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9 공(空)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__홍창성

(空)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우리가 사는 세계는 만물이 조건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현상(現象)의 세계다. 조건의 집산(集散)에 의존하다 보니 현상으로서의 만물은 본체(本體) 없이 존재하며 동시에 자성(自性)을 결여해 공(空)하게 된다. 제법개공(諸法皆空)이다.

그러면 연기하는 현상으로서의 사물과 자성을 결여해 공한 사물은 서로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을까? 나는 전에 ‘연기(緣起)가 공(空)’이라는 나가르주나의 주장은 ‘연기하는 것들은 공한 것들이다’라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소개했는데,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명하지는 않았었다. 이 관계에 대한 논의가 이번 호의 주제다.

불일불이(不一不二)와 개념적 혼동

대승(大乘) 전통에서는 불이론(不二論)을 현상과 공(空)의 관계를 설명하는 좋은 도구로 여겨왔다. 그런데 ‘불이(또는 불일불이不一不二, 不一不異)’는 개념적으로 분명히 정의(定議)되지 않은 채 사용되어온 것 같다. 그래서 이 개념으로 현상과 공의 관계를 조명해보려면 혼동을 부를 우려가 있는 부분을 철학적으로 엄밀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먼저 ‘불일불이(不一不二)’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라고 해석되어왔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같다’는 말은 ‘질적(質的)으로 같다(qualitatively the same)’와 ‘수적(數的)으로 하나다(numerically one)’라는 뜻을 모두 포함한다. ‘오늘 마신 차 맛이 어제 마신 차 맛과 같다’는 말은 두 맛이 질적으로 같다는 뜻이지, 어제 마신 차 맛과 오늘 마신 차 맛이 수적(數的)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다. 어제 마실 때의 차 맛은 이미 사라졌으니 그것이 오늘 마시고 있는 차 맛과 수적으로 동일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제 마신 차와 오늘 마신 차가 서로 다른 찻잎에서 나왔고 또 제품을 내놓은 농장도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맛이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같다’라는 표현을 쓴다.

‘수적으로 하나다’라는 의미에서의 ‘같다’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 ‘백범은 김구다’라는 참인 문장에서 우리는 백범이 김구이기 때문에 두 개의 이름 모두 한 사람을 지칭한다는 점을 안다. ‘물은 H2O이다’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는 무색무취의 액체가 물이지만, 물은 H2O 분자들과 수적(數的)으로 하나이다. 물과 H2O는 질적으로는 달리 표현되지만 수적으로는 하나이다. 물체(object)에 대한 이와 같은 통찰은 사건(event)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성수대교가 갑자기 붕괴했다,’ ‘어제 한강 다리 하나가 내려앉았다,’ ‘어제 모든 석간신문 1면을 장식한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등의 문장은 모두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술들(descriptions)이다. 비록 여러 다른 표현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수적(數的)으로 하나인 사건에 대한 것들이다.

이제 똑같이 생긴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둘은 같을까 다를까? 이렇게 애매한 질문에 한마디로 답할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은 질적으로는 같고(qualitatively the same) 수적(數的)으로는 하나가 아니고 둘로 구분되어(numerically distinct) 다르기 때문이다. 즉 질적으로는 같고 수적으로는 구분된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이와 같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동일성(同一性, identity)’의 의미를 ‘수적으로 하나이고 질적으로 같다(numerically one and qualitatively the same)’로 엄밀히 정의(定議)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불일불이(不一不二)’라는 문장과 관련해 질(質)과 수(數)의 개념을 적용하며 질적으로 ‘같다’와 ‘다르다’ 그리고 수적으로 ‘하나다’와 ‘하나가 아니어서 구분된다’는 개념들의 교통정리를 시도해보았다. 이제 전통적으로 현상(現象)과 공(空)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온 표현인 ‘불일불이(不一不二)’를 뜻이 옳게 통하게 이해해보자.

현상(現象)과 공(空)

연기(緣起)하는 현상세계는 자성(自性)을 결여하고 있다. 즉 공하다. 그래서 현상(現象)세계가 바로 공(空)의 세계이다. 이 두 세계는 수적(數的)으로 구분되는 두 세계가 아니다(不二). 그러나 현상의 세계와 공의 세계가 질적으로 동일한 세계도 아니다(不一). 연기의 관점으로 파악되는 현상의 세계와 자성을 결여한다는 공의 관점에서 보는 세계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 세계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세계이다.

조건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멸한다는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계는 분명 천차만별(千差萬別)의 삼라만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현란한 현상의 세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적(全的)으로 자성(自性)을 결여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조명해보면 이 세상은 아무런 차별이나 분별이 없이 절대적으로 평정(平靜)하고 적정(寂靜)한 공(空)의 세계이다. 존재하는 대상이나 사건은 수적으로 하나이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기술/표현되고 또 질적 속성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래서 하나의 세계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연기하는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현상의 세계로 또 아무런 차별이나 분별이 없는 공(空)의 세계로도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존재 세계는 수적으로는 불이(不二)이고 질적으로는 불일(不一)이다. 나는 대승 전통의 불일불이(不一不二)를 이렇게 이해한다.

