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6|관계(關係)__홍창성

관계(關係)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고요한 산사(山寺) 뜰 앞에 한 노스님께서 잣나무를 등지고 서 계시다. 수묵화(水墨畵)처럼 말없이, 미동(微動)도 없이 계시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문(禪門)은 이런 멋진 적정(寂定)의 장면을 표현하는 침묵의 문화에 익숙하다. 그런데 불법(佛法)을 현대 철학으로 접근하는 나는 여기서도 숨 막히게 역동적인 연기(緣起)의 그물이 펼쳐져 있음을 본다. 철학자로서 이런 그물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연기법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생성 지속 소멸하는 참모습을 보여준다고 가르쳐왔다. 위의 장면에서 노스님과 뜰 앞의 잣나무라는 두 사물은 어떤 연기의 그물로 포섭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는 연기가 인과(因果)(비非인과적) 관계(關係)로 분류된다고 논의해왔다. 노스님과 잣나무 사이에는 인과의 징표라고 할 시간적 간격이나 어떤 중간 단계들이 없기 때문에 그 둘이 원인과 결과로 이어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대신 이 둘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다면 그것은 비인과적 관계일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그런 비인과적 관계란 어떤 종류의 연기일까.

니까야에 나오는 붓다의 연기에 대한 서술을 상기해보자면,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노스님”과 “(뜰 앞의) 잣나무”를 각각 “이것”과 “저것”에 대입해보자 (“노스님”과 “잣나무”의 순서를 바꾸어도 상관없다). 그러면

노스님이 있을 때 잣나무가 있으며, 노스님이 생겨나므로 잣나무가 생겨난다.

노스님이 없을 때 잣나무가 없으며, 노스님이 소멸하므로 잣나무가 소멸한다.

화엄의 법계연기에 밝은 독자들은 위의 문장들을 쉽게 이해하겠지만, 이런 배경지식 없이 보면 이 문장들은 단적으로 거짓이거나 기껏해야 알쏭달쏭한 수수께끼일 뿐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조명하고 해결해야 붓다의 연기법을 다시금 뒷받침할 수 있을까?

 

1. 사물의 구조와 사물 간의 관계에 대한 서양의 전통적인 견해

서양인들은 사물이 어떤 기체(基體)에 속성이 예화(例化)되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왔다. 의자(chair)를 보기로 들어보면, (이 의자의) 모양, 색깔, 무게, 단단함 등 여러 속성(property)(이 의자의) 기체에 예화되면서 의자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고대 희랍의 플라톤은 이런 속성을 추상적인 보편자(universal)로 보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기체마다 각각 따로 존재하는 개별자(particular)로 보았다. 이 개념들을 하나씩 설명해보겠다.

기체는 실체(實體, substance)라고도 표기되는데, 엄밀히는 실체보다 기체(substratum)라고 말해야 옳다. 왜냐하면 실체란 주로 ‘독립적 존재자(independent existence)’로 정의(定義)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자들은 이러저러한 속성들이 예화되는 바탕으로서 기체의 존재가 요구된다고 생각해서 ‘밑바탕’이라는 의미의 기체의 개념을 존재론에 등장시켰다. 또 속성들이 닻을 내릴 수 있는 곳인 기체가 없다면 이 속성들이 각기 다른 곳으로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곳에 모여 사물을 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도 있다.

속성(property)에는 추상적인 보편자와 시공(時空) 안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속성) 개별자(particular)의 두 종류가 있다. 지구본과 축구공 그리고 탁구공이 모두 둥근 이유는 구형(sphericity)이라는 보편자가 이것들에 예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이런 형이상학적인 추상적 존재자는 없지만 지구본과 축구공 그리고 탁구공에는 각각 구형(sphericity)이라는 속성 개별자가 존재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 개별자는 모두 “둥글다”라는 술어(predicate)와 관련 있지만, 각자는 서로 별개의 존재자이다. 최근에는 속성 개별자론과 아비달마의 다르마론의 유사성에 대한 비교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서양의 전통적 견해에 의하면, 위의 노스님과 잣나무의 예에서 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란 실재(實在, real)하지 않는다. 노스님의 경우 스님의 기체에 그러그러한 속성들이 예화되어 있고, 잣나무 또한 나름대로의 기체에 나름대로의 속성들이 예화되어 있다. 노스님은 노스님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이고, 잣나무도 나름대로 실체이다. 이 둘 각자는 스스로의 존재를 위해 서로가 필요하지 않다. 한편, 둘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어서 노스님과 잣나무가 가진 속성들 사이를 자연과학의 법칙으로 연결할 길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노스님과 잣나무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견해에 의하면 “노스님이 있을 때 잣나무가 있으며, 노스님이 생겨나므로 잣나무가 생겨난다. / 노스님이 없을 때 잣나무가 없으며, 노스님이 소멸하므로 잣나무가 소멸한다”는 관계로서의 연기론은 단적으로 틀리다. 그리고 서구인 대부분은 노스님과 잣나무 사이에 공간적 거리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비인과적 관계는 세상의 움직임과 변화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實在, real)하는 관계라고 보지 않는다.

