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업(業)이란 무엇인가 ① 업이란 무엇인가__일묵 스님

업이란 무엇인가

 

일묵 스님

제따와나선원 원장

 

부처님께서는 ‘의도’를 업(業, kamma)이라고 말씀하셨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꿰 뚫는 경」에 보면 “나는 의도를 업이라고 말한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라 고 나온다. 몸으로 행위를 할 때, 말을 할 때, 생각 등 마음을 일으킬 때 어떤 ‘의도’가 함께하는데, 이때의 ‘의도’가 업이다. 정확히 말하면 업은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를 할 때 일어나는 선한 마음이나 불선한 마음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선(善)한 마음은 괴로움의 소멸(행복)로 인도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괴 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이루는 데 유익한 마음을 말한다. 반대로 불선(不善)한 마음은 괴로움을 증장시키고, 진정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는 데 해로운 마음을 말한다. 그래 서 선한 마음은 이익과 행복을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유익한 마음이라고도 하고, 불 선한 마음은 괴로움과 고통을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해로운 마음이라고도 한다. 이렇 게 선한 마음이나 불선한 마음은 다른 마음에 비해서 힘이 강하다. 어떤 대상을 아무 생각 없이 한 번 쳐다보는 것은 강한 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상을 보고 좋다.

거나 싫다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그것에 대해 집착하면 그 마음의 힘은 아주 강력하 다. 이런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진 후에도 특정한 결과를 산출할 가능성이 있다. 이때 업을 조건으로 나타난 결과를 ‘과보’라 한다. 선업은 행복한 과보를, 불선법은 괴로 운 과보를 가져온다.

이렇듯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특정한 행동이나 말 그 자체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 는 의도이다. 즉 행위들을 어떤 의도로 했느냐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달라진 다. 타인에게 부드럽고 듣기 좋은 말을 한다 해도 속이거나 기만하려는 의도로 행한 것이라면, 그런 말은 불선업이며 후에 괴로움을 가져올 것이다. 반대로 스승이 제자 에게 매정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해도, 그때의 의도가 제자를 경책해 그의 잘못된 행 위를 멈추게 하기 위함이라면, 그런 말은 선업이며 후에 괴로움의 소멸, 행복으로 인 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를 하든 그 의도를 선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 시나 수행 등 명백한 선업으로 보이는 행위도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권세를 얻어 나 쁜 짓을 하려는 의도로 행했다면, 이런 행위는 많은 괴로움을 가져올 것이다. 반대로 청소나 요리 등의 일상적인 행위도, 나와 타인이 청결한 환경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지내도록 하겠다는 강한 의도를 가지고 행한다면, 이런 행위는 큰 행복을 가져올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어떤 것이 선한 마음이고 어떤 것이 불선한 마음인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법의 특성상, 불선업은 행하기 쉽지만, 선업은 노력하지 않으면 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 불선을 분별해 알지 못하면 부지불식간에 불선업은 계속 짓고 선업은 어쩌다가 한 번씩 짓게 되기 쉽다. 이렇게 되면 가면 갈수록 괴로움이 커지는데, 실제로 많은 사람의 삶이 이러하다. 그래서 선과 불선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지혜이며, 이것이 바로 불교 수행인 팔정도의 시작과 끝인 ‘바른 견해’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으로 고통받는 중생들을 연민하시어, 무엇이 행복을 가져 오는 선업이고 무엇이 괴로움으로 가져오는 불선업인지 가르쳐주셨다. 그러므로 부 처님의 법을 배우고 익히면, 무엇이 선업이고 무엇이 불선업인지 알게 되어, 불선업을 버리고 선업을 행해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 바르게 노력할 수 있다.