불일불이(不一不二)가 옳기는 하지만, 실은 우리가 그것을 지나치게 동정적으로 이해해주어야만 옳게 보인다. 그 이유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不一不二’를 문자 그대로 읽어서 ‘(수적으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라고 해석해보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 된다. 우리의 논의의 대상은 현상 세계와 공의 세계 둘뿐인데, 만약 존재하는 세계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면 그런 세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셋 이상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대승은 아무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斷滅論)을 부정하며 또 현상과 공을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들)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수적으로 해석하는 ‘不一不二’는 옳지 않은 문장이다.

한편 ‘不一不二’는 ‘(질적으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 현상의 세계와 공의 세계는 질적으로 같거나 달라야 하지 그 밖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래서 질적으로 해석하는 ‘不一不二’도 단적으로 거짓인 문장이다.

‘不一不二’를 뜻이 통하게 읽으려면 ‘현상세계와 공의 세계는 질적으로 같지는 않지만(不一) 수적으로 구분되지도 않는다(不二)’라고 해석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 방식은 ‘不一’을 ‘질적으로 같지 않다’로 그리고 ‘불이(不二)’를 ‘수적으로 둘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곤란한 문제가 있다. ‘不一不二’라는 하나의 문장에서 앞의 반은 질적으로 해석하고 뒤의 반은 수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이것은 한 문장 안에 있는 ‘一’과 ‘二’를 모두 질적으로 아니면 모두 수적으로 일관되게 해석해야 한다는 논리학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학자들이 천여 년 이상 경고한 모호함의 오류(fallacy of equivocation)를 범하는 것이다. 철학의 눈으로 볼 때 당황스럽기만 한 오류이다.

이제 위의 논의를 요약해보겠다. ‘不一不二’는 수적으로 해석해도 또 질적으로 해석해도 모두 거짓인 문장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앞의 반은 질적으로 그리고 뒤의 반은 수적으로 해석한다면, 비록 문장의 뜻이 제대로 통하게 되기는 하지만, 이는 논리학에서 금하는 모호함의 오류를 범하게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대승 전통에서 현상과 공의 관계를 표현해주어온 ‘不一不二’를 철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는 우리가 받아들여 사용할 수 없는 문장이라고 판명된다. ‘不一不二’라는 모호한 표현이 마치 심오한 진리라는 듯 신비감을 주기도 하는데, 철학자들은 실제로 근거 없는 신비감은 대부분 개념적 혼동이나 논리적 오류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한다. 나는 현상의 세계와 공의 세계의 관계를 더 이상 ‘不一不二’라는 모호한 문장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현상(現象)과 공(空)을 ‘두 개의 관점에서 바라보아 나온 하나의 세계의 두 모습’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현상(現象)이나 공(空)의 바탕은 없다

그런데 두 개의 관점으로 바라보아 각각 현상의 세계와 공의 세계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바탕이라는 그 하나의 세계는 무엇일까. 나는 이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불교와 불교 아닌 다른 종교 및 철학 체계가 뚜렷이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주요 종교 가운데 오직 불교만이 그 ‘무엇’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현상과 공의 세계 모두 엄연히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탄생할 당시 인도 사회에는 이미 힌두교의 전신인 바라문교가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의 성전인 베다에 의하면, 이 우주 모든 만물의 근원과 바탕은 객관적인 절대적 실체(實體, substance)로서 실재(實在)하는(real) 브라만(Brahman, 梵)이다. 브라만은 서양의 자연 신학에서 말하는 신(神)과도 비유될 수 있는데, 그것은 존재와 비(非)존재(nonexistence)의 구분조차 초월하고 있어서 그 무한히 위대한 속성을 긍정적인 언어로 표현할 방법은 없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은 힌두교의 브라만에 대해서도 옳다. 가능한 표현이라면 단지 ‘브라만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브라만은 색깔이 없다,’ ‘브라만은 가계 족보가 없다’ 등 부정(否定)의 방법(via negativa)을 사용하는 표현들뿐이다. 왜냐하면 만약 브라만이 ‘색깔이 있다’고 하며 긍정적인 표현을 쓰면 브라만이 그 특정 색깔을 가져야만 한다는 점에서 그 무한해야 할 위대성이 제한되고, ‘가계 족보가 있다’고 긍정한다면 그 가계 족보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또 그만큼 위대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어떤 긍정적인 표현도 브라만의 무한한 위대함에 저촉되기 때문에 브라만에 적용될 수 없다. 그럼에도 브라만은 존재 세계 모든 현상의 존재적 근원이고 바탕으로서 실재(實在)한다.

