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5|인과(因果)__홍창성

인과(因果)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연기(緣起)를 구성하는 여러 관계 가운데 그 대표를 하나만 뽑는다면 그것은 단연 인과(因果)일 것이다. 남전불교(南傳佛敎)에서는 인과 이외의 관계는 연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연기와 인과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 여주기도 한다. 한편 서양에서는 인과관계가 이 우주를 하나의 체계로 동여매고 있 는 시멘트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로 인과의 개념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필요불가결하다. 그래서 우리가 연기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과의 문제를 좀 더 엄밀히 검토해보아야 한다.

 

1. 우리 일상 속의 인과

“폭설이 많은 교통사고를 유발했다,” “지진으로 여러 건물이 파손되었다,” “비료 를 주면 농작물이 더 잘 자란다,” “적당한 운동이 심장마비의 위험을 줄인다,” “흡연 이 폐암을 초래한다,” “경찰이 살인 도주범을 사살했다,” “신선한 야채가 암을 예방 한다,” “타향살이가 향수병을 가져왔다,” “독경과 명상이 수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끈 다” 등등 우리 대화에서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문장은 무수히 많다. 일상에서 그렇지 않은 문장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위의 문장들같이 문법적으로 분명히 인과관계를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문장 형태 를 조금 바꾸어보면 인과를 나타내는 것도 많다. “물은 섭씨 100℃에서 끓는다”라는 자연의 법칙은 표면적으로는 원인과 결과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이 문 장을 “어떤 것이 물이라면 그것은 섭씨 100℃에서 끓는다” 또는 “어떤 것의 물임이 그것이 섭씨 100℃에서 끓음을 초래한다”라고 해석하며 그것이 인과관계를 보여주 는 문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고전물리학이 제시한 모든 법칙은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인과법칙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 나아가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생명 세계에 대한 문장도 “어떤 것이 백조임이 원인이 되어 그것이 흼을 결과한다”고 바꾸어 해석하며 인과법칙의 한 종류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처럼 20세기 이전에 발견 된 자연의 법칙은 모두 인과법칙으로 이해 가능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문장이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 어 “춘원은 이광수다”라는 동일성 진술(identity statement)은 춘원과 이광수가 하나의 동일 인물임을 말하는데, 이와 같이 동일성이란 어떤 것과 그것 자체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둘 이상의 관계여야 가능한 인과관계가 될 수 없다. 또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분석판단도 개념과 개념 사이의 관계일 뿐, 시공(時空) 속에 존 재하는 다른 둘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인과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은 삼단논법의 문장들 사이의 관계도 논리적일 뿐 인과관계는 아니다. 비록 이 모든 관계들이 연기 의 개념으로 포섭될 수는 있지만 인과의 개념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과는 연기 의 부분집합일 뿐이다.

 

2. 인과에 대한 몇 가지 전통적 견해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연기란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이다. 인과 또한 전통적으로 또 상식적으로도 ‘여러 조건이 충족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된다’라 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개념이 인과 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결과가 일어나지 않을 때 그 조건을 필요조건이라 고 한다. 예를 들어 산소가 없다면 성냥불이 붙지 않는데, 이때 산소의 존재는 성냥 불을 켜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비가 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이런 두 조건만을 충족해서는 성냥불을 켤 수 없고 그 밖의 많은 필요조건들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이렇게 필요조건들이 모두 모여 함께 성냥불을 켜기 위한 충분조 건을 형성한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조건들이 충분히 모여야 연기(여기서는 인과)가 이루어진다.

혹자는 여러 필요조건들이 단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갖추어져 배경조건으로 완성 되어 있는 가운데 이 나머지 하나의 조건만 충족시켜 결과를 이루어낼 수 있다면 그 마지막 조건을 특별히 ‘원인’이라고 보고 나머지 조건들은 모두 ‘배경조건’으로 취급 한다. 나는 이런 관행이 우리가 인과관계를 설명 또는 예측하려 할 때 우리의 인식적 편의(epistemic expedience)를 위해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존재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필요조건이 동등하게 중요하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의 조건을 원인으로 대우하고 나머지를 그냥 배경조건으로 무시할 이유 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요조건 가운데 단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다면 성냥불 이 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원인과 배경조건을 명 확히 구분하는 데 반대하며 인과관계에서 원인이라는 개념은 모든 필요조건이 충족 된 상태(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조건들이 다 모인 상태), 즉 충분조건에 대해서만 적용되어야 한 다고 생각한다.

