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현장|아남 툽텐 린포체와 함께한 특별한 수행 관점을 바꾸는 마음 훈련, ‘로종’

아남 툽텐 린포체와 함께한
특별한 수행

 

아남 툽텐 린포체
(AnamThubten Rinpoche)

티베트에서 태어나 티베트 불교의 닝마파 전통에서 수행했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대부분을 사원에서 보내며 뛰어난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199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현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치몬드에 다르마타 재단을 설립해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명상 그룹을 지도하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해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에 50여 개가 넘는 다르마타 상가가 있다. 온라인 라이브스트림으로, 세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2년 과정의 <다르마 리더십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가르치는 등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티베트 스님의 노 프라블럼』, 『알아차림의 기적』, 『모든 순간 껴안기』가 있다. 곧 『선택한 자비』(가제)가 출간될 예정이다

 

관점을 바꾸는
마음 훈련, ‘로종’

1.
불교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에 관한 종교, 영적 전통이다. ‘로종’은 그중에서도 깊고 성스러운 방법이다. 우리 존재, 우리 의식,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자신, 우리의 의식을 바꾼다거나 전적으로 변화시킨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면의 커다란 기쁨을 가지고 우리의 오래된 습관들을 다 내려놓고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꽃피우고,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다 드러낸다면, 다시 말해 여래장이나 불성을 온전히 꽃피운다면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변화라는 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의식은 영원한 게 아니다.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가 가능하다. 때때로 우리의 마음이나 습관이 견고하게 느껴지고 바뀔 것 같지 않다고 여겨진다 할지라도 명상이나 로종과 같은 수행법에 기반해서 수행해나가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유연하고 변화 가능한 것인지를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작은 변화를 이뤄낼 뿐 아니라 급진적인 변화도 이뤄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충동이 있다. 첫 번째는 존재의 욕망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에게는 이런 기본적인 욕망이 있다. 그리고 안전과 편안함을 구하고 사랑받고 싶은 것들은 인간의 삶에 깃들어 있는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 많은 부분들이 첫 번째 기본적인 욕망에 의해 동기가 유발되고 그에 따라 살아간다. 그리고 윤회를 통해서 되풀이되는 가운데 계속 재생산된다. 또 하나는 초월적인 욕망이다. 많은 측면에서 닫혀 있고 잠들어 있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삶의 대부분이 첫 번째 욕망인 기본적인 욕망에 의해서 추동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 더 고양된 의식을 추구하고 싶거나 삶에 깃들어 있는 신비한 의미를 알고 싶어 하거나, 어떤 변화를 바라거나 좀 더 깨달은 존재로 나아가고 싶거나 하는 그런 것들에는 이런 초월적인 욕망이 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에고나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나 좀 더 고양적인 존재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2. “여의주보다 귀한 모든 중생을 위해 성불하고자 하며 항상 중생을 아끼길”
이 게송에 깃들어 있는 생각은 모든 존재들을 향해서 가슴을 연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을 아주 소중하게 우리 가슴속에 간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자기중심적인 오래된 습관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이 게송을 보면 이 같은 일상적인 관계의 패턴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들을 열린 가슴으로 만나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죽음’이다. 존재의 소멸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 두려워한다. 두 번째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다. 마치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면 쓰레기통을 보는 것처럼 달갑지 않은 것들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명상을 해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신뢰하지 못하고 관계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때때로 꿈이 매우 강력한 것일 수도 있다. 일상적인 의식이 그런 표층적인 것밖에 드러내지 못한다고 하면, 꿈속에서 갖게 되는 자기 자각은 아주 경이로운 거울이 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비추어 보고 알 수도 있다.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아주 많은 분들이 모이는 불교 행사였던 것 같다. 많은 상자들이 등장했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지만 버려진 동물들이 상자에 담겨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주도하는 분이 한 사람씩 호명해서 상자를 받아 열어보게 했다. 나 역시도 상자를 골랐다. 상자 안의 동물을 자애심으로 구해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열어보았더니, 바퀴벌레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 순간 바퀴벌레가 너무 싫고 혐오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에고가 작동해서 사람들이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 내가 성스럽고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비로운 척하고 돌보는 척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불행했다. 다음 날 아침 그런 것을 통해서 내가 바퀴벌레에는 자비심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바퀴벌레에 대한 자비심을 열심히 길러야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은 바퀴벌레도 다른 동물들과 똑같이 소중한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다. 다만 우리의 한계가 있는 마음, 이원론적인 마음으로 구분할 뿐이지 다 똑같은 존재다.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태도와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로종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관점 혹은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관점, 새로운 태도를 얻고 그것을 계속 실천해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진화된 관점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은 관점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나 어떤 도전을 만날 때 혹은 삶에서 도전과 실패를 만날 때 그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 모든 과정을 겪을 때 이것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태도를 좀 더 깨달은 관점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종 가르침의 핵심이다.

