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11|무상한 사물들__홍창성

무상한 사물들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이번 호에서는 연기와 공(空) 그리고 무상의 진리를 외면하는 서양 철학의 실체론과 본질주의가 직면하는 난제(難題)의 예를 더 논의하고, 나아가 현대 서양 철학이 믿어 의심치 않고 받아들이는 몇 가지 철학적 주장이 알고 보면 무상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만들어놓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함을 보이겠다.

저 하늘 구름 한 점의 가장자리는 어디일까

붓다의 가르침을 접할 기회가 없던 사람도 변화무쌍한 구름을 보고 있자면 구름의 존재가 무상하다는 점을 쉽게 깨달을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사물이 본질(自性)을 가진 실체로서 실재(實在)한다고 믿어왔다. 구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영미권(英美圈)의 현대 철학자들은 저 하늘 구름 한 점의 경계를 어떻게 그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왔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과연 그런 경계선을 확정지을 수 있을까? 공기 중에 물방울이 어느 밀도 이상으로 모여 있어야 구름의 부분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한편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구름이 가진 물 분자의 밀도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구름의 가장자리 경계는 언제나 변할 수밖에 없다. 그 경계의 모양도 계속 변한다. 구름은 아무것도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말하자면, 무상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구름도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보는 서구의 사고방식으로는 구름이 어떤 본질을 가지고서 분명한 가장자리가 있는 실체여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그래서 서양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이 불가능한 철학의 난제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그렇지만 만물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이 공(空)하며 아무것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오직 현상 또는 환(幻)으로서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즉 무상하다고) 받아들이는 불교에서는 구름과 그 가장자리의 실재에 대해 헛된 집착을 갖지 않는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실재하지도 않는 구름의 분명한 가장자리가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런 서양 철학적 난제가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는다.

 

만물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이 공(空)하며 아무것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오직 현상 또는 환(幻)으로서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받아들이는 불교에서는 구름과 그 가장자리의 실재에 대해 헛된 집착을 갖지 않는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실재하지도 않는 구름의 분명한 가장자리가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본질주의와 실체론을 바탕으로 하는 서구의 상식에 의하면 위와 같은 종류의 난제는 이 세계 어디에나 있다. 대머리의 본질은 무엇일까? 예를 들어, 중년 남자의 머리칼이 어느 정도 빠져야 대머리가 될까? 반이 빠지는 50%일까? 아니면 반을 조금이라도 넘어야 하니까 50.1%? 아니면 50% + 한 올의 머리카락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할 수 없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안다. 우리가 서구적 사고방식대로 이런 사물들이 고정불변한 본질, 즉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믿는다면 이 질문들에 대해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서양 분석철학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를 난제 중의 난제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위의 난제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적용된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물을 자성이 없이 무상한 현상으로 보는 불교에서는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이런 문제들이 서양 철학에서는 풀 수 없는 난제다. 이것들은 모두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 또는 환(幻)에 불과하다. 불자들은 그것들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 처음부터 가능하지도 않다는 점을 알고 그런 분별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것들이 우리의 지적(知的)인 삶을 괴롭힐 난제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양식으로 자성과 실체의 실재에 대한 집착에 빠지게 되면 지적으로 고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수밖에 없다.

당신 무릎 위 고양이는 몇 마리인가

지금 당신의 무릎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서 따뜻한 햇볕을 즐기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상식적으로 여기 고양이가 한 마리밖에 없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영미권의 형이상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미국의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 같은 철학자는 지금 당신 무릎 위에는 실제로 한 마리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고양이가 앉아 있다고 논증한다. 그의 견해를 살펴보겠다.

이 고양이는 셀 수 없이 많은 털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특정한 하나의 털만 없는 고양이는 지금 이 고양이와 완전히 동일한 고양이가 아니다. 그래도 고양이는 고양이다. 그래서 지금 현재 당신의 무릎 위에는 원래의 고양이와 그 털 하나만 없는 고양이 두 마리가 앉아 있다. 그런데 그 털 말고 다른 털 하나만 없는 고양이도 당신 무릎 위에 앉아 있다. 그러면 벌써 세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세어가면, 이 고양이가 가진 털의 수만큼 많은 고양이가 당신 무릎 위에 앉는 셈이 된다. 데이비스 루이스는 이들 고양이 모두의 형이상학적 또는 존재론적 실재(實在)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1)

