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7|연기와 공__홍창성

연기(緣起)와 공(空)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나가르주나는 그의 『근본중송』에서 ‘연기가 공’이라고 주장한다. 연기가 공이라는 그의 말은 대승 전통의 불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한 명제이다. 이것은 실은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하기 때문에 자성(自性, svabhāva)을 결여하고 있다는, 즉 만물이 공(空)하다는 가르침이다. 대승의 모든 전통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공(空)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그런데 만물이 연기한다고 해서 왜 그리고 어떻게 자성을 결여할까? 이것은 공을 공부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질문이다. 나가르주나는 『근본중송』에서 ‘연기’의 개념으로부터 ‘공’의 개념을 직접적으로 도출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가 만약 사물이 자성을 가지고 실재(實在)한다고 가정하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이런 가정을 부정(否定)해 아무것도 자성이 없이 공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귀류법(歸謬法, reductio ad absurdum)을 통한 논증으로 공에 대한 그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전개한다. 귀류법 논증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예를 들어 “이 낙서가 예술 작품이라면 기차 바퀴는 네모다”라는 농담도 귀류법을 사용하고 있다. “기차 바퀴가 네모다”라는 엉터리 결론이 “이 낙서가 예술 작품이다”라는 가정으로부터 도출된다면, 이것은 그 가정에 문제가 있다는 논리적 증거다. 그래서 그 가정의 부정, 즉 반대가 옳은 주장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낙서는 예술 작품이 아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귀류법은 철학적으로 난해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편리한 논증법이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직관적으로 좀 더 선명하게 와 닿는 직접적인 논증으로 ‘연기가 공’이라는 명제에 접근하기를 좋아한다. 만물은 조건에 의해 생성 및 지속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뜰 앞의 저 잣나무를 보라. 먼 옛날 저 나무를 싹 틔운 씨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조건이 모이고 흩어졌을까. 그 싹이 오늘날 저 큰 잣나무로 자라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조건이 모이고 흩어졌을까. 그리고 지금 현재도 수많은 조건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저 잣나무는 저렇게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잣나무의 어느 한 작은 부분도 잣나무 스스로로부터 생겨난 것은 없고 모두 다른 것들로부터 왔다 – 물, 햇빛, 땅속의 여러 원소, 바람을 타고 묻어 온 이러저러한 것들 등. 이 모든 조건들 외에 이 나무 스스로로부터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저 잣나무 옆의 바위도 마찬가지다. 그 바위의 어느 한 부분도 스스로로부터 나온 것이 없다. 그 밖에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스스로로부터 생겨난 것은 없고, 그것의 모든 부분은 다른 것들로부터 왔다.

그런데 이 세상 어느 것도 스스로 생겨나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해주는 속성 또는 본성, 즉 자성(自性)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이는 마치 무일푼인 사람이 여러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자기 옷 주머니에 채워놓고 좋아한다고 해서 그를 부자라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면서, 즉 자재(自在)하지 못하면서 자성(自性)을 가질 수는 없다.

 

위 두 단락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겠다.

(1) 조건에 의존해서, 즉 연기하면서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自在)할 수 없다.
(2)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해주는 자성(自性)을 가질 수 없다.
(3) 모든 것은 연기한다.
그러므로
(4) 모든 것은 자성을 결여하고 있다. 즉 모든 것이 공(空)하다.

이것이 ‘연기가 공’이라는 나가르주나의 유명한 명제에 대해 내가 제시하는 논증이다. 나는 내 증명 방식이 나가르주나의 귀류법보다 직관적으로 더 선명해서 좋다고 본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우리가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할 때는, 실제로 우리가 그런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논의의 전개를 위한 방편으로 그런 ‘것’의 존재를 일단 가정할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것’조차 없다. 육조 혜능이 말했듯이,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한편 위의 내 논의와 관련해 “자성(自性, svabhāva)”이라는 단어가 가진 두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bhāva”라는 말은 원래 본성(性)뿐 아니라 존재(在)도 뜻한다. 그래서 “svabhāva”는 ‘스스로의 본성, 즉 자성’뿐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 즉 자재(自在)’도 의미한다. 나는 위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스스로의 본성을 가질 수는 없다는 철학적 주장을 폈는데, 어찌 보면 이런 통찰은 이미 “svabhāva”라는 단어가 ‘자성’과 ‘자재’를 동시에 의미한다는 점에도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17세기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즉)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생각함이 스스로의 본질(自性)임을 파악하고서는 그것을 스스로의 존재(自在)의 근거로 삼았는데, 여기서 데카르트는 생각함 그 자체(自性)를 스스로의 존재(自在)와 동일시하고 있다. 본질과 존재(實在) 또는 자성과 자재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흥미롭다.

