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열반 ② 깨달음과 열반은 같은가, 다른가?__쿠살라 스님

깨달음과 열반은

같은가, 다른가?

쿠살라 스님

UrbanDharma.org 설립자

 

1970년대 말 불교 관련 서적을 처음으로 읽기 시작할 무렵 나는 ‘깨달음’과 ‘열반’ 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승불교든 남방불교든 이 두 개의 단어를 교환 가 능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쓴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 각각의 의미는 달라지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일부 선불교나 대승불교 문서를 보면 사람들은 열반을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왜 깨달음은 추구하면서 열반은 원치 않는 것일까? 만약 깨달음과 열반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일까?

먼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있는 깨달음과 열반의 정의를 내리는 일 이었다. 고심 끝에 내린 나의 정의는 ‘열반’은 ‘고통의 소멸’이고 깨달음은 ‘공성의 지 혜’라는 것이었다.

 

열반(Nirvana)– 고통의 소멸

이생에서도 그리고 모든 미래 생에서도

부처님은 한때 말씀했다. “나는 불사(不死)로 가는 길을 가르치노라.” 불자라면 알 고 있겠지만 부처님의 이 말씀은 인간이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부처님 은 단지 끝없이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가 열반에 들면 소멸된다는 의미였 다. 나는 존재하며 동시에 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열반에 거하게 될 것이다. (*열반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4성제 중 세 번째인 멸제(滅諦)에 해당된다. 열반에서는 고통과 고통을 야기하는 욕망이 끊어짐과 동시에 생사윤회도 끝이 난다. 부처님은 때로 열반을 다른 단어로 말씀하셨는데 바 로 ‘태어나지 않은(unborn)’ 또는 ‘조건 지어지지 않은(unconditioned)’ 등이었다. 이는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 가 경험하는 현상계에 대비되는 상태를 말한다.)

 

깨달음(Enlightenment) – 공성의 지혜

모든 현상에 독자적 존재가 없음을 직접 체험하는 데서 얻어지는 지혜

공성은 명상 수행 등을 통한 개인적 체험으로 만물이 서로 연하여 일어나고 상호 의존적이며, 그 무엇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서로 연 결되어 있고 조건 지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만물은 다른 것들 덕분에 존재한다.

나, 쿠살라 비구가 여기 존재하게 된 것은 부모가 욕망을 일으켰고 나에게는 업이 있기 때문이다. 몇 십 년 전 이 두 개의 조건이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합쳐지지 않았 다면 나는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음식, 집, 의복, 약품’이 필요하다고 부처님 께서 말씀했다. 이 네 가지는 내가 생존하기 위한 필수품이다.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 도 어떤 조건들이 필요했고, 또 이렇게 살아남기 위해서도 다른 조건들이 필요했다.

자 이제 이야기를 전부 다 말해보자. 어떤 조건들이 나를 이 세상에 데려왔고, 다 른 조건들이 나를 여기에 존재하게 하고 있으며, 이 모든 필요조건들이 끝나게 되면내 생명 역시 끝나게 된다. 나는 조건들에서 독립되어 살지 않는다.

깨달음은 조건 지어지고 상호 연결된 실재를 직접 체험한 결과이다.

깨달음은 단순한 지적 이해를 초월한다. 깨달음은 직관적인 앎이다. 깨달음이 일 어나면 개인의 몸과 마음은 완전한 탈바꿈을 한다.

공성에 관해 설한 경전 중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반야심경』이다.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불자가 깨달음, 즉 공성의 지혜를 깨달을 때 ‘대자비’가 가슴에서 우러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볼 수가 없다. 이제 그는 진정 보고 느낄 수 있고, 진정 알고 이해할 수 있다. 아프거나 배고픈 사람을 보면 그 의 일부가 아프고, 배가 고프다. 집 없는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그의 한쪽 이 집이 없고, 죽어가고 있다. 그는 더 이상 남들과 분리되어 있다고도 안전하다고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보고, 모든 고통받는 사람 하나하나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마치 바다가 모든 파도 하나하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실은 모든 불교 수행자들이 하는 선택으로써, 단지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이런 변화와 탈바꿈이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직접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 을 ‘보살의 길(보살도)’이라 부른다. (*보살은 깨달은 존재이다. 성불이 보장되어 있지만 열반으로의 진입을 늦추고, 대신 남들이 먼저 성불하도록 돕는 존재들이다. 부처님도 여러 전생에서 보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세상과 다시 연결된다 해서 보살의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보살은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지 만, 다른 존재의 고통이 끝나도록 도움을 줄 때마다 자신의 고통 역시 완화된다. 배 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줄 때마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힐 때마다, 누군가를 위로 할 때마다 보살의 고통이 탈바꿈된다.

