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10 연기와 무상__홍창성

연기와 무상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석가모니는 무상(無常)이 연기(緣起)로부터 비롯된다고, 즉 만물이 연기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해 무상하다고 가르쳤다. 모든 것이 수많은 조건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성·지속·소멸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이 연기법이다. 그 여러 조건 가운데 언제나 어느 하나라도 더해지거나 빠지게 마련이어서, 어떤 사물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런데 조건 하나하나도 그것을 모이고 흩어지게 하는 그것 나름대로의 조건들이 변하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삼라만상(森羅萬象) 가운데 그 어느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연기에 대한 통찰은 우리를 만물이 무상하다는 진리로 이끌어준다.

연기의 진리로부터 이치를 짚어가며 무상의 가르침에 접근하는 것은 물론 좋은 공부이지만, 나는 이런 논리적 추론과는 별도로 무상의 진리가 직관적으로 거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똑같은 강에 두 번 이상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드라마틱한 질문으로 우리에게 만물이 끊임없이 유전(流轉)한다는 통찰을 심어주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게 마련이고, 같은 지점에 다른 물이 흐르고 있는 강은 같은 강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이상 들어갈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이 우주 모든 것의 생성·변화의 원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fire)이 비유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불교에서 무상에 대한 가르침은, 다른 대부분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통찰로서 시작되었다.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삶에 있어서 변치 않고 고정불변한 것이 있을까? 누구나 기억하겠지만, 젊은 날 우리는 건강과 활력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자신도 머지않아 늙어 몸이 쇠하고 병들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미리 깨닫기는 어렵다. 죽음도 다른 사람의 일이지 자신에게도 닥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실감할 기회는 거의 없다. 그래서 어찌 보면, 감수성이 예민했던 젊은 싯다르타 태자가 늙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처음 목격하고는 그 충격으로 출가를 결심하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태자가 깨달아 성도(成道)하게 된 진리는 연기법(緣起法)이지만, 그의 출가와 수행에 대한 동기를 부여한 것은 삶의 무상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제 우리의 소박한 일상을 이야기해보자. 우리가 매일 접하는 물건들 가운데 무상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도 없다. 모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고 없어지고 망가지고 또 질이 떨어져서 바꾸어야 할 것들뿐이다. 치약, 칫솔, 수건, 옷, 밥상, 음식, 자동차, 책상, 의자, 컴퓨터, 집 등, 모두 변치 않고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으면 좋겠지만,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없다. 그러면 영원하다고 선전하는 보석이나 귀금속은 어떤가? 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도 사용하면 흠이 생기고 또 아주 조금씩이라도 마모되어간다.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이라는 금강석도 그 안에서 탄소 원자들이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고, 또 아주 조금이라도 공기 중으로 튕겨 나가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금강석도 불에 타며, 망치로 부술 수도 있다.

물질로 된 것의 무상함은 그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분명하다. 물리세계를 가장 궁극적 차원에서 연구하는 물리학은 쿼크와 전자를 포함해 존재하는 어떤 입자도 영원히 고정불변할 수는 없다고, 즉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입자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은 변화하고 붕괴한다. 그래서 입자로 이루어진 이 우주의 어떤 물체도 불변할 수 없고 무상할 뿐이다. 한편 조금 다른 각도에서의 이야기지만, 우주 공간으로부터 날아온 무수히 많은 소립자가 지금 이 순간도 모든 물체를 끊임없이 관통하고 있다. 즉 모든 물체에 언제나 이 입자들이 지나가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또 이 우주 전체에 있는 아무리 작은 물체들도 만유인력에 의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아주 조금씩이라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물체는 없다. 모든 물체는 무상하다.

