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8 공(空)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__홍창성

(空)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空)의 실체화(實體化)

만물은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 실체(實體)로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스스로의 본성, 즉 자성(自性)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사물이 ‘스스로의 내적 본성(intrinsic nature)을 가질 수 없음’, 즉 ‘자성을 결여함’이라는 의미로 ‘공(空)’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사물이 공(空)하다’는 말은 사물이 자성을 결여한 채로 존재하는 양상(mode)에 대한 표현 또는 기술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승(大乘)의 전통은 이렇게 존재의 양상에 대한 표현에 불과한 공을 마치 신비한 본성을 가지고 사물 안에 실재(實在)하는 어떤 참된 존재로 오해한 기록으로 점철되어왔다.

비유로 이 문제를 설명해보겠다. 어떤 사람의 얼굴이 역삼각형 모습이라면, 이런 모습이 그 사람 얼굴이 존재하는 양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사람 얼굴에 역삼각형이 실재한다거나 이 역삼각형이 그 얼굴의 참된 본성이라고 간주하지는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양상을 실체로 잘못 본 실체화(實體化)의 오류(fallacy of reification/hypostatization)를 범하는 것이다. 이는 논리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경고해온 금기(禁忌)이다. 마찬가지로, 사물이 자성을 결여한 채 존재한다는 존재 양상에 대한 표현인 공(空)을 사물 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실재 또는 실체로 본다면 이것은 정말로 심각한 오류이다. 그런데 대승의 역사에서 이런 오류를 범해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 당황스럽다.

불교계에서 흔한 ‘진(眞)’ 자나 ‘참’ 자가 들어간 말은 모두 공을 실체화한 오류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진공(眞空)’이라는 용어가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은 위의 논의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진아(眞我), 진여(眞如), 참나, 참마음 등 ‘진’ 자와 ‘참’ 자가 붙은 불교 용어는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원래 뭔가 자신 없는 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에 안 써도 될 ‘진’ 자와 ‘참’ 자를 자꾸 쓰며 거기에 매달리게 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면 불성(佛性)과 여래장(如來藏) 사상 또한 같은 실체화의 오류를 범했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게 된다. 일본의 비판불교론자들이 대승의 여러 전통이 은연중(隱然中) 브라만이나 아트만과 같은 실체를 ‘진공’이나 ‘참나’와 같은 이름으로 도입해 불교를 힌두교처럼 기체론(基體論, dhatuvada)으로 변질시켰다는 논점을 제기해왔는데, 이에 대해 대승 전통에서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空)을 그 원래의 형용사 용도로 돌려 ‘~이 공(空)하다’는 표현으로, 즉 ‘~이 자성(自性)을 결여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아무런 철학적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굳이 명사화(名詞化)해 ‘공(空)’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놓고서는 존재 세계에 이것에 해당되는 실체가 존재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명백히 실체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空)의 패러독스

나가르주나는 그의 『근본중송』에서 ‘공(空)도 공(空)하다’라고 말하며 공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듯한 말을 써놓았다. 아마도 대승 초기에 공 사상이 무척 유행했나 보다. 사람들이 얼마나 공을 찾았으면 ‘공병(空病)’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후세의 해설가 찬드라키르티도 위장약 과용의 예를 들며 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경계했다. 어떤 이가 위장병으로 고생하다가 한 동안 약을 복용해 병이 다 나았다. 그런데 완치된 다음에도 그치지 않고 위장약을 계속 먹는다면 이 사람은 그 약 때문에 새로 병을 얻게 될 것이다. 위장약은 병을 치료하는 만큼만 쓰고 끊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공의 가르침도 사물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본질주의적 주장을 반박해 그 잘못된 점을 고쳐주는 일종의 해독제(antidote) 용도로 써야 한다. 그런데 독이 제거된 다음에도 이 해독제를 계속 복용하면 해독제 자체가 새로 독이 되고 말 것이다. 공병이나 공의 실체화의 오류는 이렇게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공 자체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공(空)도 공(空)하다’고 말했겠지만, 이 문장을 엄밀히 분석해보면 우리가 이런 표현은 피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음과 같이 ‘공의 패러독스’라고 이름 붙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은 그 스스로 공하거나 공하지 않다.

