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 산책 18|구차제정(九次第定)과 팔해탈(八解脫)__이중표 사유와 성찰 Ⅰ.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다

니까야 산책│초기 불교로 풀어보는 불교 18
격월로 연재하는 <니까야 산책│초기 불교로 풀어보는 불교>는 불교 교리의 쟁점에 대해 초기 경전과 현대
언어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해설하는 코너다.

구차제정(九次第定)과
팔해탈(八解脫)
이중표|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지난 호에서는 출세간의 5가지 음식 가운데 염식(念食), 팔해탈식(八解脫食), 희식(喜食)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음식인 염식(念食), 팔해탈식(八解脫食), 희식(喜食)은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닦아 팔해탈(八解脫)을 성취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번 호에서는 구차제정과 팔해탈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구차제정을 수행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차례로 적멸(寂滅)한다.

초선(初禪)에서는 언어(言語)가 적멸한다.
제2선(第二禪)에서는 각관(覺觀; 언어적 지각과 사유)이 적멸한다.
제3선(第三禪)에서는 희심(喜心)이 적멸한다.
제4선(第四禪)에서는 출입식(出入息)이 적멸한다.
공처(空處)에서는 색상(色想)이 적멸한다.
식처(識處)에서는 공처상(空處想)이 적멸한다.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는 식처상(識處想)이 적멸한다.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서는 무소유처상(無所有處想)이 적멸한다.
상수멸(想受滅; 滅盡定)에서는 상수(想受)가 적멸한다.