그러면 선업은 무엇일까. 탐욕 없고 성냄 없고 어리석음 없는 마음이 선업의 뿌리 이다. 그리고 남을 괴롭히지 않고, 남의 것을 가지지 않고, 성행위를 깨끗하게 하고, 진실하고 부드럽고, 화합을 도모하고, 법에 맞는 말을 하고, 탐욕 없고 성냄 없고 바 른 견해를 가지는 것 등이 선업이다. 이런 선업은 이 생에 건강한 몸과 부, 아름다운 외모와 행복한 인간관계, 사회적 명성과 성공 등의 행복을 가져오고, 다음 생에도 천 상계나 인간계 등 선처에 좋은 조건으로 태어나게 할 것이다. 반대로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 불선업의 뿌리이다. 타인을 괴롭히고, 주지 않는 것을 훔치고, 그릇된 성 행위를 하고, 거짓되고 거칠고 이간질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탐욕이 많고 성냄이 많은 마음으로 살고, 그릇된 견해를 고수하는 것이 불선업이다. 이런 불선업은 허약 하고 병에 시달리는 몸과 가난, 보기 싫은 외모와 괴로움을 주는 인간관계, 사회적 비난과 실패, 법적 처벌 등의 괴로움을 가져오고, 다음 생에 지옥이나 축생계 등 악 처에 태어나게 하거나 인간계에 태어나더라도 저열한 조건으로 태어나게 할 것이다.

이렇듯 업은 행복하거나 괴로운 과보를 가져온다. 그런데 이를 오해하게 되면, 무 슨 일만 일어나면 “이게 다 전생의 업 때문이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부처님 께서는 세상 모든 것은 조건 따라 생겨난다고 하셨지, 모든 것이 업 따라 일어난다 고 하시지 않으셨다. 업은 현상을 일으키는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며, 그 조건 중 에 오직 업만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운전하다가 졸아서 큰 사고가 났다면, 졸음 때 문에 사고가 난 것이다. 누가 고함을 지르는 것을 듣고 놀랐다면, 고함이라는 대상이 놀람의 조건이다. 날씨가 더워서 힘들고 지쳤다면, 더운 날씨가 피곤함의 조건이다. 이렇듯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업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여 러 가지 조건 중 하나로 업이 있을 뿐이다. 다만 업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할 때가 있 는데, 그것은 전생에서 이생으로 옮겨올 때, 즉 이생에 태어나는 순간이다.

업에 대한 또 다른 오해로는, 특정 업은 반드시 특정한 과보를 가져온다는 숙명론 적인 이해가 있다. 하지만 업이 어떤 과보를 가져오는 중요한 조건일 때조차, 이런 업을 지으면 이런 과보를 받는다고 일차원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 이 과보로 일어날 때도 여러 업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 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소금덩이 경」에는 같은 악업을 지었는데 왜 어떤 사람 은 무거운 과보를 받고, 어떤 사람은 가벼운 과보를 받는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이 있다. 조그만 컵에 담긴 물에 소금 한 줌을 넣으면 그 물은 너무 짜서 마실 수가 없다. 하지만 강물에는 소금 한 줌을 집어 넣어도 강물이 짜지지 않는다. 이같이 이 생에 보시하지 않고, 계도 지키지 않고, 수행도 하지 않고 살았다면 사소한 악업으로 도 다음 생에 악처에 갈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악업을 지었더라도 보시도 많이 하고, 계도 잘 지키고, 수행도 열심히 했다면 악처에는 가지 않는다. 이처럼 업은 서로 유 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므로 사람들이 같은 업을 지었더라도 꼭 같은 결과를 경험 하지는 않는다. 또 어떤 업을 짓는 순간 특정 결과가 확정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재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업의 결과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이렇듯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숙명론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 라 미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 불선업을 지었더라도, 후에 선 업을 더 많이 짓게 되면 불선업이 가져올 과보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업 중에는 그 죄업이 너무 무거워서 이번 생에 아무리 많은 선업을 짓는다고 해도 다음 생에는 무 간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업도 있다. 부처님 몸에 피를 내거나, 아라한 을 죽이거나, 승가의 화합을 파하거나, 아버지를 죽이거나, 어머니를 죽이는 오무간 업(五無間業)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무거운 불선업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 악 처에 태어나는 것이 확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제까지 살면서 불선업을 많이 지었다고 느낀다면, 삶의 남은 기간에 선업을 최대한 많이 지으려고 온 힘을 다 해 노력하면 된다. 강물처럼 큰 선업을 지으면 소금의 짠맛과 같은 악업을 희석해 그 불선업의 결과가 약해질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특정한 행동이나 말 그 자체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의도이다. 즉 행위들을 어떤 의도로 했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가 달라진다.

