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열반 ① 자유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삼해탈문__틱낫한 스님

자유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삼해탈문

공성(空性), 무상(無相), 무원(無願)

틱낫한 스님

불교 지도자

 

열반은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를 괴롭히는 번뇌의 근원에는 삶과 죽음, 있다 없다, 같다 다르다, 온다 간다 같은 이원적 개념이 있다. 이런 이원적 개념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수행으로 ‘세 개 의 해탈문에 대한 명상’이 있다. 모든 불교 전통에 보편적인 이 삼해탈문은 바로 공 성(空性, emptiness), 무상(無相, signlessness), 무원(無願, aimlessness)이다. 두려움과 고통을 여 의고 자유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관문이 바로 삼해탈문이다.

알아차림과 집중으로 나날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심오한 실재를 보게 되고, 찰나 마다 변화하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두려움 없이, 분노와 절망 없이 지켜볼 수 있게 된 다. 열반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장소가 아니다. 열반은 우리가 이루려 노력하는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다. 열반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공성, 무상, 무원을 명상할 때 이 삼해탈문을 통해 모든 분별적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의 참 본성을 접할 수 있다.

공성과 무아 : 완전한 소통

제1해탈문은 공성이다. 공성은 철학이 아니라 실재를 서술한 것이다. 여기 두 개 의 유리잔이 있다고 하자. 한쪽 잔에는 차가 가득 들어 있고 다른 잔에는 차가 없다. 차가 없는 잔을 우리는 ‘비어 있다’고 서술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없어 비어 있는 가? 그 잔에는 차가 없고 대신 공기가 가득 차 있다. 또한 그 안에 차가 있든 없든 유 리잔 자체는 여전히 존재한다. 공성, 즉 비어 있음은 무(없음)가 아니다. 비어 있음과 무(無)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비어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기 있어야 한다.

의식이 늘 어떤 대상을 의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성·비어 있음은 항상 어떤 대상이 비어 있음을 말한다. 아름다운 국화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한 송이 국화에 우주 만물이 존재함을 본다. 바로 구름, 햇빛, 토양, 무기질, 공간, 시간 등이 들어 있 다. 꽃은 혼자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유리잔이나 꽃에도 없고, 나의 안에도 나의 밖을 둘러싼 모든 것에도 없고, 나 자신에게도 한 가지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분리되고 독자적인 존재’가 없다는(비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불교의 가르침 중 공성을 가장 간단히 서술한 구절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 다’이다. 한 송이 꽃은 홀로 존재할 수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연하여 존재한다, 의존 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꽃 이 무엇인지 서술할 수 있는 한마디는 ‘자기 자신이 비어 있음’이다.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든 것에 공성의 성품이 있음을 알게 된다. 때로 공 성의 성품을 무아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아는 우리가 존 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차가 없는 유리잔이 여전히 거기 있는 것처럼, 우리도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분리되고 독자적인 자아가 없을 뿐이다.

하나의 행동이나 움직임을 볼 때 거기에는 독자적인 행위자가 있다고 우리는 믿 는다. 바람이 불어온다, 하지만 바람을 보내주는 존재는 없다. 다만 바람이 있을 뿐이고, 불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바람이 아니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 생각과 분리된 생각하는 자가 있다고 믿을 수 있 다. 생각 밖에서 따로 존재하는 생각하는 자는 없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우 리가 바로 그 생각이다. 우리와 우리의 생각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무언가를 말할 때 그 말이 바로 우리다. 그 말 밖에 따로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다. 무언가를 행할 때 그 행동이 바로 우리다. 그 행동 밖에 따로 행위자는 없다.

법당의 부처님 앞에서 절을 올릴 때 염송하는 게송이 한 수 있다.

 

절을 올리는 자와

절을 받는 자는

공히 본성이 비어 있네

하여 둘 사이의 소통은

그지없이 완전하네

 

부처는 부처가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

부처는 오직 부처가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내가 아닌 요소들로 이루 어져 있듯이 말이다. 내게서 내가 아닌 요소들을, 즉 태양, 먼지, 쓰레기, 무기질, 물, 나의 부모, 나의 사회 등을 다 제거해버리고 나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 다. 부처에게서 부처가 아닌 요소들을 다 빼버리면 부처가 남아 있지 않다. 절을 하 는 사람과 절을 받는 사람이 공히 비어 있음을 알 때 둘 사이의 소통은 완벽하다. 이 것이 명상이다.

여기 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세포 하나하나마다 우리가 온전히 현존함을 볼 수 있다. 그 아이가 어떻게 어떤 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가? 아마도 그 아이에게 분리된 자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아이 의 부모와 조상이 아이 안에 있다.

주변 사람들을 분노와 집착으로 보지 않고 이런 이해의 바탕에서 볼 수 있다면 우 리는 공성에 대한 명상의 결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무상의 멋진 여행

제2해탈문은 무상(無相)이다. 상이란 어떤 것의 일어남, 즉 그 형태를 알려준다. 우 리는 상에 근거해 사물을 인식하지만 그런 외적 형태에 자주 속곤 한다. 부처님은 말 했다. “상이 있는 곳에 기만이 있다.”

