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세상 읽기|케빈 데이비스의 『법정에 선 뇌』__정여울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어도 될까

『법정에 선 뇌』

 

사이코패스의 뇌는 보통 사람들의 뇌와 전혀 다를까. 의지와 무관한 행위라면, 아 무리 잔인한 범죄라도 뇌 손상이나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형될 수 있을까. 이는 오랜 논쟁 거리였지만 최근 법의학과 뇌과학의 발달로 뇌의 비밀이 속속 밝혀지면서 뇌 손상과 범죄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도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은 평화롭고 도 선량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뇌를 다치거나 뇌종양 등의 질환을 앓으면서 갑 작스럽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거나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이상행동을 하는 사례들 을 분석하며 어디까지가 생물학적인 뇌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자유의지인 지를 질문한다. 여기에 제시된 사례들은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 제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이른바 ‘묻지마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왜 인간은 이런 잔인한 행위를 일삼는가’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점점 절실 해지고 있는 요즘이다.

저자는 오랜 관찰과 취재 활동, 과학적 증명, 뇌과학과 신경과학을 넘나드는 심층연구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죄 행위들’에 숨겨진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밝 혀낸다. 물론 두뇌의 손상이나 뇌 관련 질병들이 발생하는 원인들 또한 단순한 사고 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평소의 스트레스와 사회적 갈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풍족한 삶과 남들이 부러워하는 커리어를 가진 남자가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뇌 를 다치면 온화하던 사람도 폭력적인 성향으로 바뀔 수 있는가?”라는 식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많아졌다는 점이 현대 사회의 복잡성이다. 이 책에 서 던지는 질문은 ‘살인자의 감형’이나 ‘심신미약 인정 여부로 인한 정상참작’이 아 니라, ‘인간의 뇌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미치는 영향’ 자체다. 이 책에서 조사에 응한 뇌과학자들은 변호사들의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고 한다. 변호사들은 ‘감형’을 목적 으로 범죄자들의 뇌 스캔 사진을 찍기를 원하고, 학자들은 감형을 목적으로 뇌과학 이 남용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의 영향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의 소중함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 현 상태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일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두뇌의 내적 활동’의 중요성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부분이 내 짐작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헨리의 이야기>라는 옛 영화를 떠올리게 되었다. 해리슨 포드와 아네트 배닝 주연의 오래된 영화를 최근에 새롭게 보면서, 어쩌면 바로 ‘뇌 손상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미치 게 되었다. 주인공 헨리는 엄청나게 유능한 변호사로 실패를 모르는 사람이며, 끊임 없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만이 삶의 목표처럼 보인다. 그는 딸아이가 자기 피아노 에 음료수를 쏟았다는 이유로 노발대발하며 아이에게 하루 종일 외출하지 말고 집 에서 책만 읽으라는 식으로 심한 벌을 내리기도 하고, 아내의 마음은 신경 쓰지도 않 은 채 오직 성공의 한길로만 달려가는 강박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러던 그가 마트에 서 무장 강도의 총격을 받고 뇌 손상을 입게 된 후, 그는 처음에는 걷지도 못하고 말 하지도 못하는 심각한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다. 그때부터 헨리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다. 식은 줄로만 알았던 아내의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 아내는 남편의 엄청난 수술비로 인해 가정 형편이 어렵게 되었지만, 치료를 포기하지 않고 극진한 정성으 로 남편을 보살핀다.

헨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처음부터 걸음마를 배우고, 알파벳부터 시작해 글자를 익히고 사이가 소원해졌던 딸과의 관계도 점점 더 회복하게 된다. 그러면서 오히려 ‘사회화되기 이전의 성격’, 즉 변호사가 된 이후 생존 경쟁을 겪어가며 점점 각박해 지고 무심해진 자신의 성격 이전의 순수했던 옛 모습을 찾게 된다. 그는 딸이 오렌지 주스를 쏟자 “나도 원래 음료수를 곧잘 쏟는단다”고 이야기하며 일부러 주스를 엎지 르기도 한다. 이런 순수하고 다정한 모습을 오히려 가족들은 더 사랑하게 된다. 그를 둘러싼 아내와 딸의 사랑, 그리고 치료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진심 어린 보살핌과 ‘다시 예전의 삶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제야말로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순수한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는 과정 속에서 헨리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는 아내가 자신이 뇌를 다치기 이전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자기 자신 또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 는 아내의 불륜에 화를 냈지만, 알고 보니 자신도 똑같이 다른 사람을 만남으로써 아 내에 대한 사랑을 지키지 못했음을 깨닫고 진심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는 오히려 상처 이후에 더 크게 성장한다. 총격으로 인한 뇌 손상은 그에게 분명 트라우마였지만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의 진정한 내적 자원이 작동하 기 시작한다. 그 내적 자원은 바로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자기 치유 의 힘이었으며, 타인에 대한 사랑을 회복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될 수 있는 마음을 발견하는 길이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고 한다. 외상 후 스트 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트라우마로 인해 스트레스 조절 능력이 떨어 진 상태, 즉 트라우마로 인해 삶을 제대로 살 수 없게 된 경우를 가리키지만, 반대로 인간에게는 트라우마 이후에 자신의 삶을 더 잘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도 있 다. 나는 아직 자유의지의 힘을 믿는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 아무리 힘들고 아 픈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삶을 더 낫게 하려는 인간의 자기 치유력을 믿는다. 뇌과학 이 바로 이런 ‘외상 후 성장’의 가능성을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인간은 두뇌 활동 의 생물학적 증거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다는 것, 우리 삶의 더 큰 가능성은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더 크고 깊은 사랑과 자기 치유의 힘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법정에 선 뇌』 케빈 데이비스 지음, 이로운 옮김, 실레북스 刊, 2018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트라우마로 인해 스트레스 조절 능력이 떨어진 상태,

즉 트라우마로 인해 삶을 제대로 살 수 없게 된 경우를 가리키지만, 반대로 인간에게는 트라우마 이후에 더욱 자신의 삶을 더 잘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도 있다.

 

 

정여울 작가. 저서로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월간정여울-똑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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