 

규칙적 생멸(生滅)로서의 인과

움직이는 당구공 A가 정지해 있는 당구공 B와 충돌하면 A가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대신 B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도 같은 현상이 규칙적으로 관 찰된다. 건조한 성냥을 바람 없는 곳에서 거친 바닥에 그으면 불이 붙는다. 수백 수 천 번을 관찰해도 마찬가지다. 들고 있는 공을 놓으면 바닥으로 떨어진다. 수천수만 번을 반복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그런데 공을 놓는 1조 번째에도 같은 결과가 나 올까? 놓인 공이 반드시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진다는 어떤 필연적 법칙이 있을 까? 설혹 그런 법칙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 공을 놓는 1조 번째에도 그 법칙이 똑같 이 작용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전지전능하다는 신(神)이 마음을 바꾸어 자연의 법칙 을 변화시킨다면 공은 하늘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도 우리의 반복된 관찰이 보이는 패턴과 무관 하지 않다. 18세기 데이비드 흄(David Hume)에 의하면 사람들은 반복된 관찰로부터 습관적으로 형성된 마음속의 연상 작용에 의해 당구공 A가 B를 움직이게 할 것이고, 성냥불이 붙을 것이며, 또 공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추측하고 예상하며 또 그 런 기대를 바탕으로 자연법칙을 추상해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법칙 자체를 결코 관찰한 적이 없고 또 당구공의 움직임과 성냥불의 켜짐 그리고 공의 낙하가 이루어 진다는 필연성 자체 또한 눈으로 본 적이 결코 없다. 움직이는 당구공에 숨어 있다 는 힘, 성냥이 가졌다는 화학에너지, 그리고 공을 끌어당긴다는 중력이라는 것도 모 두 이론적으로 추측하고 추상해낸 것들일 뿐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거나 관찰 하지는 못했다. 물론 요즘 현대인 가운데는 자연법칙과 힘, 에너지, 중력 등과 같은 이론적 대상의 객관적 실재를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과학의 역 사를 읽다 보면 이것이 참으로 순진한 믿음이라는 점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데이 비드 흄은 위와 같은 그의 예리한 통찰을 바탕으로 엄밀한 논증을 전개했고, 이는 지난 2세기 이상 대부분의 철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져왔다. 흄의 견해는 사물이 연 기하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實體)나 그것의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불교의 공(空)의 관점과 대체로 일치한다.

흄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철학자들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유형들의 규칙성 으로부터 (인과)법칙을 그려내려 한다. 말하자면 ‘인과 – 규칙성 – (인과)법칙’이라는 일종의 등식이 성립한다. 당구공 A의 충돌이라는 사건과 당구공 B의 움직임이라는 사건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다 보면(regularity) 우리는 두 사건 유형(type)들 사이에 어떤 법칙적 관계(nomological relation)가 있다고 보며 그것을 표현해보려 하게 된다. 성냥불 을 켜는 행위와 공을 놓으면 공이 낙하하는 사건 유형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 찬가지다. 이와 같이 자연세계에 존재한다는 법칙들은 어떤 필연성이나 숨겨진 힘 등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경험이나 관찰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보는 사건 유형들 사이의 규칙적 또는 법칙적 관계에 대한 우리의 언어적 표현일 뿐 이다. 이것이 인과관계와 인과법칙의 원래 모습이다. 이는 자연법칙에 대한 유명론 적(唯名論的) 견해이며, 나는 이것이 공의 관점 또는 인명학(因明學)의 관점을 통해 전개 되는 불교의 견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인식(認識)의 선천적 범주(a priori category)로서의 인과