우리 심리 세계의 무상함은 물질세계의 무상함보다 직관적으로 더 쉽고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가졌던 생각이나 심리 상태 가운데 나이가 들어도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어릴 적 크게만 보였던 앞마당의 나무가 성인이 된 후에는 만만한 크기의 아담한 나무로 보이곤 한다. 키가 커지고 시력이 달라지며 또 다른 배경지식을 가지게 되면 모든 시각 경험을 달리 해석하게 된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예를 들어 가족과 지역사회, 그리고 나아가 나라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호오(好惡)도 그때그때 쉼 없이 변한다. 영원히 뜨거울 것만 같던 젊은 날의 사랑이 변치 않고 지속되기란 영화나 소설 밖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우리는 결국 경험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는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리 세계의 무상함은 근본적으로 우리 심리 상태의 내용을 결정하는 여러 관점과 가치관이 계속 변하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간 절이나 교회로부터 삶과 세계를 보는 눈이 새로 생기거나 바뀌기 시작한다. 학교를 다니며 배우는 다양한 정치 사회 이론에 따라 사회현상과 정치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도 거듭해서 바뀐다. 이렇게 변하는 종교관과 가치관이 우리 생각과 정서의 내용을 많이 좌우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일상에서 친지들과 나눈 대화, 저녁 뉴스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 어젯밤 읽은 소설책의 내용, 그리고 오늘 본 영화가 준 감동 등에 의해서도 우리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생각과 태도, 그리고 감정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믿음 체계의 특성상 단 하나의 믿음만 변해도 전체 믿음 체계의 내용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그 내용을 변화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트럼프 대통령은 무례하기는 하지만 정직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가 지금까지 거액을 탈세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고 하자. 이러한 새 정보 내용이 내 믿음 체계에 들어오게 되면, 내가 지금까지 트럼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련된 수많은 믿음이 모두 흔들리고 변화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미국의 정치 구조와 풍토에 대해서도 여러 믿음이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도 대통령에 선출될 수 있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회의까지 생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믿음 하나에라도 변화가 생기면 그것은 믿음 체계 전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의 내용은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매일매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 믿음 체계에서 변화하지 않고 남아 있는 심리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심리 상태는 무상하다.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의 내용은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매일매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 믿음 체계에서 변화하지 않고 남아 있는 심리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심리 상태는 무상하다.

 

실체론의 오류

무상의 진리는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의 하나이지만 일반 대중의 상식이나 서양의 주류 철학 이론과는 많이 다르다. 사람들은 물체가 여러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오랜 시간 동안 그 동일성을 확보하며 존재한다고, 즉 무상하지 않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뜰 앞에 커다란 잣나무는 수십 년 전에는 어린아이 크기의 작은 묘목이었지만 지금은 어른 키의 몇 배나 되는 큰 나무로 컸다. 이 나무는 수십 년 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 그 모양과 크기도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여전히 같은 나무라고 생각한다. 또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나무로 된 책상은 이십여 년 전 새 책상일 때에 비해 군데군데 흠이 생기고 모서리에 작은 쪽이 여럿 떨어져 나갔으며 또 햇빛에 노출된 탓에 색깔도 바랬다. 다리 하나가 부러져 다른 나무로 교체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책상이 여전히 같은 책상이라고, 그래서 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교체되고 또 질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동일한 물체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에서는 17세기까지도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어떤 물체가 물리적 화학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물체로 존속하는 이유가 이런 물리적 화학적 속성들을 유지하는 기반으로서의 어떤 실체(substance 또는 substratum)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가 그 대표적 철학자였다. 한 대상의 속성들은 오고 가며 변하지만 그것들을 밑에서 지탱해주며 한곳에 모아놓는 실체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에 논의한 대로,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런 실체란 경험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는 ‘불가사의한 괴물’ 같은 것으로서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그 결과로 흄 이후 서양 철학에서 실체의 존재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철학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대상의 무상함을 반박할 존재적 근거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의 불변하는 지속적 존재에 대한 서양인들의 집착(?)은 불자(佛子)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될 여러 철학적 난제를 만들어냈다. 20세기 후반부터 활발히 논의된 난제 하나를 소개하겠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가 다시 태어나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그의 고향 항구를 떠나 20여 년 동안 항해 끝에 다시 돌아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 오랜 항해 동안 배의 나무 널빤지들이 하나씩 망가져서 그때마다 알루미늄으로 된 널빤지로 교체해왔다. 교체된 나무 널빤지들은 모두 따로 모아놓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20년 후 원래의 항구로 돌아왔을 때 이 배는 모든 부분이 완전히 알루미늄 널빤지로 바뀌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항구 마을 사람들이 이 알루미늄 배에 모아놓았던 나무 널빤지들을 모두 조립해 다시 나무로 된 원래 모양과 재질 그대로의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워놓았다. 그렇다면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배와 나무로 만들어진 배 가운데 어느 것이 테세우스의 배인가?

