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나는 누구인가

프롤로그

‘참나’는 아는 데에
있지 않다

이각범
본지 발행인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나’로 찾으면 그 해답은 보이지 않는다.

“인생은 허무하다”는 말년(末年)의 외로운 외침은 바로 ‘나’를 ‘나’로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찾는 과정에서 ‘유아(有我)인가, 무아(無我)인가’ 하는 식으로 구분하거나 ‘본래의 나’에 대해 가아(假我)를 대립시켜 진아(眞我)인가, 가아(假我)인가 하는 것은 ‘참나’를 쪼개려는 것처럼 무망한 일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의 시에 “우리는 꽃을 꽃이라 부르며 꽃을 죽이고, 나무를 나무라부르며 나무를 죽인다. …”라는 구절이 있다. ‘유정이든 무정이든 이름을 붙임으로써 실상(實相)을 덮어버린다’는 뜻이다.

나를 찾으며, 나를 남과 구분하고, 중생이라는 굴레 속에 가두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반드시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으며, 우리는 열심히 분별심을 내고 있다. 석가모니께서 쿠시나가라로 가시던 마지막 길에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물을 길어다다오. 나는 목이 몹시 말라 물을 마셔야만 하느니라.”

아난다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듣고 강가에 갔으나, 그 강에는 500대의 수레가 지나가서 물결이 흐려 도저히 마실 물을 뜰 수 없었다. 이에 아난다는 맑고 시원한 물을 구하려 물을 헤치고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아난다가 물을 헤치면 헤칠수록 물은 더욱 탁해져 세존께 바칠 물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아난다가 빈손으로 돌아왔을때 세존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물을 길어다다오. 나는 목이 몹시 말라 물을 마셔야만 하느니라.”
아난다는 “그 강물에 이제 막 500대의 수레가 지나가 물이 흐려 다음 강물을 만날때 떠오겠습니다” 하였으나 세존께서 다시 물을 떠오라고 말씀하시므로 어쩔 수 없이 갔다. 탁한 물이 가득해야 할 그 강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대.반 열반경』)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는 ‘도(道)’란 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관조(觀照)함으로써 찾아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좇아서 생각을 내고, 생각이 생각을 낳는 폐쇄 회로 속의 생각 굴림을 계속하고 있다. 이는 마치 자동차가 스스로 낸 배기가스를 좇아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과 같은 것이다.

회양남악(懷讓南嶽) 선사가 6조(六祖) 스님을 뵙고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는 질문을 받고 앞생각, 뒷생각이 꽉 막혀 아무 대답도 못한 채 돌아와 8년을 참구하였다. 마침내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스승을 뵈온 뒤에 “설사 한 물건라고 하여도맞지 않습니다”고 대답하여 6조 스님의 적자가 되었다(『. 육조단경』) 이것이 ‘나’를 벗어나서 ‘나’의 본래 모습을 찾는 길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살고 있다. 집단세뇌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sense of identity)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처럼 우리가 꾸는 꿈속에서는 나의 주인공을 잊어버리게 한다.

“인생은 한 판의 연극이니라. 매일 한 시간만이라도 나의 주인공을 찾아 나서야 한다. 멋지게 연극 한번 하여라.”
경봉(鏡峰) 스님께서는 20대의 필자에게 당부하셨다.

“나는 누구인가” 그 해답은 부처님과 조사들도 주실 수 없다. 불조(佛祖)는 참나를 찾아 나서는 길(道)을 보여주고 계신다. 왜냐하면 ‘참나’는 알거나 알지 못하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道不屬知不知).

 

 

나를 찾는 발심의 계기
– 무아, 열반적정의 길

 

맹난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고문

 

붓다는 정각을 이룬 뒤 “나는 다만 고(苦)와 고(苦)에서의 해탈만을 가르친다”며 최초의 설법 때부터 욕망이 고의 원인임을 강조해왔다.