어떤 행위를 하든 그 의도를 선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업이 결과를 생산하는 데는 수많은 변수가 있기에, 업과 과보의 관계는 아 주 미묘하고 심오하다. 그래서 어떤 업에 의해서 어떠한 과보가 일어나는지 모두 다 세세하게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밖에 없다. 일반적인 수행자는 자신의 지혜에 따라 업과 과보의 일부분 정도를 알 뿐이고, 오직 일체지(一切智)를 갖춘 부처님만이 그것들을 다 아실 수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생각할 수 없음 경」에 보면 보통 사 람들이 아무리 알려고 노력해도 알 수 없고, 알려고 노력하면 미치거나 곤혹스러워 지는 것이 네 가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부처님의 경지, 선정에 든 사람의 마음, 업과 업의 결과, 세상에 대한 사색이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타인의 상황을 보고 이것은 어 떠한 업 때문이라고 섣불리 결론 내리거나, 현재 나나 타인이 어떤 업을 지었으니 미 래에 반드시 어떤 과보를 받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 모두 다 어리석은 행동이다. 우 리들의 미약한 지혜로는 업과 과보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현재 최선 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업과 과보에 대한 이해에서 또 중요한 것은 과보는 과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과 보에 의해 생긴 현재 상황 자체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해 일으키는 마음의 의도, 즉 업이 미래의 과보를 생산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 교에서는 한 사람의 고귀함과 비천함은 그가 처한 상황이나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짓는 업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부처님께서는 높고 낮은 계급이 고귀하고 비천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선한 업을 짓는 이가 곧 고귀한 이요, 불선 한 업을 짓는 이가 곧 비천한 이라고 하셨다. 어떤 조건과 상황 속에 놓여 있든, 거기 서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고귀함이요, 불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비천함이 다. 이런 가르침은 금수저, 흙수저라는 용어가 일상화된 현대 한국 사회에 큰 함의를 지닌다. 실제로 태어날 때의 조건은 과거 업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어떤 환 경에서 태어나는지는 단지 과보일 뿐이다. 그가 받은 과보에 의해 생긴 환경이나 상 황이 그 사람의 고귀함과 비천함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조건과 상황에 대해 일으키는 의도, 즉 업이 그 사람의 고귀함과 비천함을 결정한다. 가난하고 낮은 집안 에 병약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 사람을 비천하게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조건에 대해 분노하고 부모와 사회를 저주하고 심지어 나쁜 짓을 하거나,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나는 쓸모없다’라며 자학하고 자포자기해 노력하기를 그 친다면, 이것이 곧 비천함이요 이런 불선업은 미래에 더 많은 괴로움을 가져올 것이 다. 하지만 자신이나 주변 환경에 대해 싫어하거나 화내지 않고, 지금 상황은 과거 어 떤 불선업의 결과일 수는 있겠지만 내가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믿음 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직업 기술을 익히고 술이나 유흥에 빠지지 않고 돈 을 건실하게 쓰고, 보시하고 수행하는 선업을 지으며 살아간다면, 이것이 곧 고귀함 이요 이런 선업은 행복을 가져올 것이다. 반면에 부유하고 위세 있는 집안에서 건강 하고 아름답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 사람을 고귀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자만하고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약탈하며, 술과 유 흥을 즐기고 나눔에는 인색하고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는 돈을 낭비한다면, 이것이 곧 비천함이요 이런 불선법은 많은 괴로움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누리는 복 보가 과거 선업의 결과임을 알고, 자만하지 않고 타인을 존중하며 자신이 가진 큰 힘과 부를 타인들의 이득을 위해 쓰고 탐욕 없고 성냄 없이 살아간다면, 이것이 곧 고귀 함이요 이런 선업은 지금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같이 업과 과보를 제 대로 이해하는 이는, 좋아할 만한 상황에서도 집착하지 않고 싫어할 만한 상황에서도 싫어하지 않고, 어느 때나 불선업을 버리고 선업을 짓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혹자들은 불교는 무아를 설하기 때문에 불교적으로 보면 업과 과보, 더 나아가 윤 회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업과 과보가 있다고 한다면, 업을 행하는 주체와 과보 를 받는 주체, 윤회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불교에서는 무아를 설하므로 업과 과 보, 그리고 윤회가 있다는 주장은 불교의 기본 교리와 모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는 연기(緣起)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오해이다. 모든 것은 조건 따라 일어나고 조건이 소멸하면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의 가르침이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세상의 진리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 또한 조건 따라 일어난 법이며, 그렇기에 변하고 소멸하 기 마련이다. 이 육신은 서서히 늙고 병들어가다가 100년 정도가 되면 사라진다. 심 지어 마음은 순간순간 일어났다 사라진다. 대상을 볼 때의 마음, 소리를 들을 때의 마음, 그것들을 좋다 싫다 분별할 때의 마음은 순간 일어났다 순간 사라진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영원하지 않으며 변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이 몸과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 몸이여 늙지 말라. 죽지 말라’라고 하면서 바란다 해도 몸은 늙어 무 너지게 마련이고, ‘이 마음이여 항상 행복하라’라고 바란다 해도 괴로움이 생길 조건 이 있다면 괴롭고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조건 따라 일어나기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과 마음 그 어디에도 외부 조건 변화에 상관없이 영원하게 유지되는 나, 자아, 영혼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조건 따라 일어났다 사라져서 내 마음대로 통제되 지 않는 몸과 마음을 ‘나’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과거 몸과 마음의 흐름에 대한 기억들을 ‘나’라고 집착할 뿐이다.