1) 공이 공하다면, 자성을 결여함이 스스로 자성을 결여한다는 것이므로 자성을 결여하지 않는다, 즉 공하지 않다.

2) 공이 공하지 않다면, 자성을 결여함이 스스로 자성을 결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자성이 있다는 것이므로 자성을 결여한다, 즉 공하다.

그래서 공이 공하면 공하지 않고, 공하지 않으면 공하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공의 패러독스다. 철학에서는 어떤 가르침이 이렇게 패러독스를 도출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우리가 공과 관련해 이런 문제를 피하려면 공의 관점을 공 자체에 적용하면 안 된다. 나가르주나는 바른 수행을 위해서는 공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는 의미에서 ‘공도 공하다’고 했겠지만, 그의 표현은 이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철학적으로는 피해야 할 문장이었다. 영미권(英美圈)에서는 20세기 초반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띤 철학적 논의가 있었다.1) 우리는 공을 실체화해서도 안 되지만 공에 대해 공의 관점을 적용해도 안 된다. 공의 가르침은 그저 자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러그러(如如)한 진리로 받아들여 본질주의에 대한 해독제로서만 써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멈춰야 한다. 생각을 멈춰야 할 때는 멈출 줄 알아야 지혜롭다. 공에 대한 생각도 예외가 아니다.

비유비무(非有非無)

만물이 조건에 의해 연기(緣起)하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實體)로 실재(實在)할 수 없어서 내적 본성, 즉 자성(自性)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공(空)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아트만이나 브라만처럼 영구불변 불멸의 본성을 가지고 실체로서 상주

1)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표적인 논의는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제시한 유형 이론(type theory)이다. 필자는 『월간 불광』 2018년 12월호에 발표한 「연기의 패러독스」에서 이와 관련해 자세한 논의를 전개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그 논증을 다시 소개하지는 않기로 한다.

 

(常住)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非有). 이 가르침은 불교를 기독교, 회교, 그리고 힌두교와 같은 다른 세계 종교와 구별해주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다. 영원불변 불멸하는 신(神)과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하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비교해볼 때, (신과 영혼을 포함해) 만물의 연기(緣起)와 공(空)을 주장하는 불교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도 더욱더, 위에서도 논의한 바와 같이, 공을 아트만과 같이 항구 불변의 실체나 기체(基體)로 생각하는 대승 전통 일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불교는 상주론(常住論)이 아니다.

한편 공(空)의 가르침은 서양 철학사상 수천 년을 풍미했던 보편자(普遍者, universal) 실재론(實在論, realism)이 아니라 보다 현대적인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을 지지해준다. 보편자 실재론이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보여주듯이 완벽한 삼각형, 완전무결한 아름다움과 정의(正義), 절대적인 크기와 같이 모든 사물의 원형으로서의 이상적인 보편자들이 독립적인 실체로서 자성(自性)을 가지고 신들이 사는 세계 또는 어떤 완벽한 형이상학적 공간에 영원불변 불멸하며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보편자들은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도 또 자성을 결여하지도 않기 때문에 연기(緣起)와 공(空)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불교에서는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에 반해 유명론은 이런 보편자들이 실재하지 않고 우리가 단지 그런 것들의 이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견해이다. 그래서 우리가 연기와 공의 논점을 받아들인다면 실재론을 배척하고 유명론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불교의 보편자 유명론은 인도에서 기원후 5세기에서 8세기까지 디그나가와 다르마키르티가 주도한 인명론(因明論)에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도 제시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이후 영어권(英語圈)의 현대 분석철학에서는 보편자 유명론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왔다.

