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공지능|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역사 (1)__석봉래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역사 (1)

논리적 사고

석봉래

미국 앨버니아 대학교 니액 연구 교수

 

 

 

논리적 사고의 기계화

인공지능은 컴퓨터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다양화시켜 인간의 자연 지능에 필적하는 기능을 구현하는 체계를 말한다. 인공지능을 이해하기 위해 컴퓨터가 발전해온 역사를 알아보자. 컴퓨터(computer)라는 말은 1613년부터 영어 사용자들 사이에 쓰였다는 보고가 있다. 이 단어는 계산 기사 혹은 전문 계산 요원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숫자 계산을 담당한 사람의 역할을 기계가 담당하게 된 것은 수학적 계산의 과정이 기계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현대적 디지털 컴퓨터는 단순히 숫자만을 계산하는 기계는 아니다. 컴퓨터는 숫자의 계산을 넘어서서 개념과 사고를 계산하는 기계가 되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는(그것이 숫자이든 개념을 표현하는 언어이든) 의미를 담고 있는 신호를 처리하는 정보처리 체계인데 이것은 숫자를 계산하는 것처럼 개념과 사고도 계산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한 생각에서 일정한 원칙을 통해 다른 생각이 나타난다는 점을 발견한 것은 컴퓨터라는 말이 계산의 영역에서 추리나 정보처리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컴퓨터라는 말의 의미의 변화에서 우리는 숫자 계산과 생각의 연산이 모두 논리적 원리에 기반하고 이 원리의 발견을 통해 사고와 정보처리의 기계화가 가능하게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컴퓨터가 단순한 계산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공지능과 같이 생각하는 기계가 되려고 하는 것도 바로 올바른 계산과 사고를 올바로 인도하는 원칙을 가정하고 발견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다. 즉 계산을 기계화할 수 있다면 생각도 기계화할 수 있다는 가정은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숫자(1, 2, 3, ½, ¼ …) ⇨ 계산 과정( %, #, ≤, ∞, +, =) ⇨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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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 과정의 존재(기계화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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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크다, 작다) ⇨ 생각 과정(참이다, 거짓이다) ⇨ 결과

 

계산과 사고의 근본 원리를 발견하는 데는 수천 년에 걸친 지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형식논리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논리적 사고의 과정에는 (즉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을 올바로 이끌어내는 과정에는) 일정한 틀(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래서 형식논리(Formal Logic)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생각은 나중에 컴퓨터의 정보처리가 일정한 틀(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된다. 그래서 컴퓨터 프로그램과 철학, 특별히 논리학은 근본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계산과 사고에 공통적인 기반이 형식적 틀이라는 점이다. 형식적 틀이라는 뜻은 계산과 사고의 기본적인 원칙이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추상적 형태(form, template)와 관련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사과 2개와 사과 3개를 더하면 사과 5개가 된다. 그런데 귤 2개와 귤 3개를 더하면 귤 5개가 된다. ‘2 + 3 = 5’는 그것이 사과든 귤이든 상관없이 참인 계산이 된다. 즉 숫자를 이용하는 수학적 계산은 그 숫자의 구체적 상황과 관련 없이(사과이든 귤이든 상관없이) 가능한 것이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논리적 생각의 형식적 틀은 생각의 구체적 내용과 별도로 발견될 수 있고 사용될 수 있다. 아래의 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논리적 사고의 틀인 ‘A는 B보다 크다’, ‘B는 C보다 크다’, 따라서 ‘A는 C보다 크다’는 철수, 창수, 영수 혹은 미국, 독일, 스페인 인구라는 구체적인 내용과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증명되고 사용될 수 있다.

 

계산의 형식적 틀(2 + 3 = 5)

사과(2) + 사과(3) = 사과(5)

귤(2) + 귤(3) = 귤(5)

생각의 형식적 틀(A > B, B > C → A > C)

철수는 창수보다 크다. 창수는 영수보다 크다. 그렇다면 철수는 영수보다 크다.

