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오래된 책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다 ‘서울책보고’__박예슬

오래된 책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다

‘서울책보고’

 

 

 

책 속에 파묻혀 유년기를 보낸 어느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청년이 되어 1961년 명문 대학인 옥스퍼드를 졸업했지만 대도시 런던에 적응하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접경지대에 자리한 그의 고향은 런던으로부터 4시간이나 떨어져 있고 도로조차 제대로 나지 않은 폐광촌이었다. 그곳에서 청년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탐닉하기로 마음먹고 대책 없는 몽상가가 되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3세기에 지어진 낡은 성을 사들여 그곳을 헌책방으로 탈바꿈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전 세계를 돌며 헌책을 사들였다.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산골에서 그의 행보는 무척이나 기이하게 여겨졌다. ‘무모하고 쓸모없는 외톨이 책벌레’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청년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오로지 전 세계의 책을 이곳에 모은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와줄 거라 믿었다.

그의 믿음은 적중했다. 책 애호가들과 학자들이 이곳에 가면 필요한 도서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고서적을 구하기 위해 작은 산골 마을을 찾아왔다. 청년의 행보를 이상하게 여겼던 마을 주민들도 점차 헌책방에 몰려드는 전 세계 사람들을 보고 스스로 헌책방 운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버려진 집, 낡은 창고, 쓰지 않는 소방서 건물…. 가치 없던 공간이 하나둘씩 전 세계의 지식을 모아놓는 새로운 곳으로 탈바꿈했다.

책에 매혹되었던 이 청년은 자칫 고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고서적 사업을 특유의 위트로 포장했다. 1977년 4월 1일 만우절을 맞아 그는 ‘헤이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스스로 책 마을을 다스리는 ‘왕’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고향을 독립국으로 선언한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복장으로 즉위식까지 거행했으며, 자신이 키우던 말을 총리로 임명했고, 마을 주민들을 요직에 앉혔다. 이 소식이 널리 알려져 이곳은 명실상부하게 지명도 있는 도시가 되었고, 이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나아가 5월 마지막 주부터 6월 첫째 주 사이에 열리는 ‘헤이 축제’는 ‘책’이라는 공통분모로 엮인 세계인의 문화 축제로 자리 잡았다. 헤이온와이(Hay-on-Wye)에서 책을 읽으며 꿈을 꾸던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의 이야기다.

지난 3월 말, 서울 신천유수지 인근에 거대한 창고형 헌책방 ‘서울책보고’가 문을 열었다. 시유지였던 땅을 A사가 물류 창고로 쓰다가 계약이 만료되면서 덩그러니 창고만 남게 되었다. 서울시는 이 공간을 ‘책이 보물이 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다. 청계천과 신촌 일대에 있던 헌책방을 모았고, 명사들에게 책을 기증 받았으며, 개성 있는 독립 출판물을 모아 시민들에게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그야말로 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된 셈이다.

출입구로 들어서자 기하학적 패턴으로 늘어선, 디자인적 요소가 가득한 32개의 서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가 저마다 ‘공씨책방’, ‘동아서점’, ‘대광서림’ 같은 익히 이름을 들어본 신촌과 청계천 일대의 헌책방이 입점해 있었다. 위탁 수수료 10%를 제외한 판매 수익금이 입점 서점으로 돌아간다고. 벽을 따라 다양한 독립 출판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향긋한 커피 향이 기분 좋은 북 카페와 강연 같은 각종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청계천에 연애 시절부터 추억이 있는 헌책방이 있었거든요. 좁은 공간에서 보물을 찾으려고 먼지 덮인 책을 뒤적거리다 아이 엄마를 만났어요. 서울시에 이렇게 멋진 곳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아이랑 아이 엄마랑 꼭 와보고 싶었거든요. 창고형 헌책방이라고 해서 옛날 헌책방처럼 책이 더미로 쌓여 있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외국에 있는 공공 도서관처럼 잘 꾸며서 놀랐습니다. 그때의 낭만이 이렇게 세련되게 바뀌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네요. 좀 멀긴 하지만, 그동안 사는 데 지쳐 책과 잠시 멀어졌었는데 이번 기회를 계기로 온 가족이 책과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주말을 맞아 동작구에서 가족 나들이를 온 송명철 씨가 웃으며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많았다. 아동용 서적 코너에서 그림책 고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김가람 어린이를 만났다.

“엄마랑 같이 왔어요. 원래 책 보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엄마가 마음껏 골라도 된다고 해서 좋아요. 색연필로 그린 것 같은 그림책이 마음에 들어요. 커서 동화 작가가 되고 싶어요.”

가람 어린이처럼 야무지게 자기 취향의 책을 고르는 방문객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은 양의 책을 갑자기 접하다 보니 아찔해졌다는 방문객도 있었다. 책 속에 길이 있다지만 거기까지 가는 수많은 갈래 길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이달의 프로그램이 흥미로웠다. ‘책 처방 프로그램’이라는 신기한 이름을 단 이 프로그램은 1명에서 2명으로 구성된 팀당 25분씩, 감명 깊게 읽은 나의 책 5권을 이야기하면 박연식 작가가 ‘책 진단’과 ‘책 처방’을 해준다.

“사실 처음에는 또 서울 강남권에 혜택이 몰리는 것 같아서 부정적이었어요. 구경이나 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은 거예요.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위주로 책을 전시해 다양한 책을 접할 기회가 적은데 여기서는 이런 책이 있나 싶을 정도로 처음 보는 책이 많더라고요. 평소 또래들에 비해서 책을 많이 읽는 편인데도요. 편협한 시각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고, 독립 출판물 코너에서 제 취향을 많이 발견했어요. 친구들에게 사진 찍어서 보내줬더니 다들 너무 재미있다는 반응이에요. 북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면서 쉬기도 좋은 것 같고, 명소로 자리 잡아서 이런 공간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요?”

에코백 가득 헌책을 구입한 대학생 최우정 씨가 말했다. 매년 성인들이 1년에 읽는 도서 권수가 점점 줄어들고, 오래된 헌책방이 운영난으로 문을 닫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서울책보고는 헤이온와이처럼 헌책을 매개로 한 문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일단은 적어도 책 애호가들에게는 환영받고 있는 모양이다. 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오래된 책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희망이 없지는 않다고 느꼈다. 취재|박예슬(객원 기자)

 

◦ 서울책보고

주소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로1(신천동14)

운영 시간 : 평일 오전 10시 30분~오후 8시 30분

주말 및 공휴일 오전 10시~오후 9시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연휴

홈페이지 : www.seoulbookbo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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