뉴턴의 역학이 태동한 17세기부터 자연과학은 ‘과학혁명’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 큼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과 한 세기도 안 된 18세기에 흄이 제시한 인과와 인과법칙에 대한 회의론(懷疑論, skepticism)이 자연과학의 학문적 기반 을 온통 흔들어놓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흄은 인과적 자연법칙의 필연성을 성공적으로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처럼) 자아(自我, self)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증마저 제시했다. 18세기 말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그의 저술 곳곳에서 흄을 반복해서 ‘명민하고 예리한’ 철학자라고 칭송하면서, 우리가 흄과 같이 철저히 경험주의 전통에 서는 한 인과관계와 인과법칙의 필연성을 확보할 길이 없어 회의 주의(懷疑主義)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칸트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을 정반대로 바꿈으로써 흄의 회의주의를 극 복하려 시도한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경험론의 입장은 옳지 않다. 예를 들어 빨간 장미가 우리에게는 빨갛게 보이지만 개들은 색맹 이어서 그 빛깔을 못 본다. 한편 박쥐는 시각이 아니라 초음파로 그 모양을 감지한 다. 외계인은 장미의 표면 온도로 그것의 존재를 확인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여러 다른 종(種)의 생명체는 다른 감각기관과 인식 구조(또는 뇌의 구조)로 장미를 다르게 인 식한다. 이 가운데 어느 특별한 종의 인식 내용이 빨간 장미 그 자체의 모습을 객관 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없다. 실은 어느 종의 생명체도 빨간 장미 그 자체가 무 엇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시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우리 뇌가 가 진 구조에 따라 해석해서 우리 나름대로의 시각 경험을 갖게 될 뿐이다. 이는 모든 다른 종의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는 없고, 우리의 시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세계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의 인식 구조를 통해 인간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며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인 식하는 것이다.

칸트는 인과관계의 필연성이 우리에게 선천적으로(a priori) 주어진 인식의 범주(範 疇, category)에 의해 확보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집의 생김새를 관찰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 집의 앞에 서서 집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관찰 해도 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또는 아래서 위로 관찰해도 각각 모 두 그 집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관찰이 진행되는 시간적 순서는 관찰 내용과 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때 정지해 있는 집의 모양은 인과관계와는 아무 관련이 없 다. 한편 어떤 시내에서 작은 종이배를 띄운다고 상상해보자. 이때 배는 시내의 흐 름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 내려간다. 어느 경우에도 종이배가 하류에서 상류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이런 일은 상상조차 불가한데, 그 이유는 칸트 에 의하면 종이배의 움직임과 같은 인과 작용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 과라는 개념 또는 범주에 의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되도 록 인식되기 때문이다. 종이배를 시내의 상류에 놓는 것이 이 종이배 움직임의 원인 인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천적 인식 구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시간이 얼마 지 난 다음에 이 원인의 결과로서 종이배가 하류에 이르게 되는 방식으로만 경험이 구 성된다는 것이다. 세계 그 자체에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이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어떤 특정한 경험은 우리의 인식 구조가 필연적인 인과관 계라고 인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 필연적인 인과관계라는 현상이 존 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칸트에 있어서 만약 이런 현상이 필 연적인 인과관계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이런 것들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생겨나지도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인과관계의 필연성은 우리가 원할 때는 가질 수도 있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위해서는 불가결한 필수 사항이다. 우리에게 경험에 앞서서 (선험적으로) 주어진 선천적인 인식 구조의 인 과라는 범주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자연세계를 법칙적으로 연구할 길은 없다. 그래서 칸트에 의하면, 그의 생존 당시 뉴턴 역학이 보여주던 자연법칙은 우리에게 모두 필연적으로 참인 진리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가 자연법칙의 필연성에 대한 흄의 회의론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흄이나 칸트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가진 견해의 우열을 가리기는 거의 불가능 하겠지만, 현대 물리학의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칸트가 제시한 시간적 선후 관계에 바탕한 필연적 인과관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현상이 많이 보고되어왔 다. 그래서 인과나 인과법칙의 필연성을 부정한 흄이 결국 옳았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불교가 흄과 가까운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3. 여여(如如)한 인과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어제 오후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성수대교가 어제 갑 자기 무너졌다,” “어제 신문 1면에 보도된 사건이 성수대교에서 일어났다,” “성수대 교가 시공과 보수 유지의 결함으로 붕괴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희생된 사고가 성수대교에서 일어났다,” “모든 한국인이 경악한 참사가 어제 한강 다리 하나에서 일어났다,” “또 하나의 참사가 성수대교에서 벌어졌다.” 이 여덟 개의 문장들은 몇 개의 사건을 가리키고 있을까? 문장의 표현이 모두 다르니까 여덟 개의 다른 사건을 지시하고 있을까? 아니면, 성수대교가 붕괴한 사건은 단 하나밖에 없지만 그것을 여 러 다른 표현으로 기술했을 뿐이라고 보아야 옳을까?