미국 인구는 독일 인구보다 많다. 독일 인구는 스페인 인구보다 많다.

따라서 미국 인구는 스페인의 인구보다 많다.

 

이런 계산과 사고의 형식적 틀을 발견하고 이 형식성이 가지는 의미를 알게 되면 이들을 기계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도 알 수 있게 된다. 무슨 숫자가 나오더라도 계산의 형식만 따르면 올바른 계산이 가능하듯이 무슨 생각이 들더라고 사고의 형식을 따르면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숫자 계산과 사고의 추론은 바로 이 형식적 틀의 발견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틀은 구체적 내용에 관련된 틀이 아니라 형식적 틀이기 때문에 계산이나 생각의 구체적인 내용을 굳이 고려하지 않고도 기계식 기어의 위치나 전자 스위치의 on/off 같은 방식으로 자동화나 기계화가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형식적 틀에 대한 이해가 계산기와 컴퓨터의 발달을 자극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컴퓨터는 이러한 사고의 다양한 형식적 틀을 전기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사용해 전기 신호로 변환된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인 것이다. 이때 사고의 형식적 틀은 프로그램으로 저장되어 사용된다. 즉 논리적 사고의 과정은 프로그램이라는 형식으로 컴퓨터에서 이용되는 것이다. 논리적 사고의 틀과 컴퓨터 프로그램은 아래 예를 비교하면 그 유사성이 쉽게 드러난다.

 

논리적 추론의 틀(Modus Ponens)                                            컴퓨터 프로그램

만일 A가 참이면 B도 참이다.(A → B)                                          만일 P가 발생하면 Q를 하라.

A가 참이다.(A)                                                                          P가 입력되었다.

그렇다면 B는 참이다.(B)                                                            Q를 하라.

 

컴퓨터는 따라서 이러한 계산과 생각의 형식적 틀을 자동적으로 실행하는 기계이다. 컴퓨터가 존재하기 이전에 이러한 기능을 담당한 것은 인간의 두뇌였다. 그러나 컴퓨터가 발전하면서 인간 두뇌의 지능을 기계적으로 자동화할 인공지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은 컴퓨터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고 컴퓨터의 발전은 계산과 사고의 형식적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생각에 대한 이러한 형식적 접근법은 그러나 한 가지 제약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지능은 형식적 틀로 설명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발전을 위해서는 비형식적 사고(일반적으로 의식이나 각성이라고 하는 영역)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 지점에서 불교와 인공지능이 만나 나누는 대화는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을 향한 마음의 종교이다. 이 깨달음의 마음은 올바른 생각과 의식의 변화를 포함한다. 인공지능은 인간 마음의 지적 능력에 필적하는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것은 정확한 판단과 논리적 사고를 기계적으로 실현하려는 입장이다. 불교의 마음과 인공지능의 마음이 가는 길은 같은 길인가? 논리적 사고의 과정을 기계적으로 재현한 컴퓨터와 그 정보처리 능력을 최적화하는 인공지능을 불교의 깨달음과 지혜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면 어떤 모습이 나타날까? 불교의 깨달음은 논리적 사고의 형식화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가?

논리적 사고와 불교

논리적인 사고에 있어서 생각의 형식적 틀이 가지는 중요성에 주목하고 그 구체적 사례를 발견한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기여이지만 고대 인도의 불교 철학자들도 이러한 논리적 사고의 틀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그들의 철학적 주장에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고대 힌두 철학의 정통 육파(六派) 중에는 니야야(Niyāya)학파가 있는데 이 학파에서도 이미 주장의 진리 근거와 한 주장에서 다른 주장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형식 논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니야야학파를 비롯해 고대 인도의 많은 사상가들은 논리가 단순한 생각과 추리의 올바른 과정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 주장이나 깨달음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인도에 시작된 불교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불교 철학자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는 그의 중관론(中觀論, Madhyamaka)을 다음과 같은 논리적 추리의

 

방식, 즉 사중 딜레마 논법을 통해 설명한다.