예를 들면 하늘을 볼 때 어떤 구름이 보인다. 하지만 구름은 비가 되고, 안개와 눈 이 된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구름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만약 그 구름에 정을 붙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오, 사랑하는 구름 아, 너는 지금 어디 있니? 보고 싶다. 너는 유에서 무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버렸구 나. 나는 더 이상 너를 볼 수가 없구나.” 아마도 한 조각 구름에는 이런 감정을 느끼 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는 분명 이런 느낌이 든다. 이제 고 인은 유에서 무로, 존재에서 비존재로 건너간 것 같다.

하지만 실은 우리의 그 구름은 여전히 거기 있다. 구름이 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 기 때문이다. 구름은 눈이나 우박 혹은 비가 되었을 수는 있지만 무가 되지는 않았 다. 유에서 무로 가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도 여전히 어딘가에 있다. 무상의 지혜가 있다면 그가 취한 새로운 형태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알아볼 수 있다.

 

형태가 변할 뿐 사라지진 않는다

내가 주전자를 들고 여기 빈 유리잔에 차를 따라놓았다고 하자. 그 차를 마시고 나 면 차의 형태는 변화된다. 만약 그 차를 마신 후 내가 강의를 하면, 나의 강의 안에 약간의 차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차는 단지 주전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 다. 차는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 여정 동안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한다.

우리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몸 생각 느낌만으로 구성된 게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은 우리 몸이 분해되고 사라진 후에도 계속된다. 우리 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형태는 변하지만 잃어 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원의 행복

제3해탈문은 무원(aimlessness)이다. 무원은 그 무엇도 내가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 내 앞에 놓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 밖에 있지 않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되고 싶은 그것이다. 무원에 집중할 때 미래에 달성할 어떤 것, 또는 미 래에 이를 어떤 장소에 대한 열망과 갈망을 놓아버릴 수 있다.

우리는 삶을 살지 않고 내내 뛰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행복, 사랑, 로맨스, 성공, 깨 달음을 향해 계속 질주하고 있을 수도 있다. 무원에 집중한다는 것은 추구해야 할 대 상, 즉 목표를 제거하는 것이다.

 

열반은 이미 내 안에, 모든 것 안에

열반을 향해 뛰고 있다면 열반은 이미 우리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있음을 알 아야 한다. 부처를 향해 뛰고 있다면 부처는 이미 우리 안에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 다.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면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통찰이 있을 때 질주를 멈추게 된다. 달리기를 멈추어야만 그토록 갈망했던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한 조각 파도는 밖으로 나가 물을 찾을 필요가 없다. 물 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삼나무는 소나무나 낙엽송, 심지어 새가 되고자 하는 욕 망이 없다. 한 그루 삼나무 속에 우주는 있는 그대로 현현하고 있다. 우리는 우주의 현현이다. 우리는 그토록 멋진 존재다.

우리가 평소 배운 것은 목적이 없으면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태어났으니 죽기 전에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 고 생각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직선을 그린다고 가정하자. 이 선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그중 한 점을 골라 B 지점이라 하고 그것을 출생(태어남)이라 하자. 이 순 간 누군가가 태어났다. 아기에게 출생증명서를 만들어주며 우리는 그 아기가 B 지점 에서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아기는 이미 있었다. 심지어 임신 을 하기 전에도 아기의 씨앗은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 B 지점은 그저 연속의 한 지점 일 뿐, 시작이라는 것은 없다.

 

가고 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존재

우리는 또 우리의 존재가 끝나는 순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그린 그 상상 의 시간 선 위에서 그 지점을 D 지점, 죽음이라 하자. 우리는 출생과 동시에 우리가 무에서 유로 왔으며, 죽음의 지점에서 다시 유에서 무로 간다고 생각한다. 유무에 대 한 개념을 깊이 보면, 그래서 만물의 공성과 무상을 알아차리면, 우리는 만물에 가고 옴이 없는 실재를 접하게 된다.

삼해탈문을 걸어서 통과할 때 우리는 모든 개념을 소멸시킨다. 더 이상 두려울 이 유가 없다. 파도가 물속에서 그저 쉬는 법을 알면 그 파도는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 도 그저 즐길 뿐이다. 파도는 유무가 두렵지 않다. 오고 감이 두렵지 않다. 자기 안에 서 바다를 접할 수 있다. 삼해탈문은 우리가 파도와 다르지 않음을 상기시켜준다. 우 리는 비어 있고 형태가 없으며 내면에 내재된 궁극을 언제라도 접할 수 있다 .

 

번역, 정리|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이 리뷰는 『라이언스 로어(Lion’s Roor)』 2016년 가을호(2016.10.14)에 실린 틱낫한 스님의 글을 요약, 번역한 것이다.

 

틱낫한 스님(Thich Nhat Hanh) 베트남 출신의 스님이며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운동가, 프랑스 보르도에 수행 공동체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를 세우고 명상 공동체 활동을 이끌었으며, 2018년 11월 베트남 으로 영구 귀국했다. 1995년과 2003년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화』, 『틱낫한 스님의 마음 정원 가꾸기』,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예수』, 『힘』, 『화해』, 『오늘도 두려 움없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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