자성(自性) 또는 자재(自在)의 결여, 즉 공(空)함과 관련된 논의를 더 진행해보자면, 우리는 엄밀히 말해 ‘자성을 결여하여 공한 것’에서 그런 ‘것’조차 실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해주는 본성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지난번에 논의한 바와 같이 여러 속성들을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어주고 있다는 어떤 기체(基體,substratum)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런 기체의 존재를 인정하기 곤란하다는 논의를 충분히 살펴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할 때는, 실제로 우리가 그런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논의의 전개를 위한 방편으로 그런 ‘것’의 존재를 일단 가정할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것’조차 없다. 육조 혜능이 말했듯이, 본래 한 물건도 없다(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모든 것이 자성(自性)이 없어 공(空)하다는 점은 실은 ‘자성(自性)’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분석하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자성이란 어떤 것을 그 스스로이게끔 해주는 내적(內的)인 본성(intrinsic nature)이다. 이것은 그것 밖에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속성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그 스스로 내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 이 내적인 본성이라는 자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자성이 그것 밖 어느 것의 존재와도 상관없이 그 스스로 내적으로 존재한다면 자성이 다른 것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러면 그것이 생겨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길은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패러독스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것을 자기 기원의 역설(the paradox of self-origination)이라고 부른다.

자성이 스스로로부터 기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생겨날 때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1) 자성이 자기 기원 당시 존재한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생겨날 수는 없으므로, 자성의 자기 기원은 불가능하다.
(2) 자성이 자기 기원 당시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무(無)로부터 나올 수는 없으므로, 자성의 자기 기원은 불가능하다.
(1)과 (2)로부터 자성의 자기 기원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기 기원이 불가능하다면 자성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자성이 자기 기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성이 무시(無始)로부터 언제나 존재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답변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자성(自性)이란 다른 것들과의 외적인 관계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내적 본성(intrinsic nature)이다. 이것은 주어진 어떤 것을 동일한 그것이게끔 해주는 속성이다. 그런데 동일한 것을 동일하게 해주는 속성은 불변하는 속성이다. 변한다면 내적 본성, 즉 자성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어떤 것이 불변한다면 그것은 파괴될 수도 없다. 모든 파괴는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변하면 불멸(不滅)이고, 불멸한 것은 영원하다.1) 그러나 불변 불멸한 자성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나가르주나가 『근본중송』에서 반복해서 보여주며 논증한 잘못된 결론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나가르주나가 『근본중송』에서 논의한 인과(因果)의 예를 살펴보면서 이 문제를 검토해보자. 이 논증은, 만약 원인과 결과가 불변하는 자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면 인과관계에서 아무런 변화가 생겨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변화가 있어야 가능한 인과라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는 곤란한 결론에 이른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가 자성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는 논증이다.

인과란 한 사건(event)과 다른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인데, 나가르주나는 한 물체(object)와 다른 물체(object) 사이의 관계도 인과관계로 보고 논의를 전개했다. 위대한 철학자였지만 사고(思考)가 덜 세련되었던 그 옛날에 살았기 때문에 생긴 오류로 이해해주면서 그의 논증을 살펴보자. 먼저 인과관계에서 원인(cause)과 결과(effect)가 각각 자성(自性)을 가지고 실재(實在)한다고 가정해보자.2) 예를 들어 원인으로서의 콩이 결과로서의 콩나물을 만들어낸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결과로서의 콩나물은 원인으로서의 콩 안에 이미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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