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사찰 순례|여주 신륵사__주수완

여말 선초 역사의
파란을 함께한 사찰
여주 신륵사

여주 신륵사는 전해지기로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께서 세우셨다고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신륵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나옹 혜근(1320~1376) 스님으로부터 비롯된다. 나옹 스님은 1344년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1347년 중국 원나라로 건너가 그곳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인도의 고승 지공 화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귀국한 후에는 잠시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신광사의 주지로 계시다 1355년에는 다시 원나라로 가서 그곳 광제사의 주지로 임명받을 정도로 중국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다시 귀국 후에는 1361년부터 각지의 사찰을 순력한 뒤 회암사로 돌아와 주지로 계셨는데, 이때 스승인 지공 화상이 1328년 직접 고려를 찾았을 때 회암사터가 인도의 나란다 대학의 터와 유사하므로 그와 같이 사찰을 세울 것을 권했다는 이야기에 따라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고 1376년에 문수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는데 이때 모인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 되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신진사대부들의 비판을 받아 밀양 영원사로 말하자면 유배를 가시게 되었는데, 뱃길로 가는 길에 잠시 신륵사에 들렀다 가겠다고 하시고서는 결국 신륵사에서 입적하셨다.
어쩌면 신륵사는 그저 스님께서 입적한 곳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이를 계기로 나옹 스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신륵사로 모여들었고, 신륵사를 말하자면 나옹 화상을 기리기 위한 추모 사찰로 업그레이드시켰다. 그것이 신륵사를 대찰로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나옹 스님께서 스승 지공 화상의 가르침을 받아 그토록 정성껏 키운 거찰 회암사는 이후 유생들의 억불 정서로 인해 화재로 불탄 이후 복구되지 못하는 운명이 되어버렸지만, 나옹 스님의 사후 유지를 계승한 신륵사는 지속적으로 운영되었으니 기구한 운명이라 하겠다. 물론 신륵사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 왕실에서 성리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사찰을 지원했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지금의 성남 내곡동에 있던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을 풍수지리적으로 위치가 좋지 않다고 해 옮길 때 이곳 여주를 새 장지로 정하고 그 원찰로 신륵사를 삼은 덕에 그 명맥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나옹 스님은 이미 억불숭유 정책이 시작되었던 조선조도 아닌 고려시대에 어떻게 법회를 크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유배에 가까운 벌까지 받게 되셨던 것일까? 그즈음 불교계는 매우 어지러웠다. 신돈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나옹 스님과 보우 스님이 모두 외면당했고, 1371년 신돈이 처형당한 후 곧바로 공민왕은 보우 스님을 왕사로 모셨지만 이미 신돈으로 인해 신진사대부가 불교계에 불만이 매우 큰 상태에서 조정에 다시 나서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공민왕마저 승하하고 우왕이 왕위에 오르자 신돈 사후 새롭게 정권을 잡은 성리학자들은 내친김에 기존의 모든 불교 세력을 꺾으려고 했던 것 같다.
신륵사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장소는 나옹 화상을 모신 ‘보제존자사리탑’이리라. 이 사리탑의 중요성은 그 모습에서 이미 드러난다. 방형의 기단 위에 소위 석종형이라고 하는 둥근 형태의 석탑에 사리를 모셨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는 자세히 보면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닮았다. 통도사 금강계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제자들이 스승인 나옹 스님의 사리를 금강계단 형태로 만들었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는 나옹 스님이 부처님만큼이나 위대한 분이라는 뜻의 표현일 것이다.
보제존자사리탑 앞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태의 석등이 서 있다. 특히 석등의 등을 넣어두는 몸체 돌에는 매우 정교한 비천과 용이 역동적으로 새겨졌는데, 단순한 형태의 사리탑이 나옹 화상의 수행자적 면모를 드러낸다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석등은 마치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듯이 보인다.
이 사리탑 옆에는 ‘보제존자석종비’가 서 있는데, 나옹 스님을 기리는 비이자, 1379년에 사리탑을 세우게 된 내력을 기록한 것이다. 이 비문은 목은 이색(1328~1396)이 지었는데, 조선의 신진사대부를 키워낸 거두이자 정몽주와 같은 온건개혁파였던 그는 한편으로는 이처럼 나옹 화상을 기리는 비문을 쓸 정도로 불교와 가까웠던 선비였다.
이색이 이곳 신륵사와 맺은 인연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신륵사에는 원래 대장경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이 대장경 봉안 사업을 주관한 사람이 이색과 나옹의 제자 스님들이었다. 1383년 이를 완성한 기념으로 세운 비가 ‘신륵사 대장각기비’이다. 원래는 이색의 아버지가 이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이색이 나옹 스님의 제자들과 뜻을 모으고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의 시주를 모아 대사업을 이루어낸 것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때 동참한 사람들의 명단에 최영, 이성계, 그리고 화약 제조로 잘 알려진 최무선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원래 이색은 이성계 세력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다 실패하고 귀양까지 다녀온 적도 있는데, 이성계는 이색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름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신륵사는 대찰이었음에도 임란 및 이후의 잦은 화재로 창건기의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그 가운데 조사전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다포식 건축인 이 전각은 조선 초기의 다포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어쩌면 나옹 스님 입적 후 무학대사 등이 추모 사업을 벌일 당시의 전각일지도 모르겠다. 이 안에는 세 폭의 조사 진영이 걸려 있는데, 중앙에는 지공 스님, 향우 측에는 나옹 화상, 그리고 향 좌측에는 무학대사 자초 스님의 진영이 걸려 있다. 그 앞에 있는 목조각상은 나옹 스님을 모신 것이라 한다. 이렇게 세 분을 흔히 ‘3화상’으로서 모시는데, 비록 조계종은 태고 보우 스님을 중흥조로 모시고 있어 이 세 분은 조계종의 역사에서는 잘 다루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실제적으로 조선시대 불교의 나아갈 길을 정하셨던 분들이기도 하다.
