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죽음이란 무엇인가(2)

특집

죽음이란 무엇인가

 

 

 

라마 셴펜 후캄이 들려주는

‘죽음 너머의 길’

 

죽음은 막연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 이르고서야, 삶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었는지, 삶의 모든 것에 대한 근본 적인 질문에 직면하곤 한다. 그러나 불교가 무상과 죽음을 연결해 강조함에도 불구 하고, 독실한 불교도들조차 갑자기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부처님께서 가정과 가족을 뒤로하시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도록 이끈 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죽음에 의해서조차 흔들리지 않는 상태 를 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불교는 전체가 죽음과 죽음을 초월하는 길에 관한 것이라 고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은 오래전에 죽은 현자가 아니라 ‘깨달은 분’이다. 우리들은 삶에 대해 깨닫지 못한 반면 부처님은 깊고 영원한 실재를 깨달은 분이시다. 부처님 은 그곳을 “열반”이라고 하셨다. 열반은 평화, 고통의 끝, 마음의 해방 등을 가리킨다.

열반은 ‘태어나지 않음’ 또는 ‘불사’라고도 불린다.

 

윤회의 혼돈으로부터 벗어나서 열반의 빛과 자유를 향해 가는 길이

법, 곧 다르마이다. 법은 성찰과 명상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이해의

수준으로 침투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길들이는 것을 포함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여정은 하나의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단순히 죽음을 괴로워한다면, 우리는 왜 태어나는가? 부처님께서는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다. 깨달음이라고도 불리는 이 자각은 잠에서 깨어 나 우리가 꾼 꿈이 실제 상황이라고 깨닫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실 재의 본성을 오해하는 한, 우리는 윤회하면서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게 된다. 그것 은 마치 우리가 꿈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과 같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의 다음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윤회라고 부르는 그런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윤회의 혼돈으로부터 벗어나서 열반의 빛과 자유를 향해 가는 방법을 발견하셨다. 그 길이 법, 곧 다르마이다. 법은 성찰과 명상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이해의 수준으로 침투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길들이는 것을 포함한다. 부 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노력해야 할 목표에 대한 영감이나 희망, 그것에 어떻게 도 달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신다. 하지만 죽음을 넘어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다르마를 따르는 것은 우리를 윤회의 함정에 빠뜨린 사고와 행동의 관습에 대항하 는 길고도 힘든 분투를 수반한다.

열반을 향한 깨달음의 목표, 그곳에 이르는 법의 길, 그 길을 보여주는 승가, 이 세 가지는 불교도들에게 삶과 죽음을 향한 희망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세 가지를 우리는 우리들을 보호하는 확실하고 지속적인 원천으로 여기고, 그곳으로 가 는 위안처로 삼아야 한다. 위안처로 가는 길은, 불교 전통의 가장 근본적인 수행인 데, 우리가 그것을 전통적으로 이해하듯이, 수행의 궁극적인 희망으로서 죽음으로부 터의 자유를 제공한다.

불교는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이 덧없고 죽음과 함께 끝난다고 가르 치므로, 우리는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

태어남과 죽음을 초월한 어떤 깨달음이 있다고 우리가 가정한다면, 죽음이 무엇 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감과 기쁨은 성찰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데, 성찰은 무가치한 것에의 집착으로부터 사유를 벗어나도록 하며, 궁극적으로 실 재하고 영원한 가치를 향해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발견하셨 던, 고통을 넘어서 즐겁고 의미 있고 고난을 초월하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며,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자연스럽게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길은 현세의 삶뿐만 아니라 내세의 삶도, 거기에 자신만 아 니라 모든 존재를 위해 고통을 끝낼 확실한 길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이것을 증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더할 필요도 느끼지 못 한다. 결국, 우리는 피상적인 생각에 혼란스러워하기보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우리들 자신을 위해 무엇이 진정으로 실재하는지를 먼저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

번역, 정리|YO크리에이티브

이 글은 라마 셴펜 후캄 스님(Lama Shenpen Hookham)이 2018년 10월 9일자 『라이언스 로어』(https://www. lionsroar.com/a-path-beyond-death/)에 「A Path Beyond Death」라는 제목으로 실은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원래 라마는 산스크리트어로 guru, 즉 스승을 가리킨다. 승려 중에서 전생을 기억할 정도로 수행력이 뛰어난 대덕고승 을 가리킨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스님을 일컬어 라마라고 부른다.