위의 논의를 더 밀고 나가면, 고양이의 수가 실은 그 털의 수보다 훨씬 많다. 귀가 한 쪽 없는 고양이, 눈이 한 쪽이 작은 고양이, 꼬리가 조금 짧거나 긴 고양이, 체중이 몇 그램 무겁거나 가벼운 고양이, (…) 그리고 이런 모든 경우의 조합 등을 고려하면, 당신 무릎 위에는 정말 무수히 많은 고양이가 있다. 이 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고양이 몸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털갈이 계절이 되면 털이 빠지고 새 털이 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도 참으로 많은 고양이가 새로 생겨난다. 고양이 몸에 일어나는 다른 변화에도 같은 이야기가 적용된다.

위대한 형이상학자라고 해도 데이비드 루이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정말 곤란하다. 나는 이런 견해가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실재론(realism)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 의하면 만물이 모두 독자적인 개체로서 나름대로의 자성을 가지고 실재하기 때문에, 당신 무릎 위에 한 마리로 보이는 고양이가 실제로는 조금씩이라도 다른 개체적 본질(individual essence)을 가진 무수히 많은 고양이로 실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반론으로 이 주장을 논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무릎 위 고양이 한 마리는 5킬로그램쯤이 나간다. 그런데 1,000마리의 고양이만 내 무릎 위에 앉아 있어도 그것은 5,000킬로그램쯤의 무게가 나갈 것이고, 그러면 내 다리는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무릎 위에는 5킬로그램쯤밖에 더해진 무게가 없다. 따라서 데이비드 루이스의 무수히 많은 고양이의 실재에 관한 철학적 논증은 옳지 않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고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자성이 없어 공하며 또 끊임없이 변화해 단지 무상한 현상(幻)의 흐름으로 본다.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 적도 없는 고양이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논증은 서구적 실재론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전제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실재론에 반대하는 불교에서는 위와 같은 난제(?)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다. 무상과 공을 받아들이며 원래 한 물건도 없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터득한 불교에서는 한 구름도 없고 한 고양이도 없다. 실재하지도 않는 구름과 고양이에 관한 숫자 놀음에 지칠 이유가 없다.

어느 유명 철학자의 본질주의와 실체론의 문제

20세기 후반의 천재라고 불리던 솔 크립키(Saul Kripke)는 그가 서른을 전후해 강의한 내용을 모은 책 『이름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으로 철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나는 이 책이 크게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서구 전통이 여전히 그의 주장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본질주의와 실체론을 믿어 의심치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견해는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불교와는 정반대되는 입장들이어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크립키는 한 개인을 그 개인이게끔 해주는 무엇이 있다는 우리의 (잘못된) 직관에 의거해 그의 형이상학적 주장을 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플라톤에게 배우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알렌산더대왕의 스승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었을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연적인 속성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리스토텔레스이게끔 해주는 필연적인 속성, 즉 그의 개체적 본질(individual essence)과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 모든 우연적 속성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를 그이게끔 해주는 본질을 가지고 동일한 실체로 존재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영혼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믿는 서구인에게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있지만,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면 그 주장이 무너지게 된다.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이 연기하기에 자성을 결여해 공하며

