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3|연기란 무엇인가 (2)__홍창성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2)
홍창성│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는 것이 연기다. 이는 사물이 조건에 의해 생멸한다는 말이니까, ‘이것’이 조건에 해당되겠고 생멸하는 사물이 ‘저것’에 해당되겠다. 여기서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이것이 조건이니까 저것은 결과가 되겠는데, 조건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바로 연기하는 것들이 서로 가지는 관계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답변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조건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바로 그 관계가 과연 어떤 것이냐고 다시 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이러한 조건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저러저러한 결과가 나온다고 말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도 이런 생각으로부터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필연적으로’라는 말이 연기관계에 적용되어도 되는지는 차분히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1) 전통적으로 어떤 주장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말은 그 진리가 ‘달리 어찌될 수 없다(cannot be otherwise)’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현대 철학에서는 ‘모든 가능 세계 또는 모든 가능한 상황에서 그 주장이 참이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는 연기의 법칙이 정말 모든 가능한 세계나 상황에서 달리 어찌될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을까? 이번 호에서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먼저 조건과 결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검토해보겠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남전불교가 선호하는 대로 연기를 인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우리는 존재 세계에서 필연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유명한 당구공의 예로 이 점을 설명해보겠다. 당구공 A가 움직이다가 멈춰 있는 당구공 B를 치고서는 그 자리에 멈춘다. 이때 B가 대신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A가 가진 힘이 B에 전해져서 A가 멈추고 B가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필연적이라고 본다. 여기서 A가 B를 친 사건이 원인이고 B가 움직이기 시작한 사건이 결과인데, 원인과 결과는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necessarily connected) 생각한다. 그런데 흄은 이런 이해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먼저 당구공 A와 B가 주고받았다는 숨어 있는 힘(hidden force/power)은 그 존재를 경험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누가 힘 자체를 본 적이 있는가? 혹자는 움직이는 당구공을 손으로 막으면 아픈데 이것은 당구공 안에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때 감각으로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단지 손이 느끼는 통증일 뿐이지 당구공에 숨어 있다는 힘이 아니다. 혹자는 또 손이 느끼는 감각을 통해 당구공이 가진 힘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라고 볼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 이론이 가설로 만들어놓은 ‘힘’이라는 것의 존재는 결국 가설일 뿐이다. 과학 이론이 바뀐다면 사라질 가상의 존재다.
흄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자연법칙이란 실제로는 모두 한 종류의 사건이 반복해서 다른 종류의 사건과 함께 일어날 때 우리가 심리적으로 이 두 종류의 사건들을 연결 지어 상상하고 개념적으로 연합(association)시켜놓은 것일 뿐이라고 본다. 우리 심리가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지 그들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필연적인 관계를 확인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냥을 그으면 불이 붙는데, 우리가 성냥으로 긋는 행위에 불이 붙게 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이 붙는 결과가 반복해서 나타나게 되면 어느 순간 우리는 심리적으로 성냥을 긋는 것이 원인이고 불이 붙는 것이 결과라고 생각하면서 이 둘 사이에 필연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여기게 된다. 리트머스 시험지를 산성 용액에 넣으면 색깔이 변하는데, 이 실험도 반복되다 보면 마음속에서 어느덧 인과관계가 성립되고 또 이 둘 사이에 필연적인 법칙이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런 필연성이나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직접 확인할 길은 없다.
러셀(Russell)은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부정하며 재미있는 예를 제시한다. 어떤 닭 농장 주인이 언제나 종을 치고 닭 모이를 주었다. 몇 달 동안 그렇게 하다 보니 닭들은 종소리가 나면 모이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 주인 곁으로 모두 모였다. 닭들 마음속에 종소리와 먹이 사이에 인과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또 종을 치자 닭들이 모두 모였는데, 이날은 주인이 모이를 주는 대신 모두 잡아서 도축장으로 끌고 갔다. 두 종류의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해서 둘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다. 오늘날 소립자물리학에는 이와 같이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예들이 흔하다. 그래서 연기를 인과로 해석한다면, 인과관계 자체가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필연성을 담보할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불교계에서 특히 남전불교 연구자들 사이에는 연기를 인과로 보면서 이 인과관계를 ‘만약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조건문의 형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오류다. 인과관계는 존재 세계에 있는 두 사건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지만, “만약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문장은 논리학에서 다루는 조건문(if…, then…)의 형태로 되어 있어서, 기본적으로 존재 세계가 아닌 우리 논리 세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문제를 논리의 문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이 문제를 살펴보겠다.
성냥을 그으면 불이 붙는다. 소금을 물에 넣으면 녹는다. 이런 문장들은 ‘만약(if) 어떤 일이 생기면(then) 다른 일이 생긴다’는 조건문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 문장들은 다행히 인과관계를 나타낸다. 그런데 조건문은 인과가 아닌 관계도 포함하기 때문에 인과를 조건문의 형식을 통해 이해하면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오늘이 월요일이면 내일은 화요일이다. 이 조건문은 물론 참이다. 그러나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이 내일은 화요일이라는 사실의 원인은 아니다. 그냥 월요일 다음에 화요일이 올 뿐이다. 305번 버스가 135번 버스 다음에 온다고 해서 135번 버스가 305번 버스가 오게 되는 원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 x=2이고 y=3이면 x+y=5가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x=2와 y=3’ 그리고 ‘x+y=5’ 사이가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또는 수학적으로 그렇게 연결되어 있을 뿐이지 이것이 우리 존재 세계의 관계를 보여주는 인과관계는 아니다.
혹자는 인과를 ‘만약 …이면 …다’라는 조건문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연기를 조건문으로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볼지도 모른다. 위에서 본 월요일과 화요일의 관계, 그리고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말하는 관계들도 넓은 의미에서의 연기 관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지만, 이 또한 중대한 문제에 직면한다. ‘네 말이 옳으면 기차 바퀴는 네모나다’라는 농담이 있다. 네 말이 너무도 엉터리이기 때문에 만약 그 말이 참이면 기차 바퀴가 네모라는 엉터리 주장 또한 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형편없는 그림이 예술적 대작(大作)이라면 나는 원숭이 삼촌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조건문의 앞부분(전건, antecedent)이 거짓이면 뒷부분(후건, consequent)은 그것이 무엇이 되든지 그것의 진위(眞僞)와는 상관없이 전체 문장이 뜻이 통하고 옳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면 북극성이 남쪽 하늘에서 뜬다’,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면 모든 총각은 기혼자다’,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면 일본열도는 남미 대륙에 붙어 있다’와 같은 문장들이 논리적으로 모두 참이 된다. 그래서 논리학의 조건문은 전건이 거짓이면 후건은 어떤 거짓인 주장이어도 전체로서는 참인 문장의 일부로 후건을 포함시켜주게 되고 만다. 그러나 어떤 의존관계에 대한 표현인 연기(緣起)가 이런 엉터리 관계들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연기는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참인 주장들 사이의 관계를 말하지 이렇게 존재하지도 않고 거짓인 것들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지 않는다. 그래서 연기를 ‘만약(if) …이면(then) …이다’라는 논리학의 조건문 형식이 보여주는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도 사라진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이렇게 『아함경』의 한문 문장을 한글로 풀다 보면 “고(故)” 자 때문에 『니까야』로부터 번역한 한글 문장과는 좀 다르게 번역하기도 한다. 지난 호에서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로 번역된 문장을 소개했었다. 『니까야』의 문장들을 번역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자 문화권에서는 “고(故)” 자가 번역문에 쓰이게 되어 이것과 저것 사이의 어떤 의존관계가 더욱 강조되며 이해되어온 것 같다.2)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이것’이 원인이고 ‘저것’이 결과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의했다. 그런데 “故” 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보여줄 수도 있지만 한편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설명해준다는 연결사(connective) “because”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한 질료인(質料因, material cause)과 형상인(形相因, formal cause)을 현대 철학에서는 원인들로 보지 않고 질료와 형상을 언급하며 진행하는 설명(explanation)의 두 종류로 보는데, 이런 이해가 내 논점을 지원해준다. 망치가 단단한 이유는 그것이 단단한 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이렇게 망치의 재료적 바탕을 언급함으로써 망치의 단단함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쇠의 단단함이 망치의 단단함의 원인은 아니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시간적 간격과 중간 단계의 존재가 인과관계의 특징인데, 망치의 물질적 기반인 쇠와 망치 사이에는 아무런 시간적 차이나 중간 단계가 없다. 그래도 망치의 단단함이 그 재료인 쇠의 단단함으로 잘 설명된다. 여기서 인과관계는 없지만 그래도 쇠의 단단함을 조건으로 망치의 단단함이 연기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연기 관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장력이 같은 악기의 두 줄의 길이 비율이 2:1이라면, 이 두 줄이 내는 소리 사이에는 한 옥타브의 차이가 있게 된다. 이때 2:1이라는 비율은 오랫동안 한 옥타브의 형상인(formal cause)이라고 불렸는데, 이 또한 오류이다. 2:1이라는 비율과 한 옥타브 사이에는 어떤 시간적 간격이나 중간 단계들도 없기 때문에 이것은 인과관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2:1의 비율이 한 옥타브의 존재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 이것은 2:1의 비율을 조건으로 한 옥타브가 생멸한다는 연기의 관계로 포섭될 수 있다. 설명 관계 또한 연기의 한 종류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 반갑다.

