데 비해 자전적 자아는 과거와 미래로 자아를 확장하며, 이런 확장을 통해 자아동일성이 확보된다.

불교의 주요 원리인 무아와 무상은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신경과학을 통해 해석되고 정당화될 수 있다. 자아는 내러티브적 구성을 통한 구성물이므로 이제 “나는 누 구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어떤 이야기를 통해 구성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면 서 나에 관한 이야기의 중요성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마음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행복과 고통

세상에는 고정불변한 ‘나’가 없고,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이야기를 통해 의미를 갖는다면, 불교 수행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런 질문과 관련해 불교는 무아와 무상에 더해서 고를 강조한다. 부처가 출가하신 동기 에서 나타나듯이, 중생은 무상과 무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고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불교 수행자가 무상과 무아를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고를 벗어나 즐거움(樂)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런 깨달음은 단순히 정 신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는 소승불교, 대승불교, 티베트 불교 등 여러 유파가 있고 유파마다 행복 개 념이 서로 다르다. 우리는 여기서 이상적 불교가 지향하는 행복이 있다고 보고 그것 을 ‘불교적 행복’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불교적 행복은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 평온 과 만족을 동반하는 안정된 감각이 나타나는 주관적 차원과 덕과 선의 수행을 통해 행복이 있는 삶의 방식이 나타나는 객관적 차원이 그것이다.

불교적 행복이 주관적 차원과 객관적 차원을 갖는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행복은 단순히 ‘행복하다’는 주관적 느낌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것처 럼 규범적객관적실천적 차원을 갖는다. 두 가지 차원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주 관적 행복은 중생이 추구하는 행복일 수 있는 데 비해, 객관적 행복은 이상적 불교의 진정한 목표이므로 양자는 상호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주관적 행복은 객관적 행 복으로부터 유래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객관적 행복이 구현되더라 도 주관적 행복에는 도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전염병이 전혀 통제되 지 않은 아프리카의 외딴 지역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불자는 그곳의 열악한 의료 현실에 절망해 주관적으로 행복하지 않을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는 행복할 수 있 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오로지 마음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적 행복은 주관적 차원뿐만 아니라 객관적 차원을 갖기 때문 에 불자는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불교적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위의 예를 통해 고로 가득 찬 세계에서 불교 수행자가 어떻게 행복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불교가 고를 강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직 고 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불교에는 ‘괴로움(dukkha, 苦)’과 대비되는 ‘즐거움(sukkha, 樂)’이 있다. 중생은 무상·무아의 세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로 인해 고 를 피하고 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고락은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며 깨달음은 그런 현 상을 초월하는 데 있다. 고락의 대립쌍이 있듯이 ‘자애(metta, 慈)’와 ‘연민(karuna, 悲)’ 의 대립쌍이 있다. 자비는 자애(慈)와 연민(悲)의 합성어이다. 자애는 ‘불쌍히 여기다’ 는 뜻을 갖는 범어에서 유래했으며, ‘생명을 사랑해 즐거움을 준다’는 뜻이 있다. 반 면에 ‘연민’은 ‘동정, 공감, 함께 슬퍼하다’는 뜻을 지닌 범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 명을 불쌍히 여겨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불교 수 행자는 연민(悲)을 통해 이웃의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불교적 행복에 도달할 수 있고, 자애(慈)를 통해 이웃에게 즐거움을 제공함으로써 불교적 행복에 이를 수도 있다.

문화적 진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자아는 자신의 삶에 대한 내러티브의 산물이며, 이런 점 에서 실체적 자아 개념은 환상이다.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환상적 존재인 자 아와 세계는 유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후대에 계승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 한가?

(meme)은 도킨스(Dawkins)가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문화적 유전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용어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유전자가 자가복제를 통해 생물학적 정보 를 전달하듯이, 밈은 모방을 통해 뇌에서 뇌로 생각과 신념을 전달한다. 밈의 구체적 예로는 곡조, 사상, 의복 양식, 단지 제조법, 아치 건설법 등이 있다. 유전자가 정자나 난자를 운반체로 해 몸에서 몸으로 자신을 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밈은 모방을 통해 뇌에서 뇌로 자신을 전파한다. 누군가 나의 뇌에 번식력이 강한 밈을 실어놓으 면. 그것은 나의 뇌에 기생하고 나의 뇌는 밈의 번식을 위한 운반체가 된다.

여기서 밈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언제든지 새로운 진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밈은 자신의 사본을 만들 조건이 형성되면 언제나 모방을 확장해 서 새로운 진화를 시작한다. 그동안 우리는 유전적 진화에 익숙해져왔으므로 그것만 이 진화라고 생각하고 그것 외에도 밈을 통한 문화적 진화도 있다는 점을 잊고 있다. 어떻게 밈이 자아를 형성하는가? 뇌 안에 수많은 신경세포가 있고 그것들 간 수많은 연결이 형성되어 있듯이, 자아에도 수많은 밈이 있고 그것들 간 연결이 있다. 그런 연결 중 일부는 자아를 형성하는 데 참여하고 또 다른 것들은 그렇지 못하게 되며, 그 결과 이질적인 밈들의 집단 간 긴장과 대립이 발생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아, 무상, 행복, 고통과 같은 불교의 중심 이념을 신경과학적으 로 이해하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불교 수행자가 모두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열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수행자가 모두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 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불교 수행자는 무아와 무상을 깨닫는 수행을 통해, 그리고 자 비를 구현하는 수행을 통해, 불교적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이영의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인지과학철학 전공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강원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와 한국인문치료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베이즈주의』(단독), 『몸과 인지』, 『입증』, 『인공지능의 존재론』, 『현대사회의 마음병과 치유』 (이상 공저) 등이 있고, 과학철학, 신경철 학, 철학 상담, 인문 치료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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