또 조건의 생멸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무상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떤 신체적 또는 심리적 속성도 무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의 본질이 되지 못한다는 점은 크립키도 인정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크립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잉태된 당시의 수정란이 그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기원(origin)으로서의 수정란은 결코 대체될 수 없는 그의 개체적 본질이고, 그는 결코 다른 수정란으로부터 기원했을 수는 없다고 한다. 언뜻 듣기에 설득력 있는 견해다. 그러나 이는 자연과학을 너무 소박하게 받아들인 데서 비롯된 독단적인 주장이다. 그 이유를 보기 위해 질문해보겠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정자가 난자의 세포벽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이 수정란이 생성되는 시기인가? 아니면 정자 세포의 핵이 난자 세포의 핵을 만나는 순간이 수정란이 생기는 시기인가? 두 세포의 핵이 어느 정도 융합되어야 수정란이라고 볼 수 있는가? 자궁벽에 착상하기 전에도 개체의 기원이 되는 수정란이라고 볼 수 있을까? 위에서 대머리의 예에서 보았듯이, 이런 것들은 우리가 정확히 선을 그어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현상이다. 수정란이 생성되는 시점을 정할 수 없으면 기원의 시점을 정할 수 없는데, 이렇게 시점이 불분명한 기원이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인적 본질이 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문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분석철학계에서 크립키 이후 개인의 개체적 본질을 논할 때 수정란 같은 기원을 거론한 적은 없다. 그 대신 지난 호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임, 플라톤임, 이순신임같이 코미디 영화의 대사에나 나올 법한 엉뚱한 속성(?)을 개체적 본질로 거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크립키는 모든 자연 종(natural kinds)에도 그것의 필연적인 속성, 즉 본질이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자연 종이란 물이나 소금, 나무, 동물, 바위, 원소들같이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종(kind)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크립키는 과학자들이 물(water)은 H2O의 분자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고, 이 H2O의 분자구조가 물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리 무색, 무취의 투명한 액체여서 현상적으로 우리의 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더라도 그것의 분자구조가 H2O가 아니라면 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물이 H2O임을 밝혀낸 이상, H2O가 아닌 어떤 액체도 물이 아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의 발견을 근거로 자연 종의 본질의 실재를 주장하는 크립키의 견해는 과학자들의 또 다른 발견에 의해 반박되어왔다. 물은 물이지만 수소 원자가 더 무거운 동위원소로 되어 있는 중수(重水, heavy water)는 ‘물=H2O’라는 등식에 위배된다. 물과 H2O가 필연적으로 동일하지 않고, 따라서 H2O임이 물의 본질이 될 수도 없다. 한편 물이 현재 H2O라는 분자구조를 가지고 있더라도 만약 양자 세계의 법칙에 다소 변화가 생긴다면 물이 H2N의 분자구조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물을 비롯해 어떤 화학물질의 미시 구조를 그것의 변치 않는, 즉 무상하지 않은 본질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한편 이 문제는 금(金)과 같은 원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크립키는 ‘금은 원자 번호 79인 원소이다’라는 명제를 우리에게 금의 변치 않는 본질을 보여주는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금에도 여러 동위원소가 있어서 그것의 원자 번호를 79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또 위에서 H2N의 예가 보여주듯이, 금과 관련해서도 양자 세계의 법칙들에 변화가 온다면 이 명제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이나 금처럼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물체뿐만 아니라 열(熱, heat)과 같이 단지 현상으로만 존재하는 자연 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논의가 가능하다. 크립키는 과학자들이 열은 근본적으로 분자운동이라는 진리를 발견했다면서, 분자운동이 열의 본질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열이라고 보는 현상은 훨씬 더 넓은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전자레인지에서 사용하는 마이크로웨이브도 열로 인정받고, 방사능(radiation)도 열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이들이 모두 열이라는 현상이 수행하는 모든 기능을 제대로 다 수행하기 때문이다 – 얼음을 녹이고, 종이를 태우며, 풀잎을 말리고, 이것이 너무 많으면 구조물을 파괴할 수 있고, 등등. 그래서 자연과학이 발달하게 됨에 따라 열이라는 현상의 외연(外延)이, 즉 ‘열’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는 대상이 분자운동 외에도 여럿 추가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추가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크립키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열에도 영원불변한 고정된 본질이 없다.

자연과학의 성과에 고무되어 과학자들이 발견한 내용을 그대로 사물의 고정불변한 본질이라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크립키의 주장은 20세기 후반 한동안 서양 철학계를 풍미했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성공에 기반한 그의 자연 종의 본질에 대한 믿음은 자연과학의 계속적인 변화와 발전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어왔다.

지적(知的)인 고뇌도 고(苦)이다

서구의 상식으로는 사물이 고정불변한 본질을 지니고 실체로서 실재한다. 그래서 사물은 무상하지 않다. 그러나 지난 호와 이번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 삼라만상이 연기하기에 자성을 결여해 공하며 또 조건의 생멸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무상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불교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는다. 잘못된 전제로부터 비롯된 철학적 난제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힘들어했을까.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된 지적 고뇌도 고(苦)이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저술한 단행본 『(가제)불교철학강의』가 출판 예정이고, Buddhism for Thinkers와 유선경 교수와의 공저 『불교와 생명과학』을 집필 중이다.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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