이것이 있을 때 이것 아닌 것이 있고,
이것 아닌 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
정원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소나무가 소나무인 이유는 그것이 소나무 아닌 것들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오직 소나무뿐이라면 소나무는 소나무가 아니라 온 우주가 될 것이다. 소나무란 말 대신 우주라는 말을 써야 옳게 된다. 그래서 소나무는 반드시 소나무 아닌 것들과의 상관관계에 의해서만 소나무가 된다. 이 예는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책상은 책상 아닌 것들과의 관계에서만 책상이고, 꽃은 꽃 아닌 것들에 대비해서만 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는 고뇌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미혹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깨달은 상태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범죄가가 아닌 사람들은 범죄자와의 상관관계에 의해서만 범죄자가 아니다.
위에서는 보통명사를 사용해 논의했지만 고유명사를 사용해도 동일한 논의가 진행된다. 이순신은 이순신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서만 이순신이고, 이순신이 아닌 모든 것들은 이순신과의 관계에서만 이순신이 아니다. 한국은 한국 아닌 것들과 구별되어서만 한국이고, 한국 아닌 것들은 한국과의 관계에서만 한국아닌 것들이다. 이와 같이 보통명사나 고유명사를 사용해서 지시하는 것들에 대해 모두 ‘이것은 이것이 아닌 것이 있어서 이것이고, 이것이 아닌 것은 이것이 있어서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는 이런 관계를 ‘상의적(相依的)’이라고 말해왔고, 이것을 연기의 개념 아래 포함시켜왔다. 서로가 서로를 조건으로 의지한다는 것이어서 이것을 연기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은 상의적으로 연기한다.