보살의 길은 매우 어렵다. 보살도에는 운동 경기의 쉬는 시간 같은 것도 없고, 여 름휴가도 없다. 보살은 어디로 갈까? 아무도 고통받지 않는 곳은 어디인가?

남방불교 전통에서는 부처님이 무수한 전생에서 보살이었고, 열반에 드시기 이전 에도 여러 번 깨달음을 성취하신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는 초기 불교 문헌인 『본생담』에 들어 있다.

대승불교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열반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먼저 보살이 되고, 그 다음 부처가 되는 것이 목표이다. 보살이 자신의 고통을 끝내는 것은 부처가 되고 나 서이지 부처가 되기 전이 아니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별로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라. 하지만 부처님이 행하신 대로 행하라.

남방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열반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부처님의 말씀 인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수행자는 아라한이 될 수 있다. (*아라한은 열반을 성취한 사람으 로 자신의 고통과 윤회를 소멸한 사람이다.) 이미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에 다다른 아라한은 자신의 고통을 소멸했을 뿐 아니라 부처의 ‘자비와 지혜’를 얻어 다른 존재들이 고통 을 소멸하도록 도울 수 있다.

보살과 마찬가지로 아라한의 삶 역시 고통의 소멸에 헌신한다. 한 사람이라도 고 통을 받는 한 쉼은 없다. 대중에게 봉사하는 일 말고는 갈 곳도 할 일도 없다. 보살과 아라한의 행동은 자아나 에고가 지휘하는 것이 아닌 자비와 지혜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다 고려해볼 때 보살의 길과 아라한의 길은 동일한가? 그렇지 않다. 두 길은 달라 보이지만 세상의 고통을 끝내거나 완화한다는 면에서는 같다.

깨달음은 열반과 같은가? 나는 이 두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보살은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 있고, 미래의 아라한은 열반을 향해 정진하고 있다 .

남방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열반으로, 부처님의 말씀인 가르침을 행하고 고통의 소멸을 향해 아라한의 길을 가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깨달음으로, 부처님이 행하신 것을 행하고, ‘공성의 지 혜’를 향해 보살의 길을 가는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마지막 한마디를 하고자 한다. 나는 깨달음과 열반이 어떻게 다 를 수 있는지를 독자와 나누려 했다.

종국에는 불교의 궁극적 실재에서는 보살의 길과 아라한의 길 모두 고통의 소멸 로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보살의 삶을 산 부처님의 많은 전생이 성불로 끝났듯이 불 교의 모든 길은 궁극에는 열반으로 끝난다.

깨달음과 열반에 대한 나의 설명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 더 명료하고 지혜롭게 읽어가도록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보살, 아라한, 깨달음, 열반, 공성의 지혜, 고통의 소멸, 선택은 각자에게 달렸다 .

 

번역, 정리|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이 리뷰는 쿠살라 스님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www.UrbanDharma.org)에 실린 글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이 사 이트는 2001년 설립되었으며 불교의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한다.

쿠살라 스님(Ven. Kusala Bhikshu) 베트남 전통의 선불교를 수행하는 미국인 스님. 1979년 선에 관심을 갖고 수행을 시작했다. UrbanDharma.org의 설립자이자 웹 마스터이다. 지금은 로스앤젤레스의 국제불교명상센터에서 수행 지도를 하 고 있다. 쿠살라 스님은 2008년부터 페이스북을 이용했는데 2019년 1월 팔로어 수가 100만 명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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