사중 딜레마 논법(quadrilemma)                                          용수의 중관 논증 구조(catuskoti)

(1) p이다.                                                                          실재한다. (Being) 有

(2) p가 아니다. = ~p                                                           실재하지 않는다. (Non-Being) 無

(3) p이고 p가 아니다. = p & ~p                                           실재하고 실재하지 않는다. (Being and Non-Being) 有無

(4) p도 p가 아닌 것도 아니다. = ~p & ~(~ p)                        실재하는 것도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Neither Being nor Non-Being) 非有非無

이러한 논법은 중관론(생성과 소멸, 그리고 찰나와 영속 같은 대립적 틀로 이분법적 구분으로 존재를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불교의 입장)을 분명히 알리고 있는데 사용되었다. 물론 이런 논리적인 방식을 통한 불교 철학의 발전은 불교적 입장을 다른 인도 철학의 주장과 구분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논리적 방식이 불교의 깨달음을 모두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마치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 도박과 확률의 논리를 사용해 기독교의 신을 믿는 것이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 더 이득이 있음을 증명하고 이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파한 것처럼 논리적 설법이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경우도 있으나 논리가 맹목적으로 종교의 모든 면을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 수 없다고 가정할 때, 신을 믿는 경우와 믿지 않는 경우의 나타나는 이득과 손실을 수학적 확률probability과 결정이론decision theory을 통해 계산하면 신을 믿는 것이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파스칼은 주장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파스칼의 주장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한다.

용수의 사중(四重) 딜레마(quadrilemma) 논법도 잘 살펴보면 중관의 진리가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이는 사고의 일반적 틀로는 포착되기 어렵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용수의 논법은 딜레마라는 논리의 형식을 통해 논리의 제한적 측면을 보여주는(논리

 

인간의 지능은 형식적 틀로 설명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발전을 위해서는 비형식적 사고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 지점에서 불교와 인공지능이 만나 나누는 대화는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를 통해 “있음”의 논리가 가진 문제를 지적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든다. 용수에 따르면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는 이 세계는 기존의 사고 범주를 통해 (즉 이것저것 혹은 이것 아니면 저것과 같은 식으로) 구분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용수는 이 모든 범주를 하나하나 부정해나가는 것이다. 즉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수에 따르면, (1) [이것]도 (2) [저것]도 (3) [이것저것]도 (4) [이것 아님 저것 아님]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있다는 것은 공(空, 비어 있음, 영속적 규정성이 결여되었음)이라는 주장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공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기는 있는데 독립적인 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있음은 마치 돈(화폐)과 같다. 돈은 있기도, 없기도, 있고 없기도, 있고 없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돈이라는 것은 일정한 가치를 교환할 때 필요한 연결 고리 혹은 매개체이지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돈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고팔고 돈이 돌아다니며 경제활동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돈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거나, 있고 없다거나,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돈의 정체는 있고 없음에 관련된 우리 사고의 일반적 논리를 벗어나 있다. 돈은 특정한 물질적 형태와 결속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물리적 존재나 실체적 존재가 아니다. 돈은 또한 교환을 위한 관계를 나타내는 존재이다. 돈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경제 체계 안에서 존재할 수 있다. 무인도에서는 돈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돈은 영속적 절대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이다. 게다가 돈은 변화하는 존재이다. 돈의 가치는 한 경제 체계 안에서도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다.