 

 

 

하이데거와 불교의 죽음관

통제 불가능한 죽음

불교에서 죽음은 숱한 무상과 소멸의 인간적인 사례로서 “삶의 현실성이나 삶의 이면”이다.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죽음의 ‘기분’에 직면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본 래적 삶’을 찾아 나선다.

죽음에는 다음과 같은 통제 불가능성이 있어서 근본 불안과 고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첫째,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그리고 통제하지 못할 극한의 고통을 죽음의 과정 에서 겪을 수 있다. 둘째, 죽음은 이제까지 우리가 지켜오고 앞으로도 지켜가려고 했 던 모든 것들을 박탈한다. 셋째, 죽음은 인간이 당연시 여겨온 ‘의식의 터전’ 자체를 무너뜨린다.

죽음은 의도와 통제의 바탕이 되는 의식의 터전이 무너지는 존재 사건이며, 이는 완전히 통제 불가능한 ‘존재 사태’이다. 이 극한의 통제 불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의식의 터전이 무너지지 않음, 곧 죽음이 없는 영원한 자아의 존재를 믿고자 한다.

초기 불교 이래 망상으로 상정되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관은 이런 이유로 형 성되고, 사람들은 이에 집착해 존재 지속에 대한 더 깊은 갈애(渴愛, tahā)로 빠진다.

 

존재의 무화(無化), 하이데거의 죽음

세상은 끊임없는 무화(無化)로써 새롭게 탄생하고 이어진다. 무란 ‘~이 사라짐’ 또 는 ‘~이 아님’이다.

유와 무는 서로 상호 의존한다. 이런 유무의 순환을 통해 세상은 돌아간다.

하지만 “무란 무엇인가?”, “무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를 일종의 존재자인 양 다루는 잘못이다.

존재자가 그저 있다는 엄청난 수수께끼가, 존재자가 아닌 것, 즉 무로써 풀린다. 이런 체험적 무화(無化)는 죽음 앞에서 일어난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있음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평소 당연히 여겨온 존재가 무화된다 는 것에 놀라, 그제야 인간의 눈에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죽는다”, “죽음, 무 는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 걸까?” 인간에게 존재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린다.

현존재에게 ‘존재 이해’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에서 끝나는 것일까? 그저 있음에서 머무는 것일까? 무 그리고 존재는 의식의 터전에 등장해 잠시 머물러 있다 가 이내 숨어버리고 다른 주인공들을 앞세운다. 표상하고 장악하려고 했을 때는 다 가오지 않았던 존재자 자체 그리고 존재자 전체가 현존재인 인간을 찾아온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나만의 존재 가 능성, 죽음 앞에 비로소 드러난 나만의 존재 가능성, 죽음을 생각할 때 더 강렬하고, 그것을 떠올릴 때 죽음 앞에 담담해지는 나만의 존재 가능성이 이 물음에 대한 답으 로써 전해진다. 죽음을 향한 존재인 당신은 어디를 향할 것인가?

 

죽음이라는 실체는 없다

파세나디왕이 세존에게 물었다. “어떠하십니까?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의 몸은 다 금강석으로 되어 있는데, 그 몸도 앞으로 늙음, 병, 죽음이 있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합니다, 대왕이시여. 대왕의 말씀과 같습니다. 여래도 태어나고 늙 고 병들고 죽습니다. 나도 역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오온(五蘊, panca skandha)의 결합으로 탄생한다고 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육체와 의식 작용은 더뎌진다.