예를들어, 이 두 배가 바다에서 침몰한다면 선장인 테세우스는 어느 배에 올라 함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야 할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원래 배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으니까 나무 널빤지로 다시 조립된 쪽이 테세우스의 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꽤 있다. 그러나 어떤 대상의 정체성(identity)은 그 물질적 구성 요소가 아니라 그것이 가진 인과적 및 역사적 연결 고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철학자들은 테세우스가 20년 동안 항해한 역사를 간직한 알루미늄으로 된 배가 테세우스의 배라고 본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서양 철학계에서 논의되어온 이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분명한 해결책이 없는 철학의 난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의 본성(自性)을 가지고 실체(實體)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無常)고 가르치는 불교에서는 이런 문제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리는 대상을 테세우스의 배로 만들어주는 자성(自性)은 원래 존재하지도 않고, 또 이렇게 공(空)한 테세우스의 배가 실체로서 실재(實在)한 적도 없는데, 알루미늄 널빤지로 된 배와 나무 널빤지로 된 배 가운데 어느 쪽이 테세우스의 배냐고 질문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불자들은 묻지 않는 질문이다.

위와 같은 서양 철학의 난제는 사물이 본질(自性)을 가지고 실체로서 실재한다고 믿으며 그것이 동일한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비롯된다. 이 문제는 우리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겪는 물리적 화학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같은 대상으로 남아 있다고 믿는 다른 모든 존재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대상에 대해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성과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며 모든 것이 단지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幻)으로만 존재한다고 가르치는 불교에서는 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테세우스의 배는 단지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허구(fiction)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이 직면하고 있는 위와 같은 난제는 우리와 같이 의식을 가진 유정물(有情物)이 온갖 변화를 겪으면서도 동일한 유정물로 남아 있다고 보는 서양식 사고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이와 관련한 불교적 해결법은 다음에 부처님의 무아(無我)에 대한 가르침을 소개하며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모든 법칙은 배경 이론 및 실험과 관찰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이와 같이 법칙은 관계로서의 연기에 의존하고, 또 연기하는 것은 무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학과 자연과학의 법칙들도 모두 무상(無常)하다.

 