 

2. 서양의 전통적 견해에 대한 비판

2,000년 이상 서구인들의 사고를 지배한 위의 견해는 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데이비드 흄은 기체(基體)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것을 ‘불가사의한 괴물(unintelligible chimera)’이라고 불렀다. 모양, 색깔, 무게, 단단함 등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속성과는 달리 기체는 그 존재를 결코 오감(五感)으로 확보할 수 없다. 또 아무 속성도 예화되어 있지 않은 기체는 그 존재를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의 독립적 존재를 인정할 수도 없다.

흄은 기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속성 개별자들이 모여서 이루는 집합이 사물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비유로 설명하기 위해, 동네 친구 여섯이 모여 ‘화랑배구단’이라는 팀을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이 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여섯 명의 배구 선수일 뿐, 어떤 불가사의한 기체 같은 것은 없다. 이 여섯이 모여 배구를 즐길 때 우리는 편리상 ‘화랑배구단’이라는 팀이 게임을 한다고 말로 표현할 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선수들과 그들의 플레이일 뿐, 그 밖에 ‘팀’이라는 불가사의한 괴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의자의) 모양, 색깔, 무게, 단단함 등의 속성이 모여서 우리가 보통 “의자”라고 편리하게 부르는 물건이 존재하는 것일 뿐, 이 속성들이 닻을 내려야 하는 기체가 따로 존재한다고 볼 이유가 없다.

현대 분석철학 주류와 불교의 인명론(因明論)은 보편자로서의 속성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런 부정을 위해 굳이 철학적 논변을 소개할 필요는 없겠다. 상식적으로 내가 앉아 있는 의자, 식당의 의자들, 강의실의 의자들과 같은 개별적인 의자들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지, 이것들의 원형으로서의 완벽한 의자의 보편자가 어떤 추상적인 공간에 따로 실재(實在)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정한 의자의 모양, 색깔, 무게, 단단함도 이 구체적인 의자에 모양, 색깔 등의 속성이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모양이나 색깔의 보편자가 형이상학적 공간에 따로 있고 그것들이 이 의자에

색깔과 무게 그리고 질량뿐 아니라 의자의 모양과 단단함 등의

속성 개별자도 모두 조건에 의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을 가지지 않은 채

그러그러(如如)하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자성을 가진 속성 개별자의 존재에 대한

현대 서양철학과 아비달마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색깔과 무게 그리고 질량뿐 아니라 의자의 모양과 단단함 등의

속성 개별자도 모두 조건에 의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을 가지지 않은 채

그러그러(如如)하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자성을 가진 속성 개별자의 존재에 대한

현대 서양철학과 아비달마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3. 관계(關係)로서의 연기(緣起)

기체와 속성 보편자 또는 속성 개별자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성립하는 서양의 전통적 견해는 철학적으로 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 이제 나는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불교의 연기론으로, 특히 관계로서의 연기의 관점에서 존재 세계를 비추어보겠다.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에 빨강 넥타이를 즐겨 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의복 문화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라고는 해도 인구가 6,000만 명 정도 되는 나라니까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분명 최소한 한 명은 빨강 넥타이를 자주 맬 것이다. 아직까지 이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어도 우리는 이것이 참이라는 점을 안다. 한 번도 의식의 표면에 떠올리지 않았어도 최소한 잠재적으로는 그렇다고 안다. 나도 물론 그렇다. 그런데 이 빨강 넥타이를 좋아하는 영국인이 방금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나는 방금 수만 리 떨어진 나라에 있는 이 사람과 맺고 있던 관계 하나를 잃었다. 방금 전까지 나는 ‘빨강 넥타이를 즐겨 매는 영국인 한 명’을 수만 리 밖에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사람이 없다. 내가 의식했든 안 했든 그런 관계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 관계가 사라진 것이다. 이 사람의 사망 소식을 직접 전해 듣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내게 변화가 일어났다.

위에서 전개한 논점을 한껏 확대해보면, 나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그리고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1) 이런 연결된 관계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가 연결된 관계로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자와 또다시 관계를 맺고, 이런 관계맺음의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이것이 화엄(華嚴)에서 논하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과정이다.