“수명(壽命)과 체온(體溫)과 의식(意識)은 육신이 사라질 때 아울러 사라진다. 그 육신 은 흙무더기 속에 버려져 목석처럼 마음이 없다. 수명(壽命)과 체온(體溫)이 사라지고 기관이 파괴되어 육신과 생명이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일시적으로 지속되는 현상적 자아는 있을지라도 영원히 존재하는 고정된 실체로 서의 자아는 없다(無我, anātman)”는 붓다의 가르침은 비본래적 삶을 사는 세인에게 무 척이나 낯설다. 무상한 것들이 뜻대로 쥐어지지 않자 통제 불가능에서 오는 고(苦)가 시작된다. 하지만 마약과 술처럼 이 고통을 잊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오욕(五欲)이다. 인간은 어리석고(癡), 탐욕스러우며(貪), 소유할 수 없는 것들에 분노하며(瞋) 살아간 다. 이 삼독은 인간이 삶의 본래성을 보지 못하는 원인이다.

죽음에 대한 자각과 불안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위한 기회로 사용된다. 붓다는 죽 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수행을 게을리하는 자에겐 부패하는 시신을 관찰하게 하거나 (尸身觀), 드나드는 호흡 단위로 끊어서 죽음을 생각할 것을 권했다(死隨念).

죽음은 극단적인 무상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은 무상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남은 생을 깨달음과 참된 자유를 위해 살아내고자 하는 실존적 결단을 내리게 된다. 불교에서의 근본적 의문과 최종적 지향은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근본적 의문과 지향이다. 삶은 왜 이리 괴로운가? 이 고통은 어찌해야 사라질 수 있을까? 집성제(集聖諦)에서 말하듯이, 고통을 사라지게 하려면 고통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고통의 일 차적 원인은 갈애이며, 이차적인 근본 원인은 무명(無明, avidyā)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 밝아야(明) 하는가? 싯다르타는 만물이 ‘상호 의존적으로 발생(緣起)한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연기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함께 생겨나서 변하고 함께 사라진다. 이 세간에 영원불변하게 머무르는 것은 없고(諸行無常), 영원히 항존하는 고정된 실체로 서의 자아도 없다(諸法無我). ‘연기(緣起)를 본 자는 법(法)을 본 것이며, 법(法)을 본 자는 연기(緣起)를 본 자’이다.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여 행(行)이 있으며, 행을 조건으로 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名色)이 있으며,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6처(處)가 있으며, 6처 를 조건으로 하여 촉(觸)이 있으며, 촉을 조건으로 하여 수(受)가 있으며, 수를 조건으 로 하여 애(愛)가 있으며, 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取)가 있으며, 취를 조건으로 하여 유 (有)가 있으며, 유를 조건으로 하여 생(生)이 있으며, 생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老死)의 근심과 슬픔, 번민과 괴로움이 있다.

불교의 죽음 이해와 이를 통한 죽음의 극복이라는 것은 생명현상 자체를 인연 생 기설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연기설의 12단계를 따라가면, 삶의 시작은 결국 죽음 이라는 단계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실체가 본래 없다는 것을 깨 달아야 한다. 이런 깨달음이 바로 해탈이요, 불생불멸이다.

밝지 못한 마음(無明) 때문에 고(苦, duhkha)가 생기는데, 연기법을 깨달아 세계의 참 모습을 파악하면 고는 해소될 수 있다. 고는 무명과 연기법을 모르고 생로병사를 인 정하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 때문에 생긴다.

‘그러려니’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유와 무, 긍정과 부정, 동과 정은 서로 다르나 떨어질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 이치는 연기 곧 자성 없음의 공(空, śūnyatā)에도 해당된다. 그래 서 공 또한 공하다(空亦復空). 공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생사로부터 벗어난다. 세 상을 공으로써 바라보면 마음이 어딘가에 머무르지 않는다(無住). 변하는 것들 그리 고 나의 죽음까지도 ‘그러려니’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고요한 평온과 자유를 얻을 수있다. 이는 타오르는 불길이 ‘훅!’ 하고 꺼져 고가 사라지고 시원함을 느끼는 상태, 열반(涅槃, nirvāṇa)으로 가는 길이다.