“무릇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모두 욕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은 욕망이며, 욕망의 근본 뿌리는 내(我)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모든 욕망을 낳는 욕망의 어머니라고 『잡아함』은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존재’에 대한 아(我)의 추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 아에 대한 추구는 인생의 가장 핵심 문제인 고(duhkha)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나(我)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인간 존재를 5온(蘊)으로 규정한다. 다섯 개의 요소, 즉 몸(色)과 정신적 요소인 수(受), 상(想), 행(行), 식(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수온(受: 감수 작용), 상온(想: 표상 작용), 행온(行: 마음의 형성력 작용), 식온(識: 식별 작용) 등과 같은 정신적인 현상이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 그것에 관계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한다. 즉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의(意) 등이 여기에 상응하는 물질인 형태(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할 수 있는 것(觸)·생각(法)과 서로 만날 때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 등 여러 가지 정신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눈(眼)과 물질(色: 형상)을 인연으로 해 안식(眼識)이 생긴다. 나머지 5식(識)도 동일하다. 경전에서는 오온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색(色=육체)은 거품 덩어리 같고, 수(受)는 거품 방울 같고, 상(想)은 신기루 같고, 행(行)은 바나나 줄기 같고, 식(識)은 허깨비 같다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비실체적인 요소들의 덩어리, 그 오온에 아(我)는 없다. 무아(無我)다. ‘나’란 비실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임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나(我)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나의 것(我所)’이라는 생각이 생길 수 없고 이와 같은 생각이 없을 때 욕망이 발생할 수 없다.

끌어모아서 얽어매면, 한 칸의 초가집
풀어헤치면 본래의 들판인 것을!

위의 시구처럼 ‘나’란 나를 포함한 일체의 현상이 원인과 조건으로 연기(緣起)된 것이기에 실체가 없으며 본질적으로는 공(空)이다. 연기는 무아요, 무아는 공(空)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자 존자의 임종 장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를 몰아내려고 작정한 외도들이 승려로 변장하고 임금을 시해하려 했다. 불교 신자였던 임금은 화가 나서 사찰을 부수고 스님들을 잡아들이게 했다.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임금은 사자(Sinha, 존자, 인도의 제24조)에게 따져 물었다.

“존자는 오온이 공(空)함을 깨달았는가?”

“예, 깨달았습니다.”

“생사(生死)는 여의었는가?”

“예. 이미 여의었습니다.”

“이미 생사(生死)를 여의었다면 나에게 존자의 머리를 줄 수 있는가?”

“몸도 내 것이 아니거늘 어찌 머리를 아끼겠습니까?”

즉석에서 칼을 내리치니 존자의 머리가 댕강 잘려 나갔다.
중국의 승조 스님은 재상을 맡아달라는 왕명을 거역해서 처형되었는데 당시 이런 게송을 남겼다.

몸도 내 것이 아니거늘
이 몸은 본래 주인이 없고(四大非我有)
오온은 원래 텅 비었어라(五蘊本來空).
저 칼이 내 목을 친다 해도(以首臨白刀)
봄바람을 가르는 것과 다름없어라(猶如斬春風).

불교 선양을 위해 기꺼이 목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차돈 성사, 또한 불교 중흥을 이룩한 허응당 보우 스님이 문정왕후 서거 후, 제주도로 유배된 뒤 죽음을 당할 때도 순순히 육체를 내맡긴 것도 그것이 실체가 없는 환화(幻化)였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허깨비 몸으로 와서
오십여 년 온갖 미친 짓
모든 영욕 다 겪고
이제 그 더러운 탈을 벗는다.

그의 임종게처럼 ‘허공에 응(應)한’ 허응당(虛應堂) 보우 스님은 허깨비 몸을 통쾌하게 벗어던졌던 것이다. ‘허공 꽃’에 대해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또 이렇게 말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사대(地水火風)를 제 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또 6진(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의 현상이라 하듯이 한다.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에 어른거리는 아지랑이를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에 꽃이 없다 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보게 된다. 그 꽃은 원래 없는 허깨비였건마는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짐작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실체 없음을 고구정녕 짚어준다. 우리는 생사(生死)를 곧잘 구름에 비유하곤 한다.

생(生)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사(死)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다.
뜬구름은 실체가 없으며
삶과 죽음이란 것도 또한 그와 같다.

‘부운자체 본무실(浮雲自體 本無實)’의 실체 없음이 쉽게 이해되지 않더니 오랜 세월 뒤 한산(寒山) 스님의 시구로 겨우 짐작이나마 해본다.

나고 죽음 관계를 알고자 하면
물과 얼음 비유로 설명하리라.
물이 얼면 곧 얼음 이루고
얼음 녹으면 도리어 물이 된다.
이미 죽었으면 반드시 날 것이요
이미 났으면 반드시 죽으리니
물과 얼음 서로 해치지 않는 것처럼
남(生)과 죽음 모두 다 아름다워라.

