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전생이란 무엇인가__성해영

‘전생’이란 무엇인가

 

성해영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우리는 이 세상으로 거듭 되돌아올까, 아니면 단 한 번만의 생만 주어진 존재일 까? 인간이 반복해 태어난다는 ‘윤회론(輪回論)’은 ‘생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전생(轉 生)’이라고도 지칭된다. ‘육체를 다시 입다’는 뜻의 ‘리인카네이션(reincarnation)’이나, ‘영혼이 거듭 옮겨 간다’라는 희랍어 ‘메템사이코시스(metempsychosis)’ 역시 동일한 의미이다.

한편 윤회론은 전형적인 종교적 세계관이다. 우리가 현재의 삶(現生) 이전에도 존 재했고(前生), 죽음 이후에도 다시 태어난다(來生)는 주장은 보이지 않는 차원을 전 제로 하기 때문이다. 전생에 대한 믿음은 시공을 초월한 현상이다. 피타고라스 (Pythagoras)와 플라톤(Platon), 그리고 그들의 철학을 종교적으로 해석한 신(新) 플라톤 주의자들은 대표적인 윤회론자였다. 힌두교,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에서도 윤회론은 핵심적인 교리였다.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에서는 전생이 낯설어 보이지만, 이 전통에서도 윤회론은 거듭 등장했다. 수피즘, 카발리즘과 같은 세 종교의 신비주의는 윤 회와 전생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윤회론은 다양한 모습으로 부활했다. 소로(Thoreau)나 에머슨 (Emerson)의 초절주의(超絶主義), 블라바츠키(Blavatsky)의 신지학(神智學), 슈타이너(R. Steiner)의 인지학(人智學), 허버드(L. Ronald Hubbard)의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 등이 대 표적이다. 켄 윌버(Ken Wilber)의 자아초월 심리학과 뉴 에이지(New Age) 영성에서도 윤회를 받아들인다. 『세스 매트리얼(Seth Material)』, 『신과 나눈 이야기(Conversations with God)』, 『기적 수업(A Course in Miracles)』같이 널리 알려진 채널링(channeling) 서적들 역시 한목소리로 윤회와 전생을 역설한다.

‘잠자는 예언자(sleeping prophet)’라는 별칭을 가졌던 케이시(Edgar Casey)도 전생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최면 상태에서 타인의 전생을 읽어냈던 그는 전생이 현재 우리 삶의 많은 모습들을 결정짓는다고 보았다. 한편 버지니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했 던 이안 스티븐슨(Ian P. Stevenson)은 제도권 학자이면서도, 전 세계에서 3,000여 건이 넘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의 사례를 평생 동안 수집하고 그 결과를 정리해 방대 한 저서를 남겼다.

전생에 대한 믿음은 종교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전생에 못 이룬 사랑을 다 룬 <은행나무 침대(1996)>를 비롯해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 2013)> 사례처럼 윤회는 동서양 영화와 문학작품, 드라마의 소재로도 각광받는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갤럽의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불교인은 물론 가 톨릭 신자 29%와 개신교 신자 34%, 심지어 비종교인들의 21%가 윤회를 믿는다 고 응답했다. 전체 인구에서 전생을 수용하는 비율은 1984년의 21%에서 2014년에 28%로 높아졌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전생 에서 찾는 일은 놀랍지 않다. 그렇다면 윤회와 전생이 여전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전생이라는 개념에 왜 이토록 끌리는 것일까?

무엇보다 윤회와 전생은 우리 삶을 더 넓은 맥락 속에 놓는다. 현생(現生)이 연속되는 여러 생(生) 중 하나라는 믿음은 지금 이곳에서 겪고 있는 삶의 의미를 바꾼다. 고 통과 시련을 포함해 가족 관계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이 새롭게 비춰진 다. 이번 삶이 여러 생들의 맥락 속에서 조감(鳥瞰)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의 정 체성 역시 변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여러 생을 사는 존재라면, 지금 이곳의 나는 그저 많은 ‘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방식으로 윤회와 전생은 지금 이곳이라는 고정불변의 한계를 벗어나도록 만 드는 여백(餘白)의 감각을 제공한다. 우리 스스로가 물질적 한계를 초월한 더 큰 존재 임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확장된 자아 정체성은 고통과 시련을 의연하게 수용하도록 도울뿐더러, 이번 생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지 않는 삶의 ‘초연함’을 획득하게 한다. 다시 주어질 수 있는 ‘다음 기회’가 우리에게 큰 심리적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회는 위험할 수도 있다. 만약 현생의 불운과 행운을 모두 전생에서 연유 한 것으로 주장하면서, 행운은 독점하고 타인의 불행을 방관한다면 윤회는 우리를 얽매는 올가미로 작용한다. 또 이런 믿음은 현실을 개선할 의지를 약화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전생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나약함을 합리화하는 믿음에 불과한 것일 까? 달리 말해 고통과 시련에 직면한 우리를 위로하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 걸까?

수행이나 은총으로 인해 전생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은 종교사에서 드물지 않다. 불 교나 힌두교가 주장하는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비범한 능력에는 자신과 타인의 전생을 읽는 ‘숙명통(宿命通)’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힌두교는 전생을 아는 ‘기억 혹 은 의식(sm̋ti)’이나 ‘이전 생에 대한 앎(pŗrvajanma-jxăna)’을 얻는 능력(siddhi)을 자세하 게 설명해왔다. 명상이나 수행, 전생 퇴행, 꿈 등을 통해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되었다 는 보고 역시 최근에는 흔하다.

그러나 여러 경로를 거쳐 알게 된 과거의 삶이 실제로 나의 전생인지를 모두가 납 득하게 입증하는 것은 어렵다. 요컨대 내가 기억한 전생이 내 것이라는 사실을 객관 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전생은 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한다. 이 런 연유로 실증주의적 과학이 지배적인 시대에 전생이라는 주제는 종교적 상상에 불과하다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윤회와 전생 개념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수용하는 이들에게는 큰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것보다 냉정한 가르침이 있을까. 거두는 시점이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돌아온다는 점에서. 그러니 전생에 관 한 불교의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심장하다. 전생을 알고 싶으면 현생을 보 고, 내생을 알고 싶으면 역시 현재 삶의 모습을 보라는 지혜 말이다.

 

 

성해영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종교학과 석사, 미국 라이스(Rice)대학교 철학 박사(종교학)를 받았 다. 현재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저서로는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공저), 『문명 안으로』(공저), 『문명 밖으로』(공저), 『문명의 교류와 충돌 : 문명사의 열여섯 장면』(공저), 『다시 이어지다: 궁극의 욕망을 찾아서』(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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