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업(業)이란 무엇인가 ③ 업(Karma): 선택은 내가 한다

(karma):

선택은 내가 한다

 

아얀 부다다사

철학자

 

 

팔리어 경전에는 보리수 아래서 붓다가 정각을 얻는 과정이 두 개의 버전으로 전 해지고 있다. 제1버전은 붓다가 세 가지 명지(明智)를 얻었다고 한다. 첫 번째 명지에 서는 먼 과거까지 전생을 기억했다. 경전마다 이를 동일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로 기 록한다. 두 번째 명지에서는 존재가 행동에 의해 지속됨을, 지은 업에 따라 죽고 태 어남을 보았다. 세 번째 명지에서는 충동의 파괴성을 깨달았다. 업이 숙성되어 밖으 로 흐르는 것이 가장 깊은 차원의 오염이다. 업이 다 소진하면 오염도 이기주의도 고 통도 더 이상 없다.

 

불교는 업의 소멸을 가르치고, 업에 따라 살기보다는 업을 넘어서는 삶을 설한다.

팔정도는 업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길이다. 업에 휘둘려 사는 것은

한정적이고 고통스럽고 힘들다. 단지 업에 굴복해서 업의 과보에 따라 나고 죽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불교의 해탈지는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첫 번째 명지는 유아(有我)와 환생을 말하는 우파니샤드 이전 시대의 영원 주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동일한 사람이 계속 다시 태어난다는 영원주의 를 불교에서는 오히려 제거하려고 한다. 두 번째 명지는 존재가 업에 따라 죽고 태어 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한 존재가 하나의 존재 방식에서 사라졌다가 다른 방식으 로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업력이 한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어짐을 말한다. 이것은 직접적이고 명확한 불교 가르침이 아니다. 불교는 업의 소멸을 가르치고, 업에 따라 살 기보다는 업을 넘어서는 삶을 설한다. 팔정도는 업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길이다. 업에 휘둘려 사는 것은 한정적이고 고통스럽고 힘들다. 단지 업에 굴복해서 업의 과 보에 따라 나고 죽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불교의 해탈지는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첫 번째 두 번째 명지는 진정한 불교 가르침이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것이 왜 팔리어 경전에 들어 있을까? 내 생각에는 경전을 편집한 사람이 일반인들을 위해서 그 부분을 넣은 것 같다. 아마도 연기와 업의 완전한 소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윤리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평범한 사 람들의 윤리성을 고양하기 위한 붓다의 깨달음 이야기에 관한 제1버전이다.

불교에서는 이보다 더 합리적이고 수용 가능한 깨달음의 이야기인 제2버전이 있 다. 바로 붓다가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다. 팔리어 경전에 의하면 붓다가 보리수 아래 앉은 채 연기를 숙고한다. 붓다는 초야의 4시간 동안 무지에서 시작해 순관을 했고, 다음 4시간 동안은 고에서 시작해 역관을 했다. 다음 4시간 동안에는 동이 틀 때까지 순관과 역관을 다시 검토했다.

이 제2버전은 연기를 붓다 깨달음의 중심에 두고 있다.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연기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직전과 직후에도 연기를 숙고한다. 일주 일 동안 해탈의 지복 상태에 들어 있던 붓다는 하룻밤 내내 연기를 관한다. 이는 연 기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비록 그에 대한 설명은 짧고 간단하지만 붓다가 연기를 순관으로 관한 4시간, 역관으로 관한 4시간, 순관과 역관을 병행한 4시간이 얼마나 심오하고 어려우며, 얼마나 오묘하고 중요한지 생각해보라.

 

업의 감옥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모든 일이 업에 따라 일어난다면 절대 해탈은 없다.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수행이 되려면 업의 힘과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수행해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붓다가 깨달음 전과 도중과 이후 에 연기를 관했던 것처럼 그렇게 연기를 관해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도 이렇게 세세 하고 성실하고 집중도 있게 연기를 점검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하면 우리도 붓다 처럼 연기를 이해할 수 있다.

업에 대한 두 가지 이해 방식

이 지점에서 업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업 역시, 비록 정확도와 심도는 덜하지 만, 연기의 가르침과 유사하다. 붓다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 제1버전에서 두 번째 명지는 존재가 죽음 이후 업에 따라 지속된다고 한다. 이런 방식의 이해에 수반되는 어려움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과 부합하는 업의 이해로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붓다 출현 이전에 인도에서 흔히 업을 설명하던 방식이다. 붓다의 깨달음 이 전에 이미 우파니샤드에서 존재는 사후에 업의 작용에 따라 환생한다고 설명했다. 기독교에서도, 적어도 주류에 속하는 전통에서는, 이와 유사한 것을 가르친다. 만약 이것이 참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무엇이 그러한가?