생사의 관계를 물과 얼음에 비유한 것이다. 물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므로 증발되어 구름 한 점으로 떠 있다가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온다. 비는 기온에 따라 얼음이 되고 얼음은 녹아 수증기가 된다. 수증기는 하늘에 올라가 다시 구름이 된다. 물의 조건이 달라지면서 관계의 변화에 의해 생겨난 것일 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전환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전환되나 전환된 뒤에 질량과 에너지의 증감(增減)이 없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개체는 고정불변의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전체의 필요에 의해, 인연 따라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것이다. 실체가 없기에 연기(緣起)가 가능하며, 무자성(無自性)인고로 공(空)이고 무아(無我)인 것이다. 연기(緣起)에 의해 가합된 이 몸뚱아리 역시 마찬가지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空)함을 비추어보고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났다”는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모든 것을 요약한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의 깊은 뜻을 되새긴다. “색(色)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수·상·행·식도 무상한 것이다. 색(色)에는 ‘나’가 없고 수·상·행·식(識)에도 ‘나’는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가 아니요, 내 것도 아니며, 나와 내 것은 꼭 있어야 할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탈하면 곧 하분결(下分結)을 끊으리라”는 붓다의 게송이 떠오른다. 하분(下分)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3계(界) 중 가장 밑에 있는 세계로 ‘결(結)’이란 중생의 감각적 쾌락을 묶어두는 번뇌를 끊는 것을 말한다.

무아(無我)란 식(識)에 연기된 마음의 공성(空性)을 아는 것, 이로써 집착(욕망)할 것이 없게 되면 스스로 열반을 얻어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무아란 열반적정(寂靜)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혜민 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장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승복을 입고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씩 흑인 꼬마 아이들이 내 앞에서 갑자기 이소룡 흉내를 내곤 한다. 처음에는 저 꼬마들이 왜 그러지 생각했는데, 얼마 안 가 그 아이들 입장에선 승복을 입은 사람이면 ‘무술을 하는 사람’이겠구나 싶어 웃음이 나곤 했다. 좀 더 적극적인 아이들은 내게 중국 소림사 스님들처럼 쿵푸를 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나는 어설프게나마 쿵푸 폼을 잡고 싶은 충동이 들곤 한다. “이얍!” 기합을 넣으며 팔을 뻗고 다리를 올리고 강렬한 눈빛을 뿜고싶은 충동!

한편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의 경우 내가 한국에서 온 승려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묻곤 한다.
“스님은 어떤 명상을 하세요?”
“하루 중 몇 시간이나 수행을 하시나요?”
이 질문을 받는 나는, 미국인들에게 승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명상하는 수행자’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미국 아이들과 어른들의 반응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또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승려’라고 한다면 그들은 내가 쿵푸 혹은 명상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즉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그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인것이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올 때면 다른 물음들이 나를 기다리곤 했다. 한국에서 나를 보고 사람들이 묻는 첫 번째 질문은 대부분 같다.

“스님은 지금 어느 절에 계십니까?”
“어느 절에서 오셨습니까?”

스님의 문중이 어디이고, 원래 어느 절 소속이고, 지금은 어느 절에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듯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 역시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는 통성명을 한 이후에 서로 이렇게 묻곤 한다.

“지금 어느 교회 다니세요?”
“절에 다니세요? 어느 절 소속이세요?”

이런 대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그 사람의 ‘소속과 지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그 사람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는, 지금 그 사람이 어떤 그룹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 학교건 직장이건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이 과정에서 우린 이렇게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고민 없이 주고받는 물음과 그 안에 담긴 생각들이, 미국에서 승려로 살고 있는 내겐 커다란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왜 한국인은 학벌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미국이나 다른 서양에서도 좋은 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우대해주고 인정해준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해지고, 무슨 대학을 나왔는가는 점점 무의미해진다.

