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우주(宇宙)란 무엇일까? – ④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로서의 우주__이수미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로서의 우주

이수미

동국대학교 HK연구교수

 

 

 

불교 교리의 백과사전적 해설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는 우주의 모 습을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속한 세계는 원통 모양의 대기 층 위에 다시 물의 층과 황금의 층이 있고 그 위에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쪽 각각에 대륙이 하나씩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수미산을 중심 으로 한 이러한 우주에 관한 묘사는 근대 자연과학에서 설명하는 우주의 모습과는 그다지 연결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보통 이러한 우주론은 고대 인도의 세계관 이 불교에 유입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불교 고유의 우주관이라기보다는 고대 인도인의 상상력의 산물인 신화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받아들여진다. 이런 점에 서, 자연에 대해 현재 우리와는 상이한 관점을 가지고 다른 개념 틀을 사용했던 고대 인도인의 우주론을 지금 우리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우주론에 깃들어 있는 불교의 세계관, 나아가 이 세계에 거주하는 유정(有情)들의 존재에 관한 깊은 의미들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고대 인도인의 우주에 대한설명은 단지 저편에 존재하는 우주 공간의 구조에 대한 단순한 기술적 묘사가 아니 라 불교의 종교적 세계관 및 유정들의 존재론적 양상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 혹은 세계의 구조를 여기에 거주하는 유정과 함께 좀 더 자 세히 살펴보자.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는 이 세계에는 육취(六趣) 혹은 육도(六道)라고 불리는 여섯 부류의 유정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 여섯 부류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天)을 말한다.

육취 가운데 인간의 영역은 앞서 말한 우주의 구조에서 수미산 주위에 위치한 네 대륙, 즉 사대주(四大洲)에 해당하는데, 우리가 사는 곳은 남쪽에 위치한 섬부주(贍部洲) 이다. 섬부주는 삼각형 모양의 대륙으로서 이는 바로 고대 인도인들이 자신들의 국 토인 인도를 염두에 두고 설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옥은 전생에 악업을 행한 자들이 이로 인한 고통의 과보를 받는 곳으로서, 섬부 주 아래 지하에 팔열지옥(八熱地獄)과 팔한지옥(八寒地獄)과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방 대하게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지표에는 항상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는 아귀와 약 육강식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는 축생, 그리고 분쟁을 일삼는 아수라가 존재한다. 아귀의 영역은 인간의 영역과 겹치지만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한다. 지옥이 나 아귀와 수라의 유정들은 모두 인간계의 유정들에 비해 더 큰 고통 속에 사는 존 재들이다.

(天)들은 수미산의 중턱 및 정상, 그리고 그 상층에 머물고 있다. 수미산의 모습 은 경전마다 다르게 언급되는데, 어떤 곳에서는 일반적인 산의 모양이지만 정상만 평면의 정사각형이라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직육면체라고 하며, 다른 곳에서는 모 래시계 모양으로 허리가 잘록한 모습이라고 하기도 한다. 수미산의 중턱에는 가장 하급의 천신인 사천왕(四天王)이 거주하고, 수미산의 산정에는 도리천( 利天)의 천신, 즉 삼십삼천(三十三天)이 거주한다고 한다. 사천왕천과 도리천은 수미산에 걸쳐 있기 때문에 지거천(地居天)이라고 하는 한편, 이 상부에 차례로 위치하고 있는 네 가지 천 인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은 공중에 머물고 있으므로 공거천(空居天)이라고 한다. 이 위층에도 천들이 있지만 이들은 지금 까지의 여섯 부류의 천들과는 다른 존재론적 양상을 지니는 유정들이다. 불교의 우 주는 유정들의 존재 방식에 따라서 다시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는 세 영역, 즉 삼계(三界)로도 나누어질 수 있는데, 지금까지 설명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과 여섯 가지 천들은 모두 삼계 가운데 욕계에 속하는 부류들이다.