이와 같은 구차제정의 수행을 통해서 행(行)이 차례로 적멸하며, 이 과정에서 8단계의 해탈을 얻게 된다. 행(行)에는 신(身)·구(口)·의(意) 삼행(三行)이 있다. 우리는 삼행을 몸과 입과 마음으로 행하는 일상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행(行)은 일상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위(有爲)를 조작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잡아함경(568)』에서는 이러한 삼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출식입식(出息入息; assasapassasa)을 신행(身行; kāya-saṅkhāra)이라고 부른다.
유각유관(有覺有觀; vitakkavicara)을 구행(口行; vaci-saṅkhāra)이라고 부른다.
상수(想受; saññā ca vedāna)를 의행(意行; citta-saṅkhāra)이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는 이와 같이 삼행을 설명하고서 행은 구행(口行), 신행(身行), 의행(意行)의 순서로 적멸한다고 설명한다. 먼저 각관(覺觀; 사유와 성찰)이 멸하고, 다음에 출입식(出入息)이 멸하며, 마지막으로 상(想)과 수(受)가 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차제정과 비교해보면 초선에서는 언어(言語)가 적멸하고, 제2선에서는 각관(覺觀)이 적멸하므로, 초선과 제2선에서 구행(口行)이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3선에서는 희심(喜心)이 적멸하고, 제4선에서는 출입식(出入息)이 적멸하므로, 제4선에서 신행(身行)이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수멸(想受滅; 滅盡定)에서 상(想)과 수(受)가 적멸하므로, 의행(意行)은 멸진정(滅盡定)에서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구행(口行)이 맨 처음에 멸할까? 우리는 모든 사물을 개념화해 이름을 붙이며, 이렇게 명명된 개념이 언어(言語)다. 우리는 사물을 보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유각유관(有覺有觀)은 개념화된 언어를 사용해 대상을 지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을 구행이라고 한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언어를 사용해 지각하고 사유하는 행위가 모두 구행이다.
욕계(欲界)는 언어의 세계다. 우리는 욕구의 대상을 개념화해 이름을 붙인다. 책을 놓고 보려는 욕구에서 책상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걸터앉으려는 욕구에서 의자라는 개념을 만든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본질은 이와 같이 우리의 욕구다. 초선은 욕탐을 떠나 욕계에서 해탈한 경지이기 때문에 대상을 언어로 파악하지 않는다. 따라서 초선에서는 언어가 멸한다. 그러나 언어를 조작하는 개념화 작용, 즉 구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어를 조작하는 작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일까?
언어는 개념(槪念)이며, 구행은 개념을 구성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면 그 사물의 모양과 그 사물에서 느낀 감정이 우리의 마음에 생긴다. 이것을 표상(表象)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책상을 본다면 책상의 모양이 우리의 마음에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표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 개의 책상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는 여러 개의 표상이 생길 것이다. 마음에 여러 개의 표상이 생기면, 이 표상들을 먼저 비교하게 된다. 그러면 책상들은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공통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 모습을 버린다. 이것을 추상(抽象)이라고 한다.
책상은 각기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다. 이렇게 표상들을 비교해 다른 점을 모두 추상하면 같은 점만 남을 것이다. 다리가 달려 있고, 상판이 평평해 책을 놓고 보기에 적합한 점이 동일하다면, 이렇게 동일한 점만을 모으게 되는데, 이것을 총괄(總括)이라고 한다.
우리의 마음에 생긴 많은 표상을 이렇게 비교하고, 추상화해, 총괄하면 하나의 표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이렇게 총괄된 것에 책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것을 명명(命名)이라고 한다. 책상이라는 개념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며, 이것이 언어다.
구행은 이렇게 언어를 만드는 작용을 의미한다. 각관(覺觀)은 사물을 지각해 생긴 표상을 비교하고 추상하고 총괄하는 마음의 작용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개념을 형성하는 구행은 외부의 사물을 지각해 사유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런데 제2선은 마음이 삼매에 들어가 외부의 사물을 지각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이므로 각관(覺觀)이 사라져 구행이 멸하게 된다. 이와 같이 초선을 통해서 언어가 적멸해 욕계(欲界)에서 벗어나는 것이 초해탈(初解脫)이며, 제2선을 통해서 각관(覺觀; 언어적 지각과 사유)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2해탈이다.
구행을 멸한 다음에 신행(身行)을 멸하는 선정(禪定)이 제3선과 제4선이다. 제3선을 수행하면 희심(喜心)이 멸한다고 한다. 제2선을 성취하면 희락심(喜樂心)이 생기는데, 제2선에 머무는 동안은 우리의 의식이 이 희락심에 속박된다. 제3선에서는 이 희락심에서 벗어나 평정심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평정심을 즐기는 마음에 속박되기 때문에 그 즐거움마저 버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버린 완전한 평정심에 도달하는 것이 제4선이다.
이와 같은 제3선과 제4선을 통해서 신행이 멸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3해탈이다. 위에서 언급한 『잡아함경(568)』에서는 출식입식(出息入息; assasapassasa)을 신행이라고 하는데, 호흡을 신행이라고 하는 것은 호흡이 몸으로 행하는 생리작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호흡을 비롯해 몸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생리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을 신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몸을 호흡을 하고 생리작용을 하는 존재로 생각하게 된 것은 사유 작용의 결과이다. 우리는 호흡하면서 보고, 듣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호흡하면서 보고, 듣는 일을 하는 몸이라는 존재자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즉 업보(業報)만 있을 뿐 작자(作者)는 없는데, 없는 작자를 존재로 계탁(計度)한다. 이렇게 없는 작자를 계탁하는 행위가 의행(意行)이다.
의행을 통해서 호흡의 작자로 계탁된 것이 몸(身)이다. 그리고 이렇게 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몸을 통해 지각하는 대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해 그것을 언어로 지각하는 행위가 구행이다. 따라서 구행은 신행에 의지하고 신행은 의행에 의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M.N. 44. Cūḷavedalla-sutta에서는 멸하는 순서는 구행, 신행, 의행의 순서이지만, 생기는 순서는 의행, 신행, 구행의 순서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몸이 숨을 쉬고 있을 때 나의 몸이라고 생각한다. 몸은 그대로 있어도 호흡이 멈추면 나의 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호흡이 유지되는 동안을 자신의 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호흡을 통해 우리의 몸이 동일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출입식을 신행이라고 한다. 제4선은 마음이 평정심, 즉 청정한 무관심의 상태가 되어 몸을 통해 생기는 모든 감정에서 벗어난 경지이다. 따라서 제4선에서 몸을 자신의 존재로 생각하는 신행이 멸한다.
신행이 멸하면, 몸을 통해서 외부의 존재로 인식되던 색계(色界)에 대한 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색상(色想)이 멸한 의식 상태를 공처(空處)라고 부르며, 이러한 공처에 머무는 것이 제4해탈이다.
공처는 우리의 의식에서 색상이 사라질 때 일어난 생각일 뿐 실재가 아니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서 공처상(空處想)을 벗어나 내부의 의식(意識)에 머무는 것이 식처(識處)이며, 이것이 제5해탈이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외부의 대상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그러므로 공처상이 멸함으로써 외부의 대상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는 의식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서 식처상(識處想)을 벗어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머무는 것이 무소유처(無所有處)이며, 이것이 제6해탈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타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유(有)와 무(無)를 성립시키는 유(有)도 무(無)도 아닌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성찰을 통해서 무소유처를 벗어난 것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이며, 이것이 제7해탈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非有) 없는 것도 아니다(非無)는 생각은 모순이다. 유무(有無)에 대한 모든 판단은 이러한 모순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가 조작한 유위(有爲)일 뿐 진실이 아니다. 이러한 유위를 조작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작용과 감수(感受) 작용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서 사유 작용(想)과 감수 작용(受)을 벗어나 연기(緣起)하는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 상수(想受)가 멸한 상수멸(想受滅), 즉 멸진정이며, 이것이 제8해탈이다.
불교의 열반은 이와 같이 구차제정을 통해서 삼행(三行)을 소멸해 8해탈을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있는 것도 아니고(非有) 없는 것도 아니다(非無)는 생각은 모순이다. 유무(有無)에 대한 모든 판단은 이러한 모순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가 조작한 유위(有爲)일 뿐 진실이 아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서 사유 작용(想)과 감수 작용(受)을 벗어나 연기(緣起)하는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 상수(想受)가 멸한 상수멸(想受滅), 즉 멸진정이며, 이것이 제8해탈이다.

○ 이번 호를 끝으로 <니까야 산책│초기 불교로 풀어보는 불교> 연재를 마칩니다.

이중표│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동 대학 호남불교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아함의 중도체계』, 『근본불교』,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등이 있으며, 『불교와 일반시스템 이론』, 『불교와 양자역학』, 『맛지마니까야』 등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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