모든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 모든 분들을 스승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전이 되는 사람이나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을 정신적인 스승이나 이로움이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쩌면 정신적인 스승이란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을 들려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싫어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정신적인 스승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전문적인 영적 교사들은 교묘한 경우도 있다. 장난을 친다. 우리 에고에게 끊임없이 호의적이다.

반면에 카르마처럼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어렵고 도전이 된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고 우리와 매우 다르다. 우리와 이데올로기나 생각이 다르고, 우리에게 매우 불편하고 도전이 되는 존재다.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존재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얼마나 한계에 갇혀 있는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화가 나 있고 탐욕적인 존재인지, 그런 것들을 드러내주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 상가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당신에게 도전이 되는 사람을 당신의 젠 마스터, 당신의 스승으로 여겨라”라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아무래도 선사님들은 때때로 어려울 수도 있고, 아주 노여운 존재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 같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이 우리의 진정한 스승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우리가 그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이러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로종’은 우리 존재, 우리 의식,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내면의 오래된 습관들을 다 내려놓고 여래장이나 불성을 온전히 꽃피운다면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변화라는 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3. “타인과 있을 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진심으로 남들을 최상으로 아끼길”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원초적인 습관에 따라서 관계를 맺을 때가 많다. 특히 어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런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차원의 의식이 있다. 더 낮은 차원의 의식과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그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더 높은 차원의 의식에서 관계를 맺기보다는 더 낮은 차원의 의식에서 관계를 맺는 경우들이 많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습관이다.

궁극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보면 나와 남 사이에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존재로서, 연기적 존재로서 연결되어 있다. 우리들 자신은 타인에 대해서 어떤 식의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그러고 나서 나와 타자를 끊임없이 비교한다. 자아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떤 차이를 가지고 높다 혹은 낮다고 이름을 붙인다. 그러한 경향을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갖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인종이든 종족이든 어떤 종교를 가졌든 그것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이다. 그래서 이름을 붙이고 서로 높다 혹은 낮다고 부여하는 정체성은 사실 진정한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더 나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명이다. 우리가 누구보다 더 못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혹이다. 누구와 우리가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혹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직접 이것에 대해 팔리어 경전에서 설하셨다.

‘우리가 모두 붓다’라거나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붓다’라는, 그런 차원에서 모두 같다는 말을 여러분은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아주 깊은 대승불교의 전통, 선불교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 혹은 태어나지 않은 붓다라는 것을 자기 자신과 관련지어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것을 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몸으로, DNA 유전자 차원에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보통의 인간의 의식에 머물러 있다. 더 낮은 차원의 의식과 더 높은 차원의 의식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아직은 조금 더 원시적인 의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다른 존재와 관계 맺는 것. 특히 어떠한 존재들과 관계 맺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도 진화의 산물이다. 계속 더 높은 차원을 향해 진화해가고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낮은 차원의 의식이 나와 여러분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에게 각인된 습관이라고 할 수 있고 진화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깨어 있는 진화된 의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고, 두려움이나 화 같은 것에 휩싸여 행동하게 되는 때가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하며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아직은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2,600년 전에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또는 어떤 의식의 진화 과정이라는 것을 뛰어넘어 고양된 의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업식의 차원에 깃들어 있는 판단이나 분리, 탐욕이나 성냄으로 각자를 바라보지 않고 자애로운 붓다, 자비로운 붓다의 의식으로부터 다른 존재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