불교에서 업에 대한 핵심 가르침은 업을 의미 없게 만드는 수행, ‘업을 소멸하는 업(the karma that ends karma)’에 관한 것이다. 이 업이 업의 모든 영향력을 넘어서 우리 를 변화시킨다. 이는 붓다의 업 가르침에서 좀 더 고유하고 심오한 측면이다. 선업은 선과를 낳고 악업은 악과를 낳는다는 것이 붓다 시대 이전에 존재하던 일반적 가르 침이었다. 붓다 출현 이전에 통용되었고 모든 종교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는 그 런 업 교리를 붓다는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가르침만으로는 붓 다의 목적인 고의 멸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붓다는 더 나아갔다.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은 업에 얽매이지 않는 것, 그리하여 업과 업의 영향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불교 서적이 ‘업과 환생’에 대해 정확하 지 않은 설명을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불교를 진실로 표현하려 한다면 말이다. ‘불교 의 업’을 설명하려면 ‘선업선과 악인악과’를 가르쳐, 우리가 종국에는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모든 업을 소멸하는 업’ 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팔정도의 수행이 바로 모든 업을 소멸하는 업이다. 업에 대 한 붓다의 가르침은 업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지, 거기 얽매어 업에 휘둘리는 삶을 살 라는 것은 아니었다.

붓다는 업의 가르침을 완성했다

업의 감옥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모든 일이 업에 따라 일어난다 면 절대 해탈은 없다.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수행이 되려면 업의 힘과 속박 에서 벗어나야 한다. 구식 접근법을 단지 반복하는 가르침은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 이 아니다. 불교가 되려면 해탈의 경지까지 완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업을 소 멸하는 업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붓다는 해탈을 설명하지 않는 그런 업을 더욱 완 성해 업으로부터의 해탈을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았다.

‘업 초월’은 세상을 넘어서고 초월하는 가르침, 즉 초세간의 가르침이다. 업에 대 한 일반적 가르침은 속세의 일부로서, 세상의 조건에 여전히 매어 있는 마음을 대상 으로 하는 세간법(lokiyadhamma)이다. 반면 초세간법(lokuttaradhamma)은 세상의 조건에 서 자유롭고 그것을 넘어선 마음을 위한 것이다. 붓다는 기존의 가르침과 고대의 가 르침을 다수 수용한 후, 그것을 자신의 초세간법 체계 안에서 완성시켰다. 업과 업을 멸하는 팔정도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붓다가 어떻게 고대 가르침과 전통을 완성 했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전 인도에 존재하던 일부 가르침을 수용했다. 예를 들면 증 오가 없음(avera), 무해 또는 비폭력(avihimsa), 오계, 다양한 삼매 수행, 색계-무색계 선 정이 그러하다. 붓다는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발전시키고 완성시켰다. 이렇게 고를 멸하기 위해 붓다가 받아들여 심화하고 완성한 옛 가르침과 수행들이 불교에 있음 을 인지하기 바란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해야 우리는 그런 가르침의 옛 버전과 붓다 가 새로이 완성한 버전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다.

붓다는 업을 비롯한 몇몇 우파니샤드 가르침을 완성했다. 그를 위해 붓다는 업의 소멸을 가르쳤다.

두 개 차원의 가르침

이런 예를 통해 두 개 차원의 가르침이 존재하고 또 그것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자아를 믿고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한 윤리적 가르침이다. 이런 도덕적 차원 의 가르침은 단지 ‘나’와 ‘나의 것’의 차원에서 사물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가 르침이다. 이들이 속세에서 활약하려면 윤리적이고 치료적인 가르침이 필요하다. 이 가르침은 세상에서 도덕을 지키며 평화롭게 사는 법, 집착을 내려놓고 이기심을 줄 여 고통을 완화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보다 상위에 있는 또 다른 가르침은 자아를 놓아버리고, 모든 것이 무아임을 알 아, 그 무엇도 ‘나’이거나 ‘내 것’이라고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설한다. 이 차원에서 는 윤리적 가르침을 무시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를 넘어설 뿐이다. 이것 이 모든 고를 해탈시키는 초세간법 차원에 있는 궁극적 진리다. 이 두 개 차원을 다 이해한다면 둘 사이에 충돌은 없다. 두 개 차원은 병존해 세간에 존재하며 세간을 살 아가는 사람을 위해서도, 세간에서 살되 세간을 넘어서 자유롭게(초세간) 살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세간의 길을 가고자 하며 세간을 초월할 마음이 없다면 세간법을 따르고 여러 논서에 나오는 연기에 대한 윤리적 설명을 받 아들이면 된다. 그리하면 세간의 방식으로 환생을 반복하되 건강한 도덕성을 지니 고, 다른 생명을 해하지 않으며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자유를 원한다 면, 세상을 초월해 모든 구속에서 놓여나고 싶다면 자아를 포함하지 않는 ‘업의 소 멸’ 같은 초월적 가르침을 공부해야 한다. 그를 위해 자아와 아상의 생성을 꿰뚫어볼 수 있는 궁극적 진리인 연기가 있다. 연기 역시 이렇게 두 개 차원, 두 개 모델이 있 다. 무엇을 따를 것인지는 나의 몫이다.

 

발췌, 번역|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이 글은 『라이언스 로어(Lion’s Roar)』 2017년 가을호에 실린 아얀 부다다사의 글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아얀 부다다사(1906~1993) 태국 출신의 고행 철학자다. 불교 교리와 태국의 민중 신앙을 융합해 혁신적으로 재해석한 인 물로서, 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종교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을 개혁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선불교에서 발견된 가르침 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선(禪)이 일본의 경제적 힘의 토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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