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담 대선사 법문

‘나도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믿으라

 

 

타파경례무영적(打破鏡來無影跡)         거울을 부수어 그림자와 자취 없어지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중생은 사람마다 각자 자신의 거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울에는 무량겁 이래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했던 모든 업의 그림자가 비칩니다. 사후(死後)에 염라대왕 앞의 업경대(業鏡臺)라는 큰 거울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업경대 앞에 서면 자신이 생전(生前)에 지은 모든 업이 하나도 빠짐없이 숨김없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어찌 이것이 가능한가? 모든 이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귀신 둘이 따라붙는데 하나는 선신(善神), 다른 하나는 악신(惡神)으로 그들은 그 사람의 선악(善惡)을 감시해 그 내용을 기록해 염라대왕 앞에 소상히 보고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캄캄한 밤에 지은 죄라 할지라도 업경대 앞에 서면 숨김없이 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철대오(廓撤大悟)해 이 업의 거울을 부수면 그동안의 그림자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입니다.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 꽃이 화창하게 핀 가지에서 한 새가 운다는 것입니다. 참선해서 자성(自性)을 깨달으면 염라대왕 앞에 가도 두려울 것이 없고 무량겁 생사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임종할 때에 부처님이 직접 나오시어 맞이해도 좋아할 것도 없고 지옥에서 자기를 붙잡아가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이 생사 없는 도리를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는가? 바로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활구(活句)참선이 있으면 죽을 사(死) 자의 사구(死句)참선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우리는 올바르게 참선할 수 있고 올바르게 참선해야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참선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인들까지 이 참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데 이것은 서양인들이 과학 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편리가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참선을 바르게 하려면 ‘나도 본래 부처다’라는 사실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고 죄 많은 중생이 부처냐’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쓸데없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반드시 ‘나도 부처’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올바른 스승을 만나 열심히 정진하면 확철대오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바른 스승 없이는 참선 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참선은 책을 통해 사량(思量)하고 분별(分別)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스승을 만나 직접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도 “이 공부를 할진데, 급히 스승을 찾아라. 그렇지 않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철저한 신심을 가지고 바른 스승 만나길 원하면 스승은 도처에 있습니다. 철저한 신심을 가지고 바른 스승을 만난다면 반드시 올바르게 공부할 수 있고, 바른 길을 알았으면 열심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행동할 때나 가만히 머물러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말할 때나 안 할 때나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화두를 참구(參究)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이미 화두를 받아서 열심히 정진하신 분도 계실 테지만 화두를 참구하는데 있어 문헌에 오른 것만 1,700개 공안(公案)이 있는데 여기서 ‘이 뭣고’는 최초의 화두요, 제일 근원이 되는 화두인 것입니다.

‘이 뭣고’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경상도 사투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것이 무엇이냐?’에서 이것은 지칭 대명사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님도 가지고 계시고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일체 온 우주 세계에 가득 차 있고 우주 삼라만상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것이 다 그것의 나타남입니다. 또한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한 생각 착하게 쓰면 불보살, 천사와 같고, 반대로 한 생각 비틀어지면 찰나 간에 악마나 나찰 귀신이 되기도 하는 그 한 물건을 말합니다. 성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자비로울 줄도 알고 악할 줄도 아는 그 마음자리, 그렇다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고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이 한 물건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놈에게서 모든 작용이 다 나오기 때문에 모든 작용을 거슬러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 돌이킴이 바로 ‘이 뭣고’입니다. 성이 날 때도 편히 성낼 줄 아는 이는 무엇이나 ‘이 뭣고’. 걸어갈 때도 ‘이 뭣고’.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경계를 여의고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경계를 보고, 듣고, 말할 때 이를 여의거나 떠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즉(卽)’해서 ‘이 뭣고’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한마디에서 『금강경』이 나왔고, 『법화경』도 바로 이 한마디에서 설해진 것입니다.

‘이 뭣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고 알려고 해도 알 수 없고, 찾아보면 그 자체가 없건만 행주좌와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것입니다. 이것을 여의고는 『금강경』도, 『법화경』도 없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역대 조사도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천하에 맛없고 간단한 한마디이지만 이 한마디를 일체처 일체시에 돌이켜 단속해나가면 모든 죄업이 거기서 소멸되고 일체 원수가 거기서 풀어지고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도 바로 거기서 다 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여래의 경계에 뛰어들어가는 법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은 송담 대선사의 1985년 11월 용화선원 일요 법회 법문을 편집부에서 녹취,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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