이것에 의존해 저것이 있지만,
저것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인과관계에서는 원인에 의존해서 결과가 생기지만, 같은 결과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냥을 그으면 불이 붙지만, 불은 나무 둘을 마찰시켜서도, 부싯돌을 부닥쳐서도,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서도, 벼락에 맞아서도, 그리고 전기 스파크로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불이 났다고 그것이 반드시 같은 원인에 의해 초래됐다고 볼 수는 없다. 위에서 본 상의 적(相依的) 연기는 대칭적(symmetrical) 의존관계이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우리가 사물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통해 확인한 논리적 의존관계이다. 그러나 존재 세계에서의 연기는 인과에서와 같이 비대칭적 의존관계가 대부분을 이룬다.
비대칭적 의존관계의 또 다른 예로는 현대 서양 분석철학에서 말하는 수반(隨伴, supervenience)이 있다. 이것은 상의관계(相依關係)가 아니고 한쪽 방향으로만 동시적(同時的) 의존관계가 존재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한 떨기 붉은 장미의 아름다움은 이 장미의 물질적 토대에 의존한다. 장미와 그것의 아름다움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나 중간 단계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물질적 토대 없이는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는 분명 의존관계가 있다. 그러나 장미의 물질적 토대가 아름다움에 존재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수반에서의 의존관계는 한쪽 방향으로만 존재한다. 한편 아름다움이 반드시 이 장미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무지개의 빛깔, 비너스,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등은 모두 아름다운데, 아름다움은 이처럼 수많은 (아름다운) 사물 어느 것에라도 의존해 존재할 수 있다. 선(善)함이라는 도덕적 덕목도 마찬가지다. 자선, 부상병 치료, 고아 돌보기 등은 모두 선한 행위인데, 선함은 이런 행위에 의존해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도 선함의 존재는 위에서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비대칭적 의존관계에 있게 된다.
위와 같이 동시적이면서 비대칭적인 의존관계가 우리 세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 관계가 동시적이기 때문에 이시인과(異時因果)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떤 인과관계로 보기도 어렵기 때문에 동시인과(同時因果)도 아니다. 이런 비대칭적 의존관계를 20세기 후반 이후 수반(隨伴, supervenience) 관계라고 부른다고 앞에서 밝혔는데, 위의 논의로부터 수반 역시 연기(緣起)의 한 종류임이 분명해졌다고 본다.
이번 호에서는 연기가 어떤 다양한 관계를 포함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며 연기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해보았다. 다음 호에서는 연기가 필연성을 배제(排除)한 의존관계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겠다.
__다음 호에 계속

두 종류의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해서 둘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연기를 인과로 해석한다면, 인과관계 자체가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필연성을 담보할 수 없다.

 

1) 이 문제는 다음 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겠다.

2) 그래서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같이 어떤 필연성을 함축하는 용어들도 많이 쓰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연성(必然性)은 인(因)의 자성(自性)과 과(果)의 자성 그리고 인(因)과 과(果)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자성까지도 존재해야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참으로 조심해서 언급해야 할 개념이다.

 

홍창성│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철학박사).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로 있다.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를 집필하고 있으며, 불교의 연기(緣起)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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