철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의 직관은 대체로 후자가 옳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순신 장군은 “이순신,” “구국의 영웅,”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 한 성웅(聖雄),” “거북선을 이용해 왜적을 물리친 수군장,” “억울하게 옥살이하고 백 의종군한 장군,” “인류 역사상 최고의 수군 제독” 등 여러 표현으로 지칭되어왔지만, 이순신 장군이 이런 다양한 표현의 수만큼 여럿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우리가 동일 인물을 여러 다른 표현으로 가리킬 뿐이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철학자 데이비 슨은 사건(event)의 속성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했다.

데이비슨은 어떤 주어진 사건을 다른 사건과 구별해주는 원리를 그 사건이 속해 있는 인과관계에서 찾았다. 그에 의하면, 어떤 사건을 기술하는 표현과는 상관없이 그 사건이 인과되고 또 인과하는 연결 고리들이 그 사건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것 이다. “다리의 붕괴(x)로 수십 명이 사망하고 다쳤다(y),” “성수대교가 갑자기 무너져 서(x) 많은 사람에게 비극이 벌어졌다(y),” “어제 신문 1면에 보도된 사건(x)으로 많은 가족을 비탄에 빠뜨리게 된 일이 벌어졌다(y)” 등 같은 인과관계를 기술하는 여러 다 른 표현들이 있지만, 이 모두는 기본적으로 “x caused y(x가 y를 초래했다)”라는 구조를 가진 동일한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한편 “시공 과정의 결함(z)으로 다리가 붕괴했다

(x),” “부주의한 공사 감독(z)으로 성수대교가 갑자기 무너졌다(x),” “잘못된 시공(z)으 로 신문 1면에 보도된 일이 생겼다(x)” 등은 모두 “z caused x(z가 x를 초래했다)”라는 구 조를 가진 같은 인과관계를 표현한다.

z가 x를 인과하고 x가 다시 y를 인과하는 연결 고리가 있기 때문에 이 인과관계 의 연결 고리들로부터, 비록 x가 여러 다양한 표현으로 기술될 수 있지만, x의 정체 성(identity)이 확보되고 그것이 다른 사건들로부터 구별(individuate)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 x가 어떤 특정한 본질적 속성 또는 자성을 가져야만 인과되고 또 인과할 수 있 다고 보는 본질주의를 견지하지 않고서도 사건 x를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 고 인과관계란 어떤 자성과 자성을 가진 사건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이렇게 그러 그러하게(여여如如하게) 연결되어 있는 x와 y같이 자성의 존재를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들 사이의 고리들에 불과할 뿐이다. 말하자면 여여하게 연결되는 자성 없는 것들 사이의 자성 없는 어떤 관계가 인과관계이다.1) 데이비슨이 불자(佛子)였다는 증거는 없지만, 20세기 후반 영어권 철학계를 풍미한 그의 견해는 지극히 불교적이었다.

 

 

1) 데이비슨이 인과관계에 대한 법칙적 설명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완전하게 발전된 물리학이라 면 모든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아무런 유보 조항도 없이 엄밀하게 법칙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을 것이 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이런 수준의 물리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한편 이런 물리학이 보여주 는 법칙적 설명이라는 것도 결국은 위에서 논의한 데이비드 흄의 규칙성에 기반한 인과법칙의 이해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런 접근 방식이 원인과 결과에 숨어 있다는 자성이나 그들 사이의 필연적 관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학교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를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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