 

나는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할 줄 알고, 또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를 꿈꾼다. 그 사람의 배경과 그 사람이 소속된 그룹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을 찾다 보면, 그 사람의 ‘과거’만을 보고
‘현재’를 보지 못하는 과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예를 들면 애플의 스티브 잡스 같은 경우, 미국 오리건주 리드대학에 입학해한 학기 공부하다 학교를 그만두었다. 미국 교육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리드대학이 얼마나 좋은 대학인지 잘 인지하고 있겠지만, 동부 아이비리그만을 최고로 치는 보통의 한국 사람의 경우 리드대학을 서부에 위치한 듣도 보도 못한 하찮은 대학으로 치부하기 쉬울 것이다.
만약 스티브 잡스가 미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었다면, 학벌이 받쳐주지 않아 그의 계획은 분명 난항을 겪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에 두기보다는, 그가 어떤 그룹에 소속된 사람인지를 두고 가늠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플과 같은 회사를 준비하려 해도 그가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을 나오지 못했으므로 ‘저 사람의 생각은 분명 별 볼일 없을 거야’ 라고 여겼을 것이고,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타깝다. 나는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할 줄 알고, 또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배경과 그 사람이 소속된 그룹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을 찾다 보면, 그 사람의 ‘과거’만을 보고 ‘현재’를 보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좋은 배경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에 들어간 사람, 과거 경력이 좋은 사람만이 성공의 기회를 잡는 순환만이 지속되고,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 배경이나 과거가 좋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실패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쿵푸를 할 줄 알아요?”라고 묻는 아이들, 승복을 입은 내 앞에서 폼을 재며 이소
룡 흉내를 내는 그 흑인 꼬마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를 경책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 역시 나 스스로를 ‘승려’라는 그룹 속에 넣어두고 내가 해야 할 진정한 일들을
등한시하지 않았던가?

‘나는 어떤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가.’

나 역시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이 소속된 그룹에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았던가?

끊임없이 배우고 스스로를 경책하는 사람.

꼬마 아이들의 질문에 또 하나 배웠으니,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위안한다.

 

 

무상·무아·열반을
깊이 보는 수행

틱낫한 스님
불교 지도자

실재의 문을 여는 열쇠는 무상・ 무아의 지혜

붓다의 수행법에는 삼법인(三法印)이라는 본질적 가르침이 담겨 있다. 중요한 법률 문서에 증인의 서명이 있는 것처럼 붓다의 정법 수행은 이 세 가지 가르침의 인장을 담고있다.

첫째 무상 법인은 한 찰나에서 다음 찰나까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고 따라서 고정된 자아도 없다는 것이다. 무상의 가르침에는 불변의 자아가 없기에 이를 둘째인 무아 법인이라 부른다.

셋째 열반 법인은 모든 개념과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열반’은 ‘모든 개념의 소멸’을 의미한다. 무상을 깊이 보면 무아를 발견하고, 무아를 알면 열반을 안다. 열반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다.

 

무상의 지혜로 모든 개념을 초월하다

무상을 이해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변화하고 치유되고 해방될 수 있다. 만물은 찰나마다 변화하지만 한 물건은 한 찰나 전과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어제 목욕했던 강물에서 오늘도 목욕을 한다면 그 물은 같은 물인가? 그 물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강물이지만 그럼에도 강은 여전히 같은 강이다.

무상의 지혜로 우리는 개념을 넘어서고 ‘같다-다르다’를 넘어선다. 강물이 같은 강물이 아니나 다른 강물도 아님을 안다. 잠들기 전 침대 옆 탁자에 켜놓은 촛불이 다음 날 아침 촛불과 같지 않음을 안다. 이 촛불은 두 개의 불이 아니나, 또한 한 개의 불도 아니다.

 

무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다

변화와 무상은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기도 하다. 무상 덕분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삶이 가능하다. 옥수수 한 알이 무상하지 않다면 그 한 알에서 옥수수 한 자루가 나올 수 없다.

무상은 또 연기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항상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만물이 변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무상의 실천과 수행

무상을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이해를 진정한 이해라 볼 수는 없다. 지성만으로는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 깨달음에 이르지도 못한다. 안정된 마음으로 집중할 때 깊이 보기를 수행할 수 있다. 깊이 보기로 무상을 볼 때 이 심오한 지혜에 집중할 수 있다. 그때 무상의 지혜가 내 존재의 일부가 된다. 나날의 체험이 된다. 무상의 지혜를 늘 지녀 언제나 무상을 보고 무상을 삶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무상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아 수행하면 이해가 자라난다. 매일 내 안에서 무상이 살아 있게 된다. 이 수행을 통해 무상은 실재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무상의 눈으로 감정 보기

누군가 한 말에 화가 치밀고 그 사람이 꼴도 보기 싫을 때 무상의 눈으로 깊이 보기를 수행해보라. 그가 가고 나면 나는 무엇을 느끼는가? 행복한가, 울고 있는가? 이수행에 도움이 되는 게송이 있다.