『열반경』에서는 붓다의 입멸 과정을 묘사하며 정념(正念)과 선정(禪定)을 강조한다. 육신 소멸, 무여의 열반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의식의 깨어 있음(念, sati)은 열반을 획득한 자의 징표이다. 마지막 순간에까지 유지되는 ‘깨어 있음’ 그리고 ‘다시 태어 남이 없음(不生)’, 이 두 가지가 바로 불교적 의미의 죽음 극복이다.

불안과 죽음은 오롯이 현존재 자신, 수행자가 떠맡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확신으 로부터 죽음에로 자신을 이끌 때 현존재는 본래성과 전체성을 확보한다. 하이데거와 붓다는 본래성을 찾게 만드는 불안과 무상감에서 비롯한 깨달음을 무(Nichts)와 공(空) 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 풀고 묶음의 진리를 열어 보인다. 두 철학은 세상이 순간적인 무화-탄생의 순환, 곧 해체-재구성의 흐름임을 안다.

죽음 앞에 하얗게 녹아내린(解體) 의식의 터전이 알레테이아로 다시 얽힌다(再構成). ‘고는 어찌 해결할 수 있는가? 왜 괴로운가?’ 연기적 물음에 죽음은 공(空)을 답한다. 얽힘으로 연결된 유위의 세계는 무화를 거듭하며 생사를 반복하는 역동의 세계이다. 공마저 자성이 없으니 이는 실로 얽힘이다(事事無法界). 풀고 묶음의 진리는 표상이 아닌 내맡김에서 오는 이해이고, 언어를 뛰어넘어(敎外別傳, 不立文字) 내려놓음에서 오 는 직관이다.

이 글은 『공자학』 제35호(2018년 6월)에 수록된 서울수송초등학교 이슬희 교사의 논문 「하이데거와 불교의 죽음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발췌, 윤문한 것이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학술 언어를 일상 언어로 고쳐 실었다.

이슬희 서울 수송초등학교 교사로 현재 서울대학교 대학원 유아교육과에 재학 중이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죽음은 끔찍한 것, 피하거나 지연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 함께할 동반 자이다. 이런 지각으로부터 광활함에 대한 엄청난 의미가 생긴다.(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s Krishnamurtis, 인도 철학자·작가)

서론 _ 인간에게 죽음은 타인의 죽음만 있다

“태양과 죽음은 서로 마주칠 수 없다.”

라로슈푸코(La Rochefoucauld)의 이 말은 죽음이라는 것이 쉽게 숙고될 수 없는 것임 을 가리킨다. 우리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지, 즉 생명체에 미치는 영향을 초탈함으 로써 극복할 수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장 불행한 자에게도”라고 칸 트는 말했다. 칸트는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보다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간은 받아들이기 힘들며 이로부터 두려움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하이 데거는 ‘죽음에의 존재’로서 인간을 파악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나의 삶에 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나의 삶의 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나를 덮칠 수 있는 존재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이 사실을 인식함과 함께 불안과 고독 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죽음이란 고유한 것이며, 결코 남과 바 꿀 수 없는, 그리고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실존 상황이므로 언제 어디에서 찾 아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라고 호소했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의식한다.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실존적 태도는 죽음이 인 간에게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혼불멸에 대하여