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몸과 말과 마음의 의도, 업은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진 다. 지혜와 탐욕 없음, 성냄 없음을 조건으로 선업이 일어나고, 어리석음과 탐욕 성 냄을 조건으로 불선업이 일어난다. 나라는 주체가 업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건들이 있을 때 선하거나 불선한 의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업에 따른 과보 또한 나라는 주체가 있어서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무르익으면 과보 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불선업을 조건으로 괴로운 형상과 듣기 싫은 소리, 고통스러운 느낌과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만, 이 법들 또한 일어났다 사라질 뿐 어디에도 과보를 받는 나는 없다. 이처럼 업도 과보도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거기 에 내 것, 나, 내 자아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이렇게 업과 과보는 무아의 교리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도리어 바로 무아이기 때문에, 불교 수행이 의미가 있다. 업은 내 것도, 나도, 내 자아도 아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지은 불선업이 나를 저주받을 존재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요, 과거에 지은 선 업이 나를 영원히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괴로움 또한 영원 하지 않고, 지금 누리는 행복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업도 과보도 조건 따라 변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불선업을 지어왔더라도 앞으로는 선업을 지 을 수 있다. 지금까지 괴로웠더라도 언제든지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갈 수 있다. 지금은 윤회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중생이어도 언젠가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 멸,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이라 면, 그저 불선법을 버리고 선업을 짓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된다. 이것이 모 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諸惡莫作(제악막작) 모든 불선한 마음을 짓지 말고

衆善奉行(중선봉행) 온갖 선한 마음을 받들어 행하며

自淨其意(자정기의)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是諸佛敎(시제불교)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일묵 스님 해인사 백련암에서 원택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범어사 강원을 졸업했고 봉암사, 미얀마 파욱국제명상센터, 영국 아마라와티, 프랑스 플럼빌리지 등 국내와 세계 불교 수행처에서 수행했다. 2009년 서울에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전 하는 제따와나선원을 개원했고, 2018년 강원도 춘천에 수행 도량을 마련해 이전했다. 현재 춘천 제따와나선원의 원장으 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초기 불교 윤회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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