욕계는 거친 물질로 이루어진 신체를 가지고 식욕, 색욕과 같은 본능적 욕망이 강 하게 지배하는 마음을 지닌 유정들의 영역이다. 따라서 욕계의 천들은 비록 천신이 라 할지라도 모두 신체를 가지고 욕망을 지니는 존재들이다. 이에 비해, 색계의 유정 들은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신체를 가지지만 욕망에 지배되지 않는 마음을 지니 고 있다. 색계의 천들의 몸은 정미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공중에 떠다니 는 존재들이다. 색계의 천들은 그 마음 상태가 선정 상태와 같은데, 그 상태에 따라 초선천(初禪天), 이선천(二禪天), 삼선천(三禪天), 사선천(四禪天)이라는 네 영역으로 나뉘 어진다. 무색계는 물질이 없이 단지 마음만으로 존재하는 유정들의 세계이다. 무색 계의 천들 또한 이들의 마음 상태에 따라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 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는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이 삼계와 육취로 설명되는 불교의 세계는 모두 윤회하는 유정들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 속하는 유정들은 모두 삼계 혹은 육취를 전전하면서 윤회에 얽매여 있다. 이 러한 윤회의 과정에서 유정이 다음 생에 태어날 곳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 전 생에 지은 업이다. 탐(貪), 진(瞋), 치(痴)와 같은 불선(不善)의 마음과 이를 바탕으로 한 악업(惡業)은 유정으로 하여금 고통으로 가득 찬 지옥이나 아귀, 혹은 축생, 혹은 아 수라의 영역에 태어나도록 하고,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痴)와 같은 선(善)의 마 음과 그로 인한 선업(善業)은 유정을 상대적으로 안락한 영역인 인간이나 천계에 태 어나도록 한다.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인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인간이나 천계에 태어나 즐거움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그 즐 거움이 결코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불교의 천은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절대신과는 달리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윤회를 겪고 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비록 시간의 기준은 다를지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나이를 먹 고 죽음을 겪는다. 이들을 천계에 태어나게 한 선업의 과보가 다할 때 죽음을 맞이하 고 다시 육취 가운데 한 부류로 태어나 윤회를 계속한다. 다시 말해 선업을 쌓아 천 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윤회의 고리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또다시 지옥이나 축생계에 태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겨날 수 있다. 선업을 지어 천계에 태어나더라 도 이것이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궁극적으로 보았을 때 선업을 짓 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가? 단지 인간이나 천계에 태어나기 위해 선업을 행한 다고 한다면 인간이나 천계에서 영원한 안락을 보장받지 못하는 이상 이 선업 또한 효용성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이라고 할지라도 여기서 얻는 즐거움의 과보가 불완전한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은 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불교에서는 고통의 결과를 초래하는 불선업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초래하 는 선업 또한 종국에는 생사의 윤회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관점에서 는 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생사의 고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고리 안에 얽매이는 과보를 초래하는 업들은 그것이 선이든 불선이든 결국은 모두 극복되어야 할 것들로 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선업(善業)이 ‘선(善)’인 것은 인간이나 천계에서 의 안락한 삶을 얻게 하기 때문이라는 보다 직접적인 이유에 있지 않다. 오히려 선업 은 유정으로 하여금 인간계나 천계의 안락한 환경에 태어나게 함으로써 윤회를 벗 어날 수 있는 진정한 수행을 실천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는 다소 간 접적인 이유에 의해 선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고통으로 가득 찬 지옥이나 축생, 아귀의 세계에서 윤회를 벗어날 불도 수행의 기회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 다. 끊임없는 고통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불도 수행에 임할 여유를 찾을 수 없다. 오직 인간이나 천으로 태어날 때 이러한 기회는 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는 단지 저편에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 개념이 아니다.