한편 조사당 안에는 건륭 38년(1773년) 명문이 새겨진 동종이 함께 봉안되어 있는데, 이런 동종을 만들 때는 매우 귀한 재료인 구리가 대량 들어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사찰에서 청동 불구를 만들어 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신륵사가 영릉의 원찰이기 때문에 왕실 제사 의식을 위해 특별히 허락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래서일까 종의 크기가 0.9m가량으로 이 시기 동종으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신륵사의 중심 전각인 극락보전은 1678년에 새로 지어지고, 1797년에 중수된 기록이 있는데, 그 안에는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조각승 인일, 수천 등이 참여해 조성한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불과 좌우 관음·세지보살로 구성된 이 삼존불은 임란 직후 조선 불교가 한창 전국적으로 복원되고 있는 가운데 조성된 불상으로 비록 조성 연대는 1610년이지만, 양식적으로 보면 이보다 더 이른 고려 말기의 양식까지도 품고 있는 매우 독특한 상이다. 거기다 본존 아미타불의 육계가 유난히 높이 솟은 것은 아마도 여말 선초 시기 원나라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티베트 양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삼존불이 조성될 때 좌우 협시 보살도 좌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서는 입상으로 표현해 더 장중한 멋이 있고, 두 보살의 수인도 서로 달라 흥미롭다. 보통은 좌우 대칭으로 똑같이 연꽃 줄기를 잡거나 하는 모습인데, 여기서 관음보살은 두 손을 모아 내려뜨려 배 앞에서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던 것 같은 자세를 하고 있다. 이렇듯 1610년 조성이면서도 이보다 조금 이른 나옹 화상 시기 즈음의 불상 양식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신륵사에서 나옹 화상을 추모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신륵사에는 모두 4기의 탑이 있다. 하나는 앞서 살펴본 ‘보제존자사리탑’이다. 그리고 두 번째 탑은 이 극락보전 앞에 서 있다. 새하얀 대리석 재질인 이 탑은 멀리서 보아도 그 백옥의 빛으로 화려한 느낌이 들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섬세한 장엄으로 더더욱 화려하게 보인다. 기단부는 마치 불상의 대좌인 수미좌를 연상시키는 2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층 기단에는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로 세운 탑신은 현재 8개의 옥개석이 보이지만, 1개가 유실된 상태여서 원래는 9층 정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아마도 이러한 탑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낙산사 7층 석탑의 원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탑은 신륵사 경내에서 남한강 쪽으로 이어진 너른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데, 강월헌이라는 누각 옆에 있다. 강월헌은 나옹 화상의 당호인데, 추정하기로는 이 삼층 석탑이 세워진 바위 위에서 나옹 화상의 다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신륵사에 서 있는 탑 중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신라 양식의 석탑인데, 그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면서 신륵사가 고찰임을 보여주고 있으니 실제로 나옹 화상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륵사의 마지막 탑은 이 바위 위쪽으로 높이 솟은 바위 위에 세워진 전탑으로 벽돌을 쌓아서 만든 이 탑이 서 있는 위치가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원래는 남한강 물길을 따라 운항하는 선박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세운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전탑이 서 있는 바위를 조선시대에는 동대(東臺)라고 불렀는데 이 동대를 조선시대의 문인화가 정수영이 마치 배를 타고 혹은 건너편 물가에서 신륵사를 바라본 시점을 그린 사실적인 풍경화를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어쩌면 이 물길의 역사가 오랜 만큼 그 무사 운항을 기원하는 이 전탑이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일지도 모른다. 전탑의 벽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름다운 구름무늬나 고사리무늬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형태를 보면 고려 말 이전으로부터 이곳이 수행 도량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다만 파손이 심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리하면서 그 모습이 조금 변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도 이 전탑이 내려다보는 남한강 물길로 유배 가던 나옹 스님도 동대를 통해 신륵사에 오르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남한강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으리라. 무학대사께서 오실 때도, 최영 장군이 이성계를 데리고 신륵사를 찾을 때도 미래의 그 어두운 역사와는 달리 강물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을 것이다.
“청산은 나에게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에게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라고 읊으셨던 나옹 화상의 청산, 창공, 그리고 물과 바람이 모두 이 동대를 감싸고 돌고 있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끝내 그 사랑도, 미움도 내려놓지 못했다.

 

◦ 신륵사
주소 :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전화 : 031-885-2505
홈페이지 : www.silleuksa.org

주수완|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석사를,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저로 『솔도파의 작은 거인들』이 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14 − tw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