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강좌|김성구 교수의 ‘화요 열린 강좌’ 양자얽힘은 물리학적 측면에서 연기의 이치를 말해주는 현상

양자얽힘은 물리학적 측면에서

연기의 이치를 말해주는 현상

 

김성구(이화여대 명예교수)

 

과학은 이론과 실험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여기에 해석이 덧붙는다. 실험적 결과가 너무 이상하니 이론과 결과를 이어주는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슈뢰딩거 방정식이 이론을 담당하는데, 모든 물리적 대상을 파동으로 기술하며 입자의 개념은 아예 없다. 그런데 이중성이라든가 중첩, 양자얽힘 등 측정되는 물리 대상은 반드시 입자로 나타난다. 이론은 파동으로 기술했는데 실험에서는 입자로 나타나는 것을 설명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보통 확률론적 인과율로 실험 결과를 설명한다. 슈뢰딩거 방정식에 나오는 파동함수는 현재 보고 있는 이 물리 세계에 대해 여러 가지 상태가 겹쳐 있다고 말하며, 이것을 ‘중첩’이라 한다. 항상 이 미시 세계에서는 여러 가지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그 중첩된 상태 중에서 어떤 것을 보게 되느냐는 관찰자가 관찰할 때마다 달라진다. 우리는 전기 스위치가 할 수 있는 일이 ‘꺼짐’과 ‘켜짐’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양자역학 이론의 파동함수는 그 두가지도 있지만 그 둘이 겹쳐 있는 상태도 가능하다고 본다. 오히려 미시 세계에서는 그 둘이 섞여 있는 게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만약 상태가 두 가지가 아니고 백 가지라면 그것의 확률이나 분포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양자역학의 해석이 필요하다. 그 해석 가운데 정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코펜하겐 해석이다.

코펜하겐 해석의 기본은 객관적 실재를 부정한다. 여기 컵이 하나 있다. 각각의 사람이 컵을 어떻게 보느냐와 상관없이 모두가 ‘이렇게 생겼다’고 해야 컵이 실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 따르면 사람마다 보는 것이 모두 다르다. 즉 관찰 행위에 따라 어떤 상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물리계의 모든 정보는 파동함수에 있으나, 관측자는 가능한 고유 상태 중 어느 하나를 볼 뿐이다. 이게 바로 확률론적 인과율이다. 따라서 미시 세계의 원자나 소립자들은 관찰에 의해 창조된 것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 소립자들은 허깨비 같은 존재다. 소립자들은 위치나 운동량 같은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위치나 운동량 등의 물리량은 측정과 더불어 만들어진 것이다. 컵은 관찰하니까 여기 있다.

거시 세계의 물리적 대상들은 실용적인 맥락에서 실재한다. 거시 세계는 허깨비 같은 원자와 소립자로 이루어졌다. 허깨비가 많이 모이면 실체를 갖게 되고 실재하게 되는가? 거시적 세계는 고전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고전역학이란 정확한 양자역학의 근사 이론에 불과하다. 이론적으로 보면 미시 세계의 소립자들이 더 실재적이고 거시 세계의 물체들이 근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그 반대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부처님은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허깨비가 정확한 법칙을 따르고 (허깨비가 모인) 실재하는 것은 근사적 법칙을 따른다? 이게 현재 물리학에서 사물을 볼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 인물로는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 볼프강 파울리가 있다. 반대 입장에 선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인슈타인이며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EPR(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 이름 앞글자) 패러독스, 즉 양자역학에 역설이 있음을 주장해 보어를 곤경에 빠뜨렸다.

원자가 독립적 실체라면 그것은 하나의 위치와 정해진 운동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원자가 어딘가에 위치해 있지 않거나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말할 수 없다면(양자역학의 주장) 그것을 실체를 가진 존재라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양자론은 ‘입자가 어디에서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가?’ 하는 물음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한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쟁점을 요약하면 이렇다. 보어는 “입자가 X에서 발견되었다면 입자는 원래 X 부근에 있었다”(아인슈타인의 주장)는 것은 고전적 관점이라 보았다. 전자가 하나의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라는 것이다. 보어는 관측되지 않은 전자는 위치라는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보았다(불확정성 원리).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불확정성 원리는 인정하지만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하느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입자를 어디선가 관측했다면, 이론이 그것을 예측하지 못했을 뿐이지 입자는 관측된 곳의 부근 어딘가 있었다는 것.