바라문교/힌두교의 성전인 베다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현상(現象)세계는 브라만이 아무 이유 없이 단지 유희(遊戱, sport)로 창조해내었을 뿐이라고 한다. 아무 부족함 없이 실재하는 브라만이 유희로서가 아니라면 굳이 이 현상세계를 창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겠다. 한편 바라문교/힌두교는 브라만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주관적 실체로서 실재하는 아트만(Atman, 我)의 존재도 가르치는데, 아트만은 서양 종교의 자아(self) 또는 영혼(soul)에 해당된다. 브라만과 아트만은 조건들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멸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며,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성(自性)을 지니고 불변불멸 영원하다. 즉 그들은 연기의 그물 밖에서 존재하는 실체(實體)로서 어떤 형언할 수 없는 굉장한 자성(自性)을 가지고 실재(實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체가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이 바로 우리가 일상을 사는 현상세계요 환(幻)의 세계라고 한다.

그런데 만물이 연기(緣起)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모두 공(空)하다는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에서는 브라만이나 아트만같이 상주(常住)하며 연기와 공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브라만도 없고 아트만도 없다. 무범(無梵, Non-Brahman)이고 무아(無我, Non-Self)이다.1) 그렇다면 이런 바탕이 되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는 현상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재(實在)하는 아무것도 그 바탕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의 현상세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일견(一見)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대학의 교양 서양 철학 개론 시간에 논의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으로 답변을 이끌어낼 수 있다.

대승은 아무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斷滅論)을 부정하며

또 현상과 공을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들)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수적으로 해석하는 ‘不一不二’는 옳지 않은 문장이다.

 

인식론적 논증

(1) 우리가 감각기관과 뇌 및 의식의 작용을 거치지 않고 사물 그 자체의 속성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 그럴 방법은 없다. (2) 우리의 의식에 들어온 인식 내용은 사물 그 자체(본체)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가 아니면 우리 인식 기관이 해석한 현상으로만 드러나는가? –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인식 작용에 의해 해석되어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3) 그러나 현상의 근원이 되는 사물 자체의 존재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당신이 꿈을 꾸고 있어도, 당신이 영화 <매트릭스(Matrix)> 같은 기계 안에 누워 있어도, 또 당신이 장님이어도 당신의 뇌가 슈퍼컴퓨터와 연결되어 제대로 된 신호를 받기만 하면 현상세계는 아무런 차이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현상의 존재를 위해 반드시 그 바탕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각각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불교의 유식론(唯識論)과 영국의 관념론이 위와 같은 견해를 기초로 형성되었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실체 없이 존재하는 현상세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존재론적 논증

그런데 위의 논의에서는 바탕이 되는 무엇이 반드시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만 했지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그런 바탕이 존재하고 그것이 우리 의식을 통해 형성되는 현상의 근원이 될 가능성이 배제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바탕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실체로서 실재하지 않고 단지 현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까지 증명해야 불교의 존재론을 제대로 방어할 수 있다. 우리의 세계가 실체 없이 현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보이는 존재론적 논증도 다음의 몇 가지 질문과 답변으로 제시될 수 있다: (1) 모든 사물에는 그 사물의 속성들이 걸려 있는 어떤 바탕이 되는 기체(基體, substratum)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속성들이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있을 수 있겠는가? – 그렇지 않다. 데이비드 흄이 지적했듯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속성도 없지만 속성들의 바탕이 된다는 기체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괴물’로서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기체 없이도 속성들은 자기들끼리 잘 모여 있을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다섯 아이들이 모여 농구팀을 만들어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이런 팀은, 말하자면, 기체 없이 속성들만으로 만들어져 아무런 문제없이 존재한다. 이 비유를 조금 더 밀고 나가자면, 기체 없이도 입자(속성)들이 서로 관계하며 모여 대상을 이루고, 사람을 이루고, 태양계를 이루는 이치와 같다. 모든 사물의 존재 방식은 이런 식으로 기체 없이 모이는 속성들의 집합으로 이해될 수 있다. (2) 기체(基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각각의 속성(property)은 자성(自性)을 가지고 실재(實在)한다고(real)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그들은 단지 현상이 아니라 실재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 아니다, 그들도 역시 현상이고 자성을 결여한다. 이런 속성들은 본체(本體)나 기체(基體) 없이 다른 속성들과의 관계에서 이런저런 조건들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여여(如如)하게 연기하면서 자성을 결여한 채 존재한다. 바탕 없이 공(空)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실재(實在)와 대비된 환(幻) 또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옳다. 그래서 현상은 존재론적으로도 바탕 없이 존재한다.

현상(現象)과 공(空)은 동전 없는 동전의 양면(兩面)

우리 세계의 사물은 어떤 기체나 바탕 없이 단지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이런 현상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기 때문에 공(空)하다. 그래서 현상(現象)의 세계여서 공(空)한 우리의 세계는 아무 바탕이나 기체(基體)도 없이 묘(妙)하게 존재한다. 현상과 공은 동전의 양면이다. 단, 그것들은 동전이 없이 마주 보는 양면(兩面)이라는 것이 불교가 가르치는 섬세하고 묘(妙)한 진리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저술한 단행본 『(가제)불교철학강의』가 출판 예정이고, Buddhism for Thinkers와 유선경 교수와의 공저 『불교와 생명과학』을 집필중이다.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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