용수에 의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돈과 같이 상호작용적이고 상호관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용수의 주장은 세상이 돈과 같은 물질적 가치를 지닌 세계라는 뜻이 아니라 상호연관성과 상호관계성을 지니고 특정한 물질적 형태를 지니지 않고 끝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를 불변하고 독립적인 대상의 우연하고 일시적인 상호작용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나와 너가 먼저 있고 그리고 나서 나와 너의 관계가 생기는 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데 변화하는 관계가 먼저 있고 그것에서 나와 너가 잠시 우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중관이란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이고 있는 기존의 구분법이나 논리로 포착되지 않는 존재(있음)에 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을 찾을 것을 요청한다. 이런 와중에서 용수는 네 가지 논리적 선택지가 다 부정되는 딜레마를 보여주면서 논리를 가지고 논리를 뛰어넘어 있음의 정체를 설명하는 것이다. 용수의 천재성은 이 사중 딜레마를 통해서 논리의 제한성과 가능성을 모두 다 보여주는 방식으로 불교의 입장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즉 존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논리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로 포착되지 않는 관계성의 논리가 있다는 점을 용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중관적 이해를 컴퓨터의 프로그램이나 형식적 규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대상들 사이의 관계성의 논리를 드러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 수는 있다. 대상들을 그물망(네트워크) 체계로 연결하고 이들의 다양한 상호작용이 이들자체의 작용에 다시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가능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 국가의 경제 흐름이나 날씨의 변화를 추적하고 예측하는 데는 이런 복합적이며 상호작용적 체계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증권 거래는 한 경제 체계의 수많은 요소들의 상호의존적 상호규정적 작용을 통해 나타난다. 태풍의 발생은 수많은 공기의 흐름과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다. 증시나 태풍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독립적 대상들이 아니라 관계적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상호의존적 복합 현상이다. 즉 상호의존적이며 관계적 시각에서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불교뿐만 아니라 복잡한 경제 체계나 기상 체계를 연구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될 것이며, 이런 시각은 부분적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프로그램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논리적 사고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 즉 사고와 논리의 가능성과 제한성을 모두 고려하는 과정을 단순한 규칙으로 형식화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용수의 주장은 존재의 상호관련성과 의존성을 드러내는 논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중 딜레마에서 나타나듯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논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그 한계성을 넘어서는 다른 길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즉 논리의 양날을 (즉 그 한계성과 가능성을) 모두 보는 것이 중관론의 이해에는 중요하다. 용수의 주장이 지닌 이러한 양면적 측면이 중요한 이유는 참된 깨달음이란 단순히 한 가지 논리로 정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고통의 원인과 (즉 잘못된 논리의 한계와)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새로운 논리의 가능성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논리의 두 측면을(그 가능성과 한계성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한 가지 논리나 프로그램으로 중관의 깨달음이 모두 포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논리와 비논리를 서로 다른 시각을 통해 꿰뚫어 이해할 수 있고 주어진 프로그램의 가능성과 한계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체계라야 용수의 중관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인공지능이 가능한가?

1968년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던 아서 클라크(Arthur Clarke)의 공상과학 소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에는 할(HAL, Heuristically programmed ALgorithmic computer)이라는 우주선을 관리하는 인공지능 체계가 등장하는데 이 체계는 상반된 지시 사항과 모순된 명령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가당착에 빠져 고장을 일으키며 결국에 가서는 우주선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인간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논리의 한계와 가능성을, 이 양면을 모두 이해하는, 즉 주어진 모순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얼핏 보면 이상스럽기까지 한 이 능력이 용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에서도 중요한 것 같다. 허구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이 할(HAL)의 사례는 논리의 양면을 이해하는 능력의 결여가 정보처리 과정에 어떤 영향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컴퓨터의 발전과 형식논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끌어들인 것에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굳이 불교를 사고의 규칙인 논리와 연결해 설명하는 것은 불교가 논리적 첨예함과 무관한 종교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하는 이유 때문이다. 불교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만 궁극적 깨달음으로 향하는 정신적 능력의 발견과 함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불교에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은 생각의 근본적 패턴, 즉 사고의 논리를 연구하는 인공지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불교가 현대 기술 문명의 첨단인 컴퓨터와 인공지능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국 컴퓨터와 인공지능을 불교적 시각과 비교하고 설명하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생각의 근본적 흐름과 깨달음을 이해하기 위한 불교적 여정에서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연구하는 인공지능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는 것이다. 물론 논리적 사고의 중요성과 동시에 논리적 사고의 한계를 모두 바라보는 불교적 깨달음의 입장은 정보처리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인공지능의 노력과 같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둘의 연관성과 차이성을 연구하는 것은 불교와 인공지능 모두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__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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