사물이 아트만과 같은 자성을 가지고 상주하지는 않지만(非有), 그렇다고 해서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非無) 대승의 공(空)의 가르침이다. 한자(漢字) 문화권에서 불교의 공(空)과 무(無)를 마치 같은 개념인 것처럼 두 단어를 섞어 쓰는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그토록 중요한 공(空)의 개념을 뚜렷한 비판적 검토도 없이 무(無)와 섞어 쓰는 것은 철학적으로 대단히 무책임하다. 공(空)은 결코 무(無)가 아니다. 만약 공(空)의 가르침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라고 오해한다면 이는 공(空) 사상을 단멸론(斷滅論)으로 본다는 것인데, 단멸론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옳으려면 최소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이 옳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위에서 예로 든 러셀의 유형 이론에 따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그 주장 자체에 적용하는 것을 피한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회의하는 한 그 회의하는 의식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데카르트가 이미 그의 방법론적 회의로 논증했듯이,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회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멸론은 결코 옳을 수 없는 주장이다. 이런 이론적인 이유를 떠나서도, 단멸론은 우리 일상의 경험과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뜨자마자 현란한 파노라마처럼 우리 의식에 펼쳐지는 이 경험 세계가 전적으로 무(無)의 세계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평생 깨어 있는 모든 순간 우리 의식에 펼쳐지는 이 경험 세계를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사는 삶은 결코 건강할 수도 또 성공적일 수도 없다.

묘유(妙有)

만물은 상주(常住)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아서 묘(妙)하게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 ‘비유비무묘유(非有非無妙有)’가 있다. 지난 천여 년 동안 공(空)을 논하는 동아시아 대승의 전통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렸을 법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 문장을 철학적으로 분석해보면 그토록 오랫동안 애송되어온 이 여섯 글자로 된 문장에 여러 논리적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2) 특히 이 문장은 사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한다는 설명 없이 단지 묘(妙)하게 존재한다고만 말하고 있어서 만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문제를 서양 철학사에서의 예를 살펴보며 논의해보겠다.

17세기에 서양 근대 철학을 주도한 데카르트와 존 로크는 모든 물체가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로크는 이런 작은 물체가 가진 모양, 단단함, 속도, 크기 등의 객관적인 물리적 속성들에 의해 우리의 감각 내용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둥근 입자들로 되어 있는 음식이 혀에 닿으면 우리가 단맛을 느끼고, 정육면체 입자들에는 쓴맛, 그리고 세모꼴 입자들에는 신맛을 느낀다는 식이다. 맛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는 물체의 색깔도 눈에 들어오는 작은 입자들의 모양이나 속도 등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소리나 냄새 그리고 촉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감각 경험의 속성과 별 차이가 없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감(五感)에 나타나는 세계의 모습은 그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우

2) 필자가 2016년 초반 깨달음 논쟁이 한창일 당시 인터넷 매체 『미디어붓다』에 발표한 「비유비무묘유의 서양 철학적 분석」에 이와 관련된 논의가 있다.

 

색성향미촉으로 구성된 현상이 존재하는 방식이 실로 묘(妙)하다.

그것들은 이 세계에 실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의식 속에는 존재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실재(實在)하는 존재(有)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非)존재(無)도 아니다.

 

리는 눈으로 입자들을 하나하나 볼 수조차 없다. 우리 의식에 떠오르는 것들은 단지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정보 내용을 의식이 나름대로 해석해서 만들어놓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 구성하는 현상(現象, phenomena)일 뿐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인식 주관과 세계가 상호작용하면서 생겨난 결과일 뿐, 세계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고 이해되었다. 이런 색성향미촉으로 구성된 현상이 존재하는 방식이 실로 묘(妙)하다. 그것들은 이 세계에 실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의식 속에는 존재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실재(實在)하는 존재(有)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非)존재(無)도 아니다(비유비무 非有非無).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채 묘(妙)하게 존재한다(묘유 妙有). 이와 같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색성향미촉으로 구성되어 드러나는 현상(現象)의 세계이다.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환(幻)의 세계이다. 3)

