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서 온 편지|초라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다__김산들

초라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다고 사막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막에는 사막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존재하건만 우리에게 불편하고 낯설다고 그 존재의 아름다움이 외면되는 때가 있다.
낯선 존재를 익숙하게 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시간이 느리고 길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속에서 분명 아름다운 꽃이 필 날이 올 것이다.”

 

해발 1,200m 스페인 시골에 처음으로 살 집을 보러 왔을 때다. 단돈 600만 원에 살 집이라 내심 걱정 반 기쁨 반이 오갔다. 가격이 매우 저렴해 기뻤지만, 저렴한 만큼 폐가는 아닐까 하는 걱정에 또 안절부절못했다. 15년 전의 일이지만, 그 당시에도 600만 원에 집을 산다고 하면 다들 너무 싸다며 믿지 못할 가격이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싼 게 비지떡이라고 첫눈에 본 집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져 있었다. 저런 곳에 과연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내심 초라하고 무너진 집에 실망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 누가 알았을까? 그 볼품없던 집이 지금 우리 가족의 편안한 보금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물론 우리 부부의 노고가 들어간 집이라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부터 편안한 보금자리는 아니었다. 처음 시골에 정착해 살면서 나는 예상치 않은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곤 했다. 특히 첫해 들어와 겪었던 이곳의 자연환경은 참담하게 느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지중해 기후의 식물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화려하고 풍성한 잎을 지닌 식물과 부드러운 꽃을 기대한 나는 이 고산의 모든 식물에 가시가 있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가시 없는 식물이 없을 정도로 들판에 나가면 다리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곤 했다.

“이거 너무 따가운데? 마음 놓고 산책할 수가 없어.”
이렇게 종종 남편에게 항의하듯 따지기라도 하면 남편은 타이르듯 말하곤 했다.
“한국과 다른 아름다움이지.”

가시 많은 들판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남편이 그때만 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속으론 ‘이게 뭐가 아름다워? 아프기만 한데…’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즈음, 나는 스페인 시골 사람들도 알아가게 되었다. 다들 농사짓고, 양 떼를 몰고, 소를 키우는 분들이라 행색이 초라해 보였다.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스페인 고산의 척박함과 더불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자신이 참 부끄럽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이곳 사람들이 숨은 보석임을 알게 되었다.

 

꼽추 등을 가진 할아버지가 선뜻 대가 없이 자기 밭을 빌려주기도 하고, 쪼글쪼글 주름이 깊숙한 할머니는 우리에게 수확한 토마토와 과일을 나눠 주기도 했다. 또 양 떼를 몰며 들판을 누비는 양치기 아저씨는 사실, 어마어마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이야기 연금술사였다. 저마다 보석 같은 세계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라 그 초라함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겉모습이란 걸 알게 했다.

그렇다. 겉만 보고 판단하는 나 자신이 더 초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자 어느새 세상은 달라 보였다. 남편이 말한 ‘아름다움’이 그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세상은 저마다 특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존재하는데, 겉만 보고 편견으로 판단하는 획일적인 시야는 마음을 가난하게 한다. 저 사막이 황량하고 불편하다고 아름답지 않다는 발상은 잘못되지 않았는가. 저 가시나무가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어느 작은 새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금자리가 된다는 걸 모르겠는가. 늙어서 주름이 쭈글쭈글한 할머니도 얼마나 많은 지혜의 깊이로 빛을 발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 저마다 기준이 다를 뿐 분명 ‘다른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건 명명백백한 진리다. 유행하는 멋진 옷을 입고, 화려한 치장을 해야 아름다운 게 절대 아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물이든 나에게 낯설다고 아름답지 않다는 시선은 잘못되었다. 서서히 알아가는 그 시간이 사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심어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 부부가 쓰러져가는 오래된 옛집을 수리하고, 돌 하나 나무 하나 헛되이 버리지 않고 적응해나간 일이 그렇다. 아마추어가 만든 집이라 처음 보는 이에게는 볼품없고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최고의 편안함과 아늑함을 선물해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몇 해를 살다 보니 이제는 이곳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사람도 정이 들면서 상대의 내면의 아름다움이 보이듯 자연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식물에 가시가 달려 따갑기만 하던 스페인 고산의 척박하고도 황량한 풍경도 변했다. 철마다 다른 꽃이 피고, 향기를 내뿜는 자연이 이곳에 있었다.

수녀의 가시방석이라고 불리는 고슴도치 같던 식물에 어느 봄날 보라색 꽃이 만발했다. 산책길 위 따가운 금작화에 찔려 울상이 되던 계절이 지난 후에는 노란색 개나리꽃 같은 꽃이 피어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땅에 박혀 단단하게 옆으로만 기어 다니던 잡초도 어느 뜨거운 여름, 하얀색 나팔꽃을 하늘 위로 당당히 올리며 뽐냈다. 어느 식물 하나 아름답지 않은 녀석이 없었다. 남편 말대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아름다움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고산이었다.

자연에서 식물을 보면서, 동물을 보면서, 이웃과 함께하면서 우리는 외면보다 내면의 가치를 더 알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꼽추 등을 가진 할아버지는 하트(심장)가 너무 커서 몸이 받쳐주지 않아 등으로 튀어나왔다고들 한다. 양치기 아저씨는 양 떼를 몰면서 관찰하며 생각해낸 무수한 이야기를 전하려고 우리에게 찾아온 배달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스페인 시골에서 사람 하나, 식물 하나, 아름답지 않은 존재는 없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

몇 달 전, 두 분의 이웃이 돌아가셨다. 한자리에 존재하다 꽃을 피우고 지는 식물처럼 그분들도 마을 사람들 마음에 꽃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세상 어느 꽃보다 아름다운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난 날, 우리 가족은 엉엉 목을 놓아 울었다. 누구보다도 행색이 초라했던 두 사람이 사실은 우리 마음에 세상의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을 심어놓고 가셨다는 걸 알았다. 그분들이 그리웠다.

요즘에는 외모에 집착하고 외모지상주의가 현실이 된 듯하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아무리 화려한 외향으로 아름답다고 뽐내도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렇게 쉽게 타인의 마음속에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을. 화려한 겉모습보다 죽을 때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꽃을 남기고 죽는 인생이 더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요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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