본질주의의 오류

논리학에는 ‘모든 것은 그 스스로와 동일하다’는 자기동일성의 법칙이 있다. 이 법칙은 마치 ‘모든 것이 무상하지 않고 동일한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라는 것이 진리라는 듯이 읽힌다. 전통적으로 논리학은 이 법칙과 다른 몇 개의 법칙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논리학에서 필요불가결한 이 법칙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는 논리학이 ‘모든 것은 그 스스로와 동일하다’라는 문장을 법칙으로 받아들이고서 형성된 것이라면, 이 논리학의 체계가 그것을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보는 주장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fallacy of begging the question)를 범한다. 이것이 첫 번째 오류다. 그것을 옳은 법칙으로 가정하고서 논리학의 체계를 도출했는데, 논리학의 체계가 그 법칙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 법칙이 옳다는 주장은 분명 순환 논리에 빠지게 되어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 문제되는 법칙이 옳다는 점을 독자적으로 먼저 해결해야 (선결해야) 이치에 맞는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오류는, 이 법칙이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제거하고 만든 추상적인 논리 언어의 세계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법칙이라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만약 시간의 경과를 포함해야만 세계에 대한 진정한 논리학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헤겔과 같은) 철학자가 있고, 또 그가 만물이 한순간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믿는다면, ‘모든 것은 그 스스로와 다른 것으로 된다(즉 무상하다)’를 그의 논리학의 기본 법칙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 현재 영미권(英美圈)의 주류 기호논리학이 받아들이는 법칙이라고 해서 그것만을 수용 가능한 논리학의 법칙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양 철학자들 가운데는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상을 동일한 대상으로 머무르게 하는 그것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보는 본질주의자들이 여전히 많다. 이들은, 예를 들어, 내 앞의 책상을 이 책상이게끔 해주는 어떤 개체적 본질(individual essence)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들 철학자들은 대답이 금방 궁해지고 만다. 한 모서리가 망가져 모양이 달라지더라도 이 책상은 여전히 같은 책상이니까 그것의 모양이 개체적 본질일 수 없다. 색깔을 달리 칠해도 같은 책상이니까 색깔도 그런 본질이 아니다. 흠이 생겨도, 무게가 달라져도, 다리 하나를 교체해도… 이 책상은 여전히 같은 책상이다. 그래서 이들 가운데 어떤 속성이나 부분도 이 책상의 개체적 본질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생기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책상의 동일성을 확보해주는 본질이란 무엇인가? 본질주의자들이 최근에 내놓은 답변은 ‘이것임(thisness)’이라는 개체적 본질이다. 내 앞의 책상을 ‘이것’이라고 가리키면서 ‘이것을 이것이게끔 해주는 개체적 본질은 바로 이것임’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참으로 궁색한 답변이다. 무상의 진리를 거부하며 대상의 자기동일성에 집착하다가 내놓은 철학적 답변이 겨우 이렇다. 본질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이순신을 시간이 흘러도 같은 이순신이게끔 하는 개체적 본질이 이순신임이고, 세종대왕은 세종대왕임, 트럼프는 트럼프임이라고 한다. 이 세상 모든 존재자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답변한다. 무슨 코미디 영화의 대사처럼 들린다. 만물이 무상함을 애써 외면하며 존재하지도 않는 개체적 본질에 집착하다가 억지로 내놓은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까지 개체가 고정불변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아 무상하다는 점을 논의했다. 이제 내가 전에 논의한 수학과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법칙들과 그 법칙들의 내용이 되는 보편적 속성들 사이의 관계도 무상하다는 점을 잠깐 언급하겠다. 수학과 자연과학의 모든 법칙은 그 스스로 절대 불변하는 본질적 속성을 드러내주는 진리가 아니고, 모두 주어진 배경 이론 또는 패러다임에 의존해서만 참으로 간주될 뿐이다. 배경 이론이 바뀜에 따라, 또는 한 배경 이론 안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론의 수정 작업이 벌어진다면, 주어진 법칙은 달리 해석되고 그 참 거짓도 달리 결정될 것이다. 최근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후 물리학에서 절대 불변의 상수라고 여겨져온 빛의 속도조차 우주 생성 초기에는 지금보다 더 빨랐을 것이라는 가설이 주목받고 있으며, 이 가설을 검증할 관측이 진행되고 있다. 모든 법칙은 배경 이론 및 실험과 관찰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이와 같이 법칙은 관계로서의 연기에 의존하고, 또 연기하는 것은 무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학과 자연과학의 법칙들도 모두 무상(無常)하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저술한 단행본 『(가제)불교철학강의』가 출판 예정이고, Buddhism for Thinkers와 유선경 교수와의 공저 『불교와 생명과학』을 집필 중이다.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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