화가 난 나는 궁극의 차원에서
눈을 감고 깊이 보기를 수행하네.
앞으로 300년이 지난 후
너는 어디에 있고 나는 어디에 있을까?

무상의 눈으로 화를 바라보면 바로 멈추고 호흡할 수 있다. 서로에게 화가 난 우리는 눈을 감고 궁극의 차원에서 깊이 보기를 수행한다. 300년 후 미래가 되면 나는 어떤 모습이고 너는 어떤 모습일까? 너는 어디에 있고 나는 어디에 있을까? 단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의 미래, 그의 미래를 본다. 300년까지 갈 것도 없다. 50~60년만 지나도 두 사람 다 세상을 떠나고 없을 것이다. 이렇게 미래를 볼 때 그가 매우 소중한 사람임을 볼 수 있다. 그를 안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아직 살아 있어서 참 좋아요.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화를 내겠어요. 우리 두 사람 다 언젠가 죽을 테지요. 살아 있는 동안 서로에게 화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군요.”

 

무아

무상은 시간의 관점에서 실재를 바라보는 것이고, 무아는 공간의 관점에서 실재를 보고 있는 것이다. 무상과 무아는 실재의 양면이다. 무아는 무상이 드러난 것이고, 무상은 무아가 현현한 것이다. 만물이 무상하다면 개별적 자아가 없는 것이다. 사물에 개별적 자아가 없다면 사물이 무상함을 의미한다. 무상은 사물이 찰나마다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실재다.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항상한 자아나 개별적 자아가 있을 것인가? ‘자아’라 말할 때 우리는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변하지 않는 무엇을 의미한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우리의 몸은 무상하고, 감정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다. 우리의 화, 슬픔, 사랑, 증오도 무상하고 의식 역시 무상하다. 지금 이 글이 담긴 종이 역시 개별적 자아가 없다. 오직 구름, 숲, 태양, 흙, 종이 만드는 사람들과 기계가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종이도 없다. 그리고 이 종이를 태우면 종이의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무언가 다른 것에 의지해야 한다. 그것을 연결되어 존재한다고, 연기라고 말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연결되어 존재함을 의미한다. 종이는 태양과 숲과 연결되어 존재한다. 꽃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흙, 비, 잡초,곤충과 함께 연결되어 존재한다. 개별적 존재(being)는 없다. 오직 연결되어 존재할(inter-being) 뿐이다.

한 송이 꽃의 출현을 돕기 위해 전 우주가 힘을 보탰다. 꽃을 깊이 보면 꽃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 꽃은 만물이 가득한 존재라고 묘사할 수 있다. 꽃속에 현존하지 않는 것은 없다. 꽃 속에는 햇빛이 있고, 비가 있고, 구름이 있고, 땅이 있고,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있다. 한 송이 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꽃이 아닌 모든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우주 전체가 나섰다. 꽃 속 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단 하나 없는 것은 바로 개별적 자아, 개별적 정체성이다.

무아는 또한 공을 의미한다. 공성은 개별적 자아가 없음을 의미하는 불교 전문 용어다. 나는 무아의 성질을 가졌으나 그렇다 해서 내가 여기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무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유리잔은 비어 있거나 아이스티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지만, 비어 있든 가득 차 있든, 유리잔이 거기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성(비어 있음)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존재함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공성은 모든 개념을 초월한다. 공성의 본성을 깊이 접하면, 즉 무아와 연결되어 존재함을 깊이 접하면, 바로 열반을 궁극적 차원을 접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몸을 자아로 여기고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몸을 ‘나’, ‘내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깊이 보면 내 몸은 내 조상들의 몸, 내 부모의 몸, 내 자녀들의 몸, 내 손자들의 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 몸은 ‘나’가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다. 내 몸은 다른 모든 것들로 가득하다. 몸이 아닌 무한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오직 하나만 빠져 있으니 바로 개별적 존재이다.

