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업(業)이란 무엇인가 ④ 나의 미래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는 나의 삶이 결정한다__신상환

나의 미래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는

나의 삶이 결정한다

 

신상환

중관학당 대표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세계[physics]와 그것을 다루는 주체인 ‘나’를 다루는 것을, 물 리적 세계의 연관성, 그 보편성을 찾는 ‘메타피직스(metaphysics)’, 즉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을 포함해 인간 이성의 최대치를 끌어올리는 활동을 ‘지혜에 대 한 사랑’이라는 뜻으로 ‘철학[philosophy]’이라고 부른다.

우리 우주의 크기를 비교해볼 때 먼지 한 알보다도 작은 이름도 촌스러운 ‘땅으로 된 구체’인 이 지구(地球), 영어로는 그냥 ‘땅덩어리’인 이 ‘어스(Earth)’에 각기 피부와 언어가 다른 ‘우리 인류’는 지난 세월 동안 씨줄 날줄로 형이상학, 철학을 이어왔으 며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이것을 크게 나누면 그리스인들의 이성적 세계관, 그리고 중국인들의 경험적 세계관 그리고 인도인들의 초월적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이 행 성에서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의 다양한 교집합은 이와 같은 토대 위에서 비롯된 것 이다. 비록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할지라도, 또는 그 근거를 추적하지 않아 다만 경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일지라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이와 같은 큰 그림에는 변화가 없다. 아시아의 극동 끝자락에서 역사적으로 천손 사상과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라는 중층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한국인의 생각 또한 이 가운데 어느 한 자 락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업과 윤회!’

인도인들의 초월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하나의 테제를 이해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속한 교집합에 대한 이해를 가늠한다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는 ‘과거’ 의 테제를 거부한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을 뿐, 이미 있는 것을 없앨 수는 없다. 즉 인 도에서 비롯된 ‘과거의 업이 지금 발현된다’라는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인 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해석, 그 관점을 이해하는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든 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문제일 뿐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 비롯 된 것인 불교의 세계관 또한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인도의 문화적 전통 위에서 탄생 한 것이 곧 불교이고 그리고 다시 그 초월적 세계관의 전통 속으로 돌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중관학자로서 이 업과 윤회를 이해하는 것은 중관학 이전의 불교 교학, 즉 역사적 으로 형성된 유부, 경량, 유식에서 그리고 개념적으로 형성된 구사, 인명, 유식의 계 차성을 부정하는 작업이라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밖에 없는 난제가 존재한다. 인도 불교의 전통 가운데 중관학파는 ‘있다고 주장하면 없다’라고 논파를, ‘없다고 주장하면 그렇지 않다’라고 다시 논파해 희론(戱論), 무대 위에서 춤추는 어릿광대와 같은 온갖 이론을 논파해야 하는 어떤 당위성을 항상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업과 윤회를 바라보는 불교 교학의 입장도 단일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중층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전의 양면인 ‘업과 윤회’를 부정하며 굳이 전생 이전까지 시공간의 축을

좀 더 과거로 되돌리지 않더라도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라는 도덕적 합의는

우리 사회를 위해서 여전히 유효하다. 절대 훼손되지 않는 도덕률로써 말이다.

 

‘인도 최고의 발명품이자 수출품은 바로 이 업과 윤회 이론이다.’

불자들뿐만 아니라 불자가 아닌 사람들 또한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라는 이 야기를 한두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보통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 고 부르는 이와 같은 도덕률이 생겨난 것은 인도인들의 유전자를 지배하는 ‘지은 것’ 을 뜻하는 ‘카르마(karma)’, 즉 업(業)의 이론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일반적인 도덕률이 될 수 있을까? 죽으면 다 끝나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윤회’이다. 즉 ‘행하다, 하다’는 뜻의 어근 ‘크르( kŗ)’에서 파생한 ‘카르마’, 바로 이 업을 죽음 이후까지 밀고 나가야만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라는 사회적 규범은 유효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거의 모든 철학 유파들은 단 견(斷見)을 인정하는, 즉 윤회를 부정하며 ‘죽으면 다 끝!’이라는 유물론자인 차르바 카(Cārvāka, 순세외도)를 ‘공통의 적’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이것을 버리고

바로 이 단견(斷見=邪見)을 포기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일을 성취하기 위해 진실한

앎을 최고의 성심으로 (추구)하십시오.