보어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크기, 색깔, 무게이다. 다른 관찰자가 측정했다면 다른 물리량을 얻을 수도 있었다. 우리가 보았기 때문에 크기, 색깔, 무게라는 물리량이 나타난 것이지 보지 않는다면 그런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대상을 교란시키지 않고(건드리지 않고) 크기, 색깔, 무게를 알아낼 수 있다면 우리가 보건 보지 않건 크기, 색깔, 무게라는 물리량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런 물리량이 실재한다는 것은 ‘돌’이라는 물리적 실재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EPR은 하나의 입자가 2개로 깨진 경우 이 중 하나의 입자에 관한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해 다른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때 계를 교란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측정 행위에 의한 상태가 변했다는 말은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입자의 실체가 보이지 않더라고 관측되는 부근 어딘가에 존재하므로 우리가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라 주장했다. 인간이 모르는 어떤 숨은 요인이 있음을 뜻한다(숨은 변수 이론).

훗날 데이비드 봄은 EPR이 제안한 실험과 원리적으로는 같으나 실제로 수행 가능한 실험 방법을 제안했다. 물리량의 합이 ‘0’인 입자가 2개의 입자로 분리되어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측정된 왼쪽 전자가 1/2(-1/2)의 스핀 값이면 오른쪽 양전자의 스핀 값은 –1/2(1/2)이 될 것이다. 이처럼 전자의 스핀 값만 보고 양전자의 스핀 값을 알 수 있다. EPR 패러독스에 의하면, 전자와 양전자가 분리되어 수백 광년 떨어지면 측정하기 전까지 전자의 스핀 성분이 1/2인지 –1/2인지 알 수 없다. 1/2일 확률이 50%, -1/2일 확률이 50%일 뿐이다. 전자의 스핀을 측정한 값이 1/2이면 수백 광년 떨어진 양전자의 스핀은 –1/2로 결정된다. 어떻게 수백 광년 떨어진 양전자가 전자의 스핀이 1/2로 된 것을 알 수 있는가? 이것은 모순이다. 왜냐면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정보의 속도는 빛보다 빠를 수 없기 때문이다. 측정 전에 스핀 값이 결정되어 있어야 한다. 즉 측정 전에도 입자는 실재한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

보어는 몇 달 뒤 똑같은 제목의 논문으로 EPR의 주장을 반박했다. 아인슈타인은 2개의 파편이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보고 그 둘을 독립적인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아인슈타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측정도 해보지 않고 어떻게 분리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관측 결과 몇 백 광년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 판명될지라도 그것은 관측 후의 일이다. 관측 전에는 단일체로 보아야 한다. 분리되었다고 생각하고 계를 기술하면 이미 물리계에 교란을 준 것이기 때문에 시스템이 바뀐다.

보어와 아인슈타인 중 누가 옳은지 측정하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 벨(John S. Bell)이다. 영국의 물리학자 벨은 EPR 패러독스에 내포된 철학적 논란들을 검증 가능한 부등식의 형태로 나타내고 벨의 정리를 발표했다. 데이비드 봄이 제안한 위의 실험에서 전자-양전자의 쌍이 계속해서 생성되어 모든 전자는 왼쪽으로, 모든 양전자는 오른쪽으로 날아간다고 가정하자. 앨리스는 왼쪽으로 오는 전자들의 스핀을, 밥은 오른쪽으로 오는 양전자들의 스핀을 빠짐없이 측정한다. 앨리스와 밥이 가진 스핀 측정기의 축이 같은 방향을 향할 때는 두 사람이 측정한 스핀 값을 더하면 측정할 때마다 0일 것이다. 방향이 틀어졌다 하더라도 50% 이상의 확률로 측정값은 0이 된다(벨의 부등식). 인간의 사물 인식 방식에 잘못이 없다면 벨의 부등식을 위배하는 사례는 관찰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사물 인식 방식이란 아인슈타인의 생각처럼 물리량에는 물리적 실재가 대응하고 이 실재는 측정과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해 벨의 부등식에 위배되는 사례를 한 가지라도 발견한다면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에는 기본적으로 실재성이 없거나 분리성이 없거나 아니면 둘 다 없음을 뜻한다.