인류 문화는 죽음에 대한 몇 가지 대처 방법을 갖고 있다. 죽음의 기원에 대한 신 화적 설명과 사후세계의 신앙들은 죽음에 대한 해결안을 관념과 공상의 영역에서 찾는 것이다.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행해지는 여러 가지 의례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하려는 시도이다. 인류 문화는 죽음을 개인의 인격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간주 해 사라짐에 대한 대상을 준비한다.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그것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 인 간의 모순된 태도를 현대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Edgar Morin)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동일한 의식이 죽음을 부인하고, 또 인정한다. 이 의식은 죽음이 무가 된다는 것 을 부인하고,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이러한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인 방식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 육체가 사라진 후에도 영혼은 살아남는다고 믿는 것이다. 동양의 종교에서는 다른 생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윤회사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 분의 종교는 영혼의 불멸을 확신한다. 영혼의 불멸을 믿는다면 죽음은 단순한 도정 에 지나지 않기에 인간은 스스로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철 학자는 삶을 생각해야 하는가,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가? 전통적으로 철학은 이 문제 에서 상반된 입장을 취하는 듯 보인다. 하이데거가 죽음, 그리고 그와 관련된 실존적 염려와 두려움을 철학의 중심에 놓은 데 반해 몇몇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현실의 행복을 저해할 것을 우려하면서 죽음은 자연과 신의 뜻에 일치하는 자연 스러운 것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물론자인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육체와 함께 영혼 역시 소멸하기에, 즉 죽음과 함 께 죽음의 두려움을 감지할 수 있는 이성과 정신 역시 사라지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와 관련된 에피쿠로스의 다음 문장은 죽음의 두려움을 부정하는 작 가들에 의해 수없이 인용되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만날 수 없다. 또는 죽음이 이미 거기에 있을 때 나는 이미 거기에 없기 때문에 죽음을 알 수 없다.”

죽음은 나와 관계가 없다는 에피쿠로스의 말은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에게 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죽음을 직시하라는 하이데거의 분석이 에피쿠로스나 스 피노자의 지혜보다 더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는 『죽음』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죽음에 대한 현자들의 외면과 조소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 모든 것은 아름답고 좋다. 그러나 비탄에 잠겨서 위로 받을 수 없는 아폴로도로스 크리톤과 파이돈의 의견은 전혀 다를 것이다. (…) 왜냐 하면 현자의 죽음은, 현자도 현자 자신의 ‘개인적인 진리’와 이데아적인 진리를 완전 하게 조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삶의 유한성을 고려하지 않는 삶에 있어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릴케는 “스스로의 죽음이란 삶과 함께 성숙하는 과일의 핵과 같다”고 말했다. 죽음을 인식하기에 인간은 동물과 달리 도달해야 할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생에 보다 깊고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죽음을 생의 일부로 받아들 일 때 삶은 성숙하게 된다.

 

결론 _ 죽음 이상을 추구하면 죽음은 극복된다

죽음에 대한 반성에는 역설적인 성격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더는 존재하 지 않을 때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죽음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개발할 수 없다. 인간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에 본능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다.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는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삶을 혐오한다”고 말 했다. 실제로 죽음의 순간에 죽음을 가장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가장 충만하고 가장 행복한 삶을 향유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진정한 현자란 자신의 유 한성과 죽음을 충분히 인식하는 동시에 그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죽음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목표를 세우고 이를 추구하기 위해 정진한다. 목표는 시간성 을 가진다. 목표의 마지막 시점이 죽음이다. 따라서 생의 유한성과 시간성을 고려하 면 목표를 세우는 것이 가능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 무의미하 다. 그러므로 어떤 새로운 것도 추구하지 못한다는 것은 일상의 반복에 만족하는, 역 사성의 부재이다. 14~15세기에 유행했던 목판화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늘 너 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해라(memento mori.).” 유럽의 중세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발견 하던 시기였다. 그로부터 서구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죽음을 터부시하지 않았다.

현재의 생에서 그 끝에 대한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시도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는 원동력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것 은 단순히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이생에서 실천해야 할 것을 실천하지 못 한 데서 오는 불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죽음은 인생을 박탈하 는 게 아니라 인생으로 하여금 다양한 생의 의미를 창조하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

이 글은 1996년 프랑스 바칼로레아 시험 문제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 프랑스 각계의 지식인들 이 작성한 것을 편집해 수록한 최영주 편,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를 토대로 하고 이밖에 별도로 수집한 답안들을 자 료로 해 재구성한 것이다.

바칼로레아(프랑스어: Baccalauréat)는 프랑스에서 시행하는 교육 과정의 중등 과정 졸업 시험이다. 1808년 나폴레옹 에 의해 시작됐다. 바칼로레아 문제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 담당 교사들, 교수들, 대학생 및 대학원생들, 전문가들이 자 기들만의 답안을 작성해 공개한다. 죽음은 바칼로레아 단골 시험 문제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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