우주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이다. 우리의 존재가 반영된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불교의 방대하고 체계적인 우주론을 통해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와 마음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삼계에서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불도의 수행은 어떠한 것인가? 초기 불교의 경우에 있어서는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이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출세간선법(出世間善法)으로 제시되고 있고, 대승의 전통에 속하는 『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에는 오계 (五戒)와 십선(十善) 등은 세간의 낙과(樂果)를 얻게 하는 세간선(世間善)으로, 그리고 사 성제(四聖諦)로부터 얻는 지혜나 삼삼매(三三昧)는 세간을 벗어나게 하는 출세간선(出世間善)으로 설해져 있다.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이러한 수행법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마음의 수행, 즉 선정 수행을 필수 요소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시 말해 윤회의 순환에 얽매여 있는 삼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삼계라는 불교의 세계 구조도 또한 바로 이러한 마음의 집중 상태, 즉 선정 상태를 기준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삼계의 분류는 각각의 영역에 속하는 유정들의 존재론적 상태에 따라 나뉜 것인데, 유정들의 존재론적 상 태란 이들이 전생에 지은 업 내지는 수행의 결과로 인해 도달한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욕계에 속하는 유정들, 즉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욕계 의 천들은 모두 산란한 마음, 즉 산심(散心)을 가지고 있다. 선정의 집중된 마음을 지 니지 못하고 흩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가운 사실은 욕계 중에서 도 인간이나 천의 경우는 노력에 의해서 마음을 집중시키고 선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이나 천이 윤회를 벗어날 수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 을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들은 노력에 의해서 윤회를 벗어나는 수행인 선정을 닦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초기 경전에는 수행에 의해 색계의 제4선정에 이른 수행자가 색계의 제4천의 천신이 가지는 미세한 몸을 만들어내고 이 몸으로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선정 수행에 의해 몸은 욕계에 속해 있지만 마음은 색계 혹은 무색계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욕계가 산란한 마음을 지닌 유정들의 영역인 것에 비해, 색계 또는 무색계의 천들은 본래 집중된 선정의 마음, 즉 정심(定心)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선정의 상태 에 상응하는 마음을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욕계에 속하는 유정이 현생 에서 수행을 통해 색계나 무색계의 선정을 닦고 성취하면 그 유정은 내생에 해당 선 정의 영역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삼계의 구도는 이에 속하는 유정들의 마음 상태에 따른 것이고, 색계와 무색계는 각각 선정의 구분에 따라 네 영역으로 나누어 지므로 산지인 욕계와 함께 전체는 흔히 삼계구지(三界九地)라고 일컬어진다.

윤회하는 삼계에 대한 우주론과 유정의 구분이 이러한 것이라면, 출세간선의 수 행을 닦아 삼계의 윤회를 벗어나고 난 이후의 세계는 혹은 유정의 존재는 어떻게 되 는 것일까? 삼계를 벗어나 또 다른 영역이 존재하는 것인가?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 하고 나면 이 우주로부터 그 유정의 존재는 사라지는 것인가? 이에 대한 초기 불교 와 대승불교의 설명은 차이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초기 불교에서 수행의 최종 목 표는 삼계의 윤회를 벗어나서 아라한의 지위를 얻는 것이다. 또한 이 아라한과를 얻 는 동시에 이 아라한은 열반에 들어가 삼계와의 연관성을 단절한다. 이에 비해 부처 의 지위를 얻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삼계에서의 윤회를 벗어난 것이 바로 불과를 성취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승 경전에는 삼계에서의 윤회 를 벗어난 존재들이 아라한(阿羅漢)과 벽지불(僻支佛), 대력보살(大力菩薩)이라는 세 부류 의 성인들로 제시되어 있다. 다시 말해 삼계에서의 윤회를 벗어났다 하더라도 아직 완전한 부처의 지위에는 이르지 못한 단계에 이들 성인들이 속하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삼계 안에서의 윤회에 얽매인 유정들이 겪는 것과 같은 생사를 겪지는 않지만, 윤회를 벗어난 상태에서 특별한 형태의 생과 사를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계의 유정들은 반복적으로 생을 거치는 가운데 끊어져 일어나는 죽음, 즉 ‘분단사(分斷死)’ 를 겪는다. 하지만 윤회를 벗어난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들은 소위 최후의 생을 살고 있는 존재들로서 이들의 죽음이란 불가사의변역사(不可思議變易死)라고 불려진다. 이들의 죽음이 불가사의변역사라고 불리는 이유는 아마도 비록 윤회를 벗어났으므 로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지만, 가령 대력보살의 경우 보살행 등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변역’할 필요가 있을 때 소위 죽음이라는 현상을 스스로 겪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는 단지 저편에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 개념이 아니다. 이 우 주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이다. 우리의 존재가 반영된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불교의 방대하고 체계적인 우주론을 통해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와 마음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수미 서울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철학과에서 불교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UIUC와 UCLA에서 불 교학으로 각각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구 논문으로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manomaya-kāya)의 의미」, 「공유논쟁(空有論爭)을 통해 본 원효(元曉)의 기신론관(起信論觀) 재고」, 「『大乘起信論』의 알라야식에 대한 大賢의 이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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