이제 노스님과 잣나무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노스님이 있을 때 잣나무가 있으며, 노스님이 생겨나므로 잣나무가 생겨난다. / 노스님이 없을 때 잣나무가 없으며, 노스님이 소멸하므로 잣나무가 소멸한다”는 구절은 이제 위 단락에서의 논의로 알맞게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다. 노스님과 잣나무는 서로 수많은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시공간의 좌표에서의 서로의 위치로 맺는 관계, 서로 다른 키와 높이 그리고 무게로 맺는 관계, 서로 주고받는 물질(산소와 이산화탄소)로 생기는 관계, 서로 존재하는 만유인력 등 모두 나열하기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무수히 많은 관계를 중중무진하게 가지고 있다. 노스님과 잣나무는,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들어가 있다(相入). 이렇게 상입해 있는 노스님과 잣나무가 함께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점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

혹자는 노스님께서 입적(入寂)하시더라도 잣나무는 계속 존재할 텐데 어떻게 둘이 함께 소멸하느냐고 질문할 수 있겠다. 우리는 여기서 노스님 입적 후에도 살아남은 잣나무가 같은 잣나무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노스님의 입적으로 노스님과의 관계가 사라진 다음에는 다른 잣나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스님의 입적과 동시에 노스님과 수많은 관계로 맺어졌던 그 예전 잣나무도 소멸되는 것이다. 한편 노스님이 사미스님이셨을 때 잣나무가 아직 싹이 터 자라나지 않았다면 그때의 스님은 잣나무가 생겨난 다음의 노스님과 같은 스님이 아니다. 그 사미스님은 잣나무가 생겨났을 때 이 잣나무와 맺는 수많은 관계에 의해 새로운 (노)스님으로 다시 태어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스님과 잣나무는 함께 생겨났다.

위에서 인용한 “노스님이 있을 때 잣나무가 있으며, (…) 노스님이 소멸하므로 잣나무가 소멸한다”라는 구절의 표현이 극적(劇的)으로 단순화되어 있어서 알쏭달쏭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가 관계로서의 연기를 이해한다면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4. 현대물리학과 관계의 형이상학(The Metaphysics of Relations)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물체의 길이나 두 사건 사이에 걸린 시간이 관찰자의 속도에 따라 달리 측정된다는 점을 지난번에 밝히면서 이것도 연기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길이 또는 시간과 움직이는 관찰자의 속도 사이에 ‘인과로서의 연기’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이 관계는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관계로서의 연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새로운 용어를 제안해 표현하자면, 이것은 인과연기가 아니라 관계연기가 이루어지는 경우다.

지난 10여 년 동안 형이상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은 주로 양자역학의 연구 결과를 이용해 ‘관계의 형이상학(the metaphysics of relations)’을 발전시켜왔다. 학자들이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소립자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의미가 있다는 점에는 거의 모두가 동의한다. 이때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속성들 사이의 수학적 관계이다. 소립자들의 세계에서 인과(因果)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현상이 많이 보고되다 보니 미시 세계에서는 인과연기가 아니라 수학적으로 기술되는 관계연기로 법칙적 규칙성을 표현하는 데 더 주목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의 현상–쌍을 이루는 입자들은 서로가 우주의 반대편에 존재해도 항상 동시에 움직이고 변화하는 현상–도 인과연기로는 설명할 수 없고 일종의 관계연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momentum)을 동시에 관측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도 인과연기가 아니라 관계연기의 일종이다.

그런데 입자의 모든 속성이 다른 속성과의 수학적 관계를 통해서만 그 존재의 의미가 부여된다면, 입자의 개별적 존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위에서 데이비드 흄이 속성이 모여 있는 기반으로서의 기체(基體, substratum)란 불가사의한 괴물로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살펴보았다. 불교도 이런 괴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시 세계라고 해서 속성들을 여럿 붙잡아 하나의 입자의 속성들로 묶어주는 어떤 기체가 있다고 보아야 할까? 우리가 앞의 화랑배구단의 예에서 보았듯이, 이런 기체가 없이도 속성들끼리 서로 밀접하게 관계하며 모여서 구성하는 것이 우리가 편의상 “입자”라고 부르는 어떤 가상의 대상이라고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입자에 관한 모든 것을 수학적 관계로 파악되는 속성들을 통해 이해해야 하며 따라서 입자의 어떤 존재적 밑바탕 같은 것을 따로 상정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입자를 구성하는 속성 개별자들 각각은 그 존재 양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위에서 현대 철학의 속성 개별자와 아비달마의 다르마가 대승의 관점에서 본 연기론에 의해 자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미시 세계의 속성 개별자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들도 자성이 없어서 공(空)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입자의 모든 속성이 다른 속성과의 수학적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또 그것에 존재의 의미가 부여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미시 세계의 모든 것을 수학적 관계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 나는 관계연기의 중중무진을 설하는 화엄의 법계연기를 받아들이는 신심(信心) 깊은 불자(佛者) 물리학자들이 이러한 이론적 작업을 멋지게 완성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1) 물리학자들도 중력/인력과 관련해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뉴턴의 중력의 법칙에 의하면 질량을 가진 물체들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중력/만유인력)이 있는데, 이 힘은 서로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그래서 서로 우주 반대쪽에 있는 질량이 아주 작은 물체들 사이에도, 비록 그 힘이 극히 미미하지만, 이렇게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인력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다른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한다.

2) 이 주장은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비판자들은 우리의 존재세계가 근본적으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물질의 세계이지 추상적인 수학의 세계가 아니라면서 철두철미한 환원주의적 관계의 존재론에 반대하고 있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를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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