– 졸역, 용수의 『보행왕정론』, [123. (2-23)]번 게송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라는 생각의 경계를 죽음 이후로 확장한 것을 반대 방향으로 틀어보면, ‘그럼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이 된다. 이렇게 앞으로 건너갈 ‘죽음의 강’을 이미 건너온 그곳과 이어진 것이라고 보면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윤회는 완성된다. 이 앞뒤로 그침 없이 이어진 세계, 상호 의존적인 세계를 불 교에서는 연기 실상의 세계라고 부른다.

처음, 중간 그리고 끝도

찰나처럼 생각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처음, 중간 그리고 끝 자체가

자성(自性)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졸역, 같은 책, [70. (1-70)]번 게송

중관학파는 이 그침 없는 연기 실상의 세계를 ‘그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인 ‘고 정불변하는 속성’, 즉 자성(自性, svabhāva)이 우리의 언어의 세계에 모순을 불러일으 킨다는 점을 간파하고 기존의 불교 교학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간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개념, 정의 등의 언설로 된 일체의 논의 등을 논파한다. 바로 이런 이유 로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용수는 그의 대표적 저작인 『중론』에서 ‘윤회도 없다. 업도 없다. 여래도 없고 열반도 없다’라는 상상할 수 없는 과격한 주장을 하게된 것이다.

그 출발점을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잡는 과거에서부터, 이 세상이 사라지고 난 다음 에도 다른 세상이 생겨난다는 미래까지, 시공간의 축을 ‘거의’ 무한으로 확장해둔 가 운데 그침 없는 흐름만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불교의 세계관을 언어 이전의 문 제까지 고민하며 정교하게 가다듬은 중관학파의 입장에서 업과 윤회는 그저 언설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개념, 정의 등 언어로 된 그 모든 것을 중생 구제를 위한 방편 교설로 보는 것이다. 진속이제(眞俗二諦)라는 중관학파 특유의 진리관, 언설에 대한 극 도의 경계를 넘으면 바로 그침 없는 연기 실상의 세계를 직접 대면하고자 하는 삶의 실천성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우리 전통이 가진 살부살조(殺佛殺祖)의 치열함과 도 일맥상통한다. 어딘가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모르지만 남이 대신 살아주지 않는 이 삶의 그 귀함이, 오직 이 한생(生)의 ‘지금 여기’에서 이루는 자기 자신의 삶이 곧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자기 확신에 강조의 방점을 찍게 만든다.

동전의 양면인 ‘업과 윤회’를 부정하며 굳이 전생 이전까지 시공간의 축을 좀 더 과거로 되돌리지 않더라도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라는 도덕적 합의는 우리 사 회를 위해서 여전히 유효하다. 절대 훼손되지 않는 도덕률로써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문명의 공통분모를 이루는 이 지구라는 조그만 행성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런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기에.

쓰는 김에 좀 더 더 쓰면 어떨까? 생(生) 이전에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 ‘초월적 세계관’을 구축했던 인도인들의 생각을, 그 생각에서 비롯된 불교적 세계관 에 젖어들 수 있기에 드는 생각이다.

신상환 인도 비스바바라티(Visva-Bharati)대학에서 티벳학 석사, 캘커타대학 팔리어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 스바바라티대학 인도-티벳학과에서 조교수와 고려대장경연구소 연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중관학당 대표로 있다. 주 요 저서로는 『세계의 지붕 자전거 타고 3만리』, 『용수의 사유』 등이 있고, 『선설보장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권게왕 승)』 등의 번역서가 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3 × fi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