그런데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고 보는 불교에서는 데카르트와 로크가 자연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본 작은 입자들마저도 자성(自性)을 가지지 못해 공(空)하다고 판단한다. 내가 지난 에세이들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우리의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소립자들도 연기(緣起)의 그물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성을 가진 실체(實體)로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입자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입자와 그 속성은 다른 입자들 및 속성들과 서로 맺는 연기 관계 아래서 자성을 결여한 채 묘(妙)하게 존재한다 – 말하자면, 공(空)한 현상(現象)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입자들의 세계에서도 비유비무묘유(非有非無妙有)의 진리가 성립한다. 한편 이런 작은 입자들이 부분을 이루며 모여서 구성되는 집합체도 묘(妙)하게 존재한다. 집합체 또는 전체는 부분들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자들과 입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모든 물체는 비유비무묘유(非有非無妙有)인 것이다.4)

(空)과 쓸모 있는 허구(useful fiction)

나는 위에서 우리의 경험 세계가 감각 대상과 감각기관 그리고 의식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생겨난 현상(現象)이나 환(幻)의 세계로 이해된다고 논의했다. 연기(緣起)의 일종인 이런 상호작용의 결과물은 자성(自性)을 결여해 공(空)하다. 그래서 경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리 인식의 측면에서 볼 때 필연적으로 일종의 허구(fiction)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한편 우리의 감각이 접근할 수 없는 미시 세계의 소립자들도 각각 연기 관계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 공(空)한 존재자들이다. 유명론(唯名論)의 현대적 버전인 과학철학에서의 도구주의(instrumentalism)가 말해주듯이, 예를 들어 전자(electron)는 우리의 이론적 필요에 의해 그 존재가 도구적으로 상정된 이론적 구성물(theoretical construct)일 뿐이다. 이러한 허구적 구성물들이 모여서 이루

 

3) 이 단락에서의 설명을 ‘비유비무묘유(非有非無妙有)에 대한 인식론적 논증’으로 불러봄직하다.

4) 이 단락에서의 설명은 ‘비유비무묘유(非有非無妙有)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이다.

 

어진 집합체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들인데, 그것들이 자성을 결여해 공(空)한 허구적 존재자라는 점은 명백하겠다. 굳이 『밀린다왕문경』과 나가르주나의 『근본중송』에서 전개된 집합체의 허구성을 보이기 위한 논증을 소개하지 않아도 이 점은 직관적으로 분명하다. 그래서 삼라만상이 모두 자성을 결여해 공(空)한 허구이다.

우리의 경험 세계는 본체(本體, noumena) 없이 단지 현상(現象, phenomena)으로만 존재하는 환(幻)의 세계요 허구의 세계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이런 허구가 우리 일상의 생활을 위해서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간주해도 무리가 없고 오히려 쓸모가 있다는 점이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가 자성(自性)을 결여해 공(空)하기 때문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라면 이렇게 안심하고 앉아 글을 쓰고 있지도 못할 것이다. 이 의자가 연기하기 때문에 공하고 끊임없이 생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 허구적 존재자가 한동안 이 모양 이 기능을 유지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것을 의자로 생각하고 잘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거의 언제나 옳다고 판명된다.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도 수많은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집합체로서 하나의 허구(fiction)이지만, 그래도 대단히 유용한 허구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당분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물이 이렇듯 쓸모 있는 허구들이다. 말하자면 우리 세계는 쓸모 있는 허구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자들로 다가온다. 이렇게 허구로 존재하는 모습을 불교에서는 환(幻)이라고 하는데, 철학에서는 좀 더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현상(現象)으로 분류한다. 우리의 세계가 환 또는 현상으로 묘하게 존재해서 좋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단행본 『(가제)불교철학강의』가 출판 예정이고, Buddhism for Thinkers(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와 유선경 교수와의 공저 『불교와 생명과학』을 준비 중이며, 불교의 연기(緣起)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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