‘로종’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모든 살아 있는 중생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으로 아주 크게 만드는 것이다. 만일 모든 살아 있는 중생을 다 품는 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모든 인간을 다 품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인간들도 우리와 같은 것을 바라고 우리와 같은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우리와 똑같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것과 연결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 필요만을 염려하는 좁고 웅크려 있는 어떤 의식에서 길을 잃지 않고, 더 크고 확장된 의식 속에서 휴머니티, 다른 모든 인간들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 나에 대한 집착 속에서, 내면이 확장되지 못한 채 수축되어 있는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다. 이것이 로종의 가르침이다.

 

4. “항상 내 마음을 살펴 번뇌가 일어나자마자 남과 나를 해칠까 바로 굳게 대치해”
이 게송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알아차림에 관한 것이다. 혹은 알아차림을 기억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모든 불교 전통에서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이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을 하든, 그것이 나의 자각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림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게송이다.

범어로는 ‘클레샤(kleshas)’, 티베트어로는 ‘뇬몽(nyonmong)’은 정신적 번뇌를 말한다. 특히 아비달마의 불교 심리학에서는 여러 가지 범주의 번뇌에 대해 얘기한다. 세 가지 번뇌, 다섯 가지 번뇌 혹은 더 많은 범주의 번뇌를 이야기한다. 무명에서 비롯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주요 세 가지 번뇌이다. 번뇌를 다른 말로 한다면 신경증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게송에서 말하는 것은 마음챙김으로 알아차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그것들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존재를 압도할 수 있다. 그것이 생각이든 감정이든 어떤 번뇌가 되었든 간에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자신의 적 가운데는 우리 마음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궁극적인 고통과 슬픔을 주는 것이 우리 마음이라고 하셨다. 끝이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우리 마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나의 마음 상태는 무엇인가? 지금 내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라는 물음과 동시에, 우리는 어떤 자각을 갖게 되고 마음챙김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어떤 생각 안에서 길을 잃고 있거나 과거 혹은 미래로 내달리면서 헤매고 있을 때, 혹은 불안이나 화나 부정적인 마음으로 걷잡을 수 없을 때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혹은 기쁨이나 감사함이나 자애의 상태에 있을 때도 알 수 있게 하고, 혹은 신비로운 경험을 할 때도 알 수 있게 한다. “내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은 우리 마음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든 그저 일어나는 대로 아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 상태를 보면 마음속에 두려움이나 걱정 같은 것이 많이 있고, 스쳐 지나가는 범상하고 사소한 생각들도 많이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런 생각들을 하며 산다. 어떤 것은 그다지 해가 되지 않지만 어떤 것은 매우 강렬하고 파괴적인 것일 수 있다. 우리를 압도하고 통제해버리기도 한다.

“지금 나의 마음은 어떠한가”라는 이 단순한 질문이 우리 의식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를 그런 감정이나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켜준다. 그때 우리가 겪고 있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우리와 그것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 하지만 이것은 책을 읽는 것이나 지적인 탐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상을 함으로써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과 여러분이 경험하는 것들 사이에 있는 공간은 우리가 인간으로 온갖 종류의 감정을 겪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구속시키지 않고 그 가운데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틈이다. 그것은 마음챙김이기도 하고 자각이기도 하고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뭔가 좋은 마음의 상태가 있다면 지속하면 되는 것이고 화나 이런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판단하지 말고 그것을 없애려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그러면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절로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이 단순한 질문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가 생각과 말과 행위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마음을 살펴보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림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물음하는 것이다.

“지금 내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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