무상은 공성의 측면에서, 연기와 무아의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공성은 훌륭하다. 2세기 저명한 불교 스승인 나가르주나는 말했다. “공성 덕분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무상은 시간의 시각에서 본 무아이고, 무아는 공간의 시각으로 본 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같다. 그러므로 무상과 무아는 서로 연결되어 존재한다. 무아 속에서 무상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무아가 아니다. 무상 속에서 무아를 보지 못하면 그것은 무상이 아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무상 속에서 열반을 보아야 하고, 무아 속에서 열반을
보아야 한다. 만약 선을 긋는다면 한쪽에는 무상과 무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열반이 있을 것이다. 이 가름 선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이해에 도움이 된다. 열반은 모든 개념을 초월하는 것이고, 따라서 무아와 무상의 개념조차도 넘어서는 것이다. 무아 속에 열반을 두고, 무상 속에 열반을 둔다면 우리는 무아나 무상이라는 개념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

 

열반
무상과 무아는 지켜야 할 규칙이라고 부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다만 실재의 문을 여는 열쇠일 뿐이다. 항상의 개념은 오류이고 따라서 무상의 가르침으로 항상의 관점을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무상의 개념에 매이게 되면 열반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다. 자아의 개념은 오류다. 그를 수정하기 위하여 무아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아의 개념에 얽매이면 그 역시 좋지 않다. 무상과 무아는 수행의열쇠일 뿐 절대 진리가 아니다. 무상과 무아를 위해 우리는 죽지도 살생을 하지도 않는다.

불교에는 그를 위해 살생을 해야만 하는 개념도 편견도 없다. 불교를 수용하지 않는다 해서 그런 사람들을 죽이지도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은 슬기로운 방편이지 절대 진리가 아니다. 따라서 무상과 무아는 진리에 닿을 수 있는 슬기로운 방편이라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은 말씀했다. “내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이 달이라는 생각에 얽매이지 말라. 손가락 때문에 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아와 무상은 진리를 이해하는 수단이지 진리 자체가 아니다. 무상과 무아는 도구일 뿐 궁극의 진리가 아니다. 무상은 그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교리가 아니다.

무상에 반기를 든다 해서 누군가를 감옥에 가두어선 안 된다. 그리하면 개념으로 개념을 반대하는 것이다. 무상과 무아는 절대 진리로 이끌어주는 수단이다. 불교는 우리를 돕는 지혜로운 길이지 광신도의 길이 아니다.

무상이 그 안에 열반의 성품을 지녔기에 우리는 개념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 이 가르침을 공부하고 수행할 때 항상과 무상을 포함한 모든 개념과 생각에서 해방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고통과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이것이 바로 열반이고 천국이다.

 

개념의 소멸

열반은 모든 개념과 생각의 소멸을 의미한다. 개념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참 자성의 평화로움과 접할 수 있다.
우리의 두려움에 연료를 공급하는 여덟 가지 개념이 있다. 바로 태어남과 죽음, 오고 감, 같음과 다름,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이다. 이 개념들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이 개념들을 중화시키는 가르침을 ‘팔불(八不)’이라 부른다. 바로 태어남과 죽음이 없음[불생불멸(不生不滅)], 가고 옴이 없음[불거불래(不去不來)], 같지도 다르지도 않음[불일불이(不一不異)], 존재도 비존재도 없음[부단부상(不斷不常)]이다.

 

행복의 개념에 안녕 고하기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행복의 방법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여기서 행복의 개념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목록을 만들어보라.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들을 적어놓고 이런 생각이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해보라. 이것이 실재인가 개념인가? 특정 개념의 행복만을 생각한다면 행복의 기회가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행복은 여러 방향에서 도래한다. 오직 한 방향에서만 행복이 온다고 여기면 다른 기회들을 놓쳐버린다. 우리는 말한다. “그녀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내 직장과 명성을 잃어버리느니 죽어버릴 테야. 그 학위, 그 승진을 얻지 못하면, 그 집을 사지 못하면 나는 행복할 수 없어.” 행복에 이렇게 많은 조건을 달면 그 조건이 다 충족된 후에도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계속 다른 행복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더 높은학위, 더 나은 직장, 더 좋은 집 등을 말이다.

정부 역시 국가를 번영시키고 행복하게 할 한 가지 방법을 신봉할 수 있다. 그 이념에 백여 년 매달리는 동안 국민은 많은 고통을 받는다. 정부에 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심지어 미친 사람 취급도 한다. 하나의 이념에 헌신하기 때문에 나라 전체를 감옥으로 바꾸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행복의 개념이 위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부처님은 행복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러니 되돌아가서 자신의 생각을 깊이 점검해보라. 그러면 행복의 조건이 이미 내 삶에 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 순간 행복은 즉시 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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