우주 만물은 태초에 한 지점에서 출발했다. 우주의 근원을 추적하면 모든 만물은 양자적으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자얽힘은 물리현상이지만 주와 객이 하나가 된 경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주와 객이 하나가 된 신비 체험을 한 사람들은 많다. 이블린 언더힐은 “신비주의란 자신보다 더 큰 무엇과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자타불이, 무아지경의 체험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14세기 독일의 수녀 마가레타 에브너(“할렐루야가 울려 퍼졌을 때 … 하느님의 신성한 힘이 나를 붙잡고 … 내 영혼이 몸에서 떠나가는 것 같았다”)나 독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이 하나 속으로 우리는 무에서 무로 가라앉으리니, 하느님이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이슬람의 수피인 후세인 만수르 알 할라디(“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이고, 그는 내가 사랑하는 나이다. 우리는 하나의 육신 속에 머물고 있는 2개의 영혼이다”), 미국 원주민의 샤먼인 블랙 엘크(“우주와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때 평화는 사람의 영혼 속으로 찾아온다”), 하버드대 의과대 교수이자 뇌과학자 이븐 알렉산더(“나는 내가 그동안 언제나 우주와 동일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가끔씩 잠깐 그 사실을 알아차리곤 했다”) 등 신비 체험을 말하고 있는 경우는 적지 않다.

그렇다면 힌두교나 기독교, 기타 샤머니즘의 체험은 불교의 상수멸정과 유사한가. 부처님은 다음처럼 상수멸정의 체험을 말한다. “비구들이여 흙도 없고, 물고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는 그런 영역이 있다. 그 속에는 이 세간도 없고 출세간도 없고 (…)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 이것은 괴로움의 끝이다.”(「우다나」, 80-81) 불교 역시 분별이 없는 하나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의 깨달음과 타 종교의 신비 체험에는 이원론이 사라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주와 객의 일체감, 평화와 평온함을 느낀다. 반면 차이점도 있다. 타 종교는 자유의지에 의한 게 아니라 큰 존재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면, 불교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 첫 번째 선정에 든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 네 번째 선정에 든다. (…)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상수멸에 들고 (…)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초월적 능력을 경험한다. (…) 카샤파도 그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한다.”(『상윳따 니까야』 16:9, 선정과 곧바로 앎의 경)

주와 객의 구분 없이 전체가 하나라는 것은 ‘연기’의 이치를 말하며, 사물의 실상이 ‘공’과 ‘중도’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은 인격에도 변화가 오게 마련이다. 제임스 오스틴과 쿨라다사는 둘 다 현대 뇌과학자이다. 이들은 40년 이상 불교의 선수행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이고 모두 우주와 자신이 하나가 됨을 체험했다. 제임스 오스틴은 “선을 하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이런 점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난다. 왜냐하면 수행은 단순함, 안정됨, 올바른 행동, 자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쿨라다사는 “정기적으로 좌선하면 집중도 향상, 혈압 강하, 수면 개선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만성통증, 트라우마 이후의 스트레스,불안, 우울증, 강박 신경증 등을 치유하는 데 사용된다”라고 말했다. 수행자는 자신의 인격, 행동, 관계에 대한 소중한 통찰력을 계발해 삶을 어렵게 만드는 과거의 조건화된 비생산적인 관점을 인지해 바꾸는 것이 용이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에 대한 탁월한 자각과 감수성이 있는데, 이는 일터에서나 인간관계에서 엄청나게 도움이 된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직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우리의 자아에 의해 만들어진 분리감의 환상을 떨쳐버릴 수 있다.

현대 지식인의 특징은 이성적 판단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은 과학적으로 인정되는 것들이 있다. 명상(선)의 효과가 좋은 예다. 20세기 서양의 한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무지란 정말로 그 끝을 알 수 없다. 나는 결코 어떤 힌두교도들처럼 배꼽에 정신을 집중하고 일생을 보낼 수는 없다.” 그러나 1975년 하버드대의 뇌과학자 허버트 벤슨이 명상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시작한 이후, 오늘날에는 많은 뇌과학자들이 명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명상의 심리적 효과 또한 탄탄한 과학적 기반 위에서 입증되고 있다. 양자얽힘은, 물리학적 측면에서 우주와 내가 하나이고 모든 것은 분리하기에 익숙한 우리 마음이 만들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명상은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둘이 아님을 체험하게 한다.

 

 

물리학적 실험과 명상의 체험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자얽힘은 물리학적 측면에서 연기의 이치를 말해주는 현상이며

명상의 체험은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둘이 아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질의 :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식전변(識轉變)과는 어떻게 다른가.

응답 : 관찰자의 의식에 대한 부분은 말해야 할 내용이 많다. 관찰자의 의식 여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어왔지만, 의식이 있는 관찰자여야 한다는 주장이 늘고 있는 추세다. 이는 식전변과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한재희

 

이 글은 본지에서 개최하는 대중 인문학 강좌인 화요 열린 강좌 중 지난 3월 19일 ‘양자얽힘과 사물의 실재성’을 주제로 열린 김성구 교수 초청 3월 강좌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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