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세상 읽기|마이클 셔머의 『도덕의 궤적』 __정여울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과학을 위하여

 

 

과학의 이미지는 아직 차갑다. ‘세상과 차단된 실험실, 상상을 뛰어넘는 첨단 기술, 냉철한 과학자들, ‘감성’이라는 차원과는 전혀 거리가 멀 것만 같은 과학의 수많은 이미지들이 과학으로 다가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주춤하게 만든다. 하지만 과학은 뜻밖에도 우리 삶 아주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는 물과 공기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 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인 휴대전화와 무인 전철과 각종 자동화 기기들의 도움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인류 역사의 결정적 국면에서 과학은 늘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했다. 인류사의 근원적인 변화를 가져온 모든 발전의 국면에 과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류 역사의 가장 커다란 변화 중 하나였던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방직기와 증기선, 증기기관차의 발명이었고, 인공지능의 발명으로 이제 인간은 ‘우리를 대체할 수 있는 기계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두려움까지 안고 살게 되었다. 특히 인공지능 로봇의 발명은 인간의 일자리는 물론 인간의 존엄성과 자부심까지 위협하고 있다. 인간의 두뇌를 뛰어넘는 로봇이 인간의 모든 지혜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어쩌면 인공지능 로봇들이 합심해 ‘인간들의 세계’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서린 수많은 SF영화들이 과학을 바라보는 우리 인류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반영한다.

이렇듯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는 여전히 어딘가 거대한 우물에 갇혀 있는 듯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학이 ‘과학에 담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변함없이 영향을 미치고, 중요하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나는 과학자들이 좀 더 대중에게 친밀하고 다정해졌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잘 쓰는 과학자’는 대중들에게 무척 반갑고도 소중한 존재다. 『도덕의 궤적』은 그렇게 따뜻한 과학, 감성적인 과학의 온기를 찾고 있는 나에게 무척 반가운 책이다. 이 책은 과학에 대한 대중의 수많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사의 모든 분야에서 과학은 분명 도움이 된다는 점, 나아가 인류의 더욱 무한한 번영을 위해 과학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과학의 중요한 목적으로서 ‘감응적 존재의 더 나은 생존과 번성’을 강조한다. 감응적 존재, 즉 느끼고, 생각하고, 아파하고, 슬퍼할 줄 아는 존재 모두(인간은 물론 수많은 생명체들)가 더 잘 살 수 있게, 더 나은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점을 과학자는 물론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느끼고 생각하고 슬퍼하고 아파할 줄 아는 ‘감응력’이야말로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변수임을 저자는 알고 있다.

마이클 셔머는 ‘과학의 발전 이전에는 인간이 좀 더 순수하고 소박하며 덜 공격적이었을 것’이라는 신화를 비판한다. “전쟁의 기원 및 원인과 관련해서도 우리의 사고를 흐리는 신화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간은 태어날 때는 비교적 비폭력적이며, 국가 이전에는 사람들이 평화로웠고 타인들 혹은 환경과 비교적 조화롭게 살았다는 신화다. 하지만 여러 계통의 과학적 조사에서 나온 증거들을 종합하면, 인간의 선사시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아무리 좋게 봐도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틀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저자는 과학과 문명의 발전 이전에는 인류가 좀 더 평화롭고 선량했을 것이라는 잘못된 추측을 비판하고,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자기방어 능력을 키워왔음을 증언한다. 인간이 끔찍한 죽음을 맞을 확률도 오히려 과학의 발전 이전보다 지금이 훨씬 낮아졌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역사시대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선사시대 사회들도 폭력 발생률에서 큰 차이를 보였지만, 국가 이전 사회와 국가 사회에서 폭력적인 죽음을 맞을 확률을 통계적으로 비교하면 그 차이는 분명한 수준이 아니라 끔찍한 수준이다. 전투에서 도륙당하고 서로에게 살해당하는 비율의 측면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은 현대인보다 훨씬 더 살인적이었다.” 전쟁 사망률이 가장 낮은 시기 또한 선사시대나 중세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지적 또한 흥미롭다. “역사에서 한 개인이 생존하고 번성하기에 가장 안전한 시점을 골라야 한다면, 전쟁 사망률만 놓고 볼 때 현재보다 더 나은 시기는 없다.” 우리가 과학에 대해 갖고 있는 막연한 편견의 장막을 걷어놓고 보면, 과학은 인류에 해를 미친 것보다 득을 가져온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마녀사냥’을 없애고, 노예제도의 폐지를 촉구한 것이 바로 과학의 힘이었다는 지적이다. 미신적인 사고와 야만적인 폭력을 척결하는 것,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근절하는 데 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다. “서양에서 과학은 마녀의 인과론이 허위임을 폭로했고, 그런 동시에 다른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생각들을 계속해서 허물어뜨렸다. 우리가 여성들을 마녀로 낙인찍어 불태우는 행위를 삼가는 이유는 정부가 그것을 금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따라서 마법을 이유로 누군가를 불태운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 도덕적 쟁점이었던 것은 과학과 이성에 기반을 둔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우리의 의식 밖으로, 그리고 양심 밖으로 밀려남으로써 이제는 쟁점 자체가 되지 않는다.” “결국 무엇이 노예제도의 폐지를 초래했을까? (…) 도덕적 진보를 이루어내는 것은 무기의 힘보다는 생각의 힘이다. 노예제도 같은 개념은 조금씩 서서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좋은 일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일로, 거기서 다시 의심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부도덕한 일로, 불법인 일로,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에서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로 바뀐다.” 이렇듯 모든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힘 또한 과학의 ‘근거’를 필요로 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물론 그 안에는 ‘올바른 과학, 이성적인 과학,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과학’이라는 보다 커다란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성의 권리와 인권을 신장시키는 것,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과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데도 과학이 커다란 도움이 된다. 특히 피임 기술의 발명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에이즈 감염이 동성애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데도 과학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두고 보라. 백인 기독교인들은 과거에 그들이 박해한 집단들-여성, 유대인, 흑인-을 대하는 태도를 결국 바꾼 것처럼 몇 년 내, 길어도 10년 내에 게이와 레즈비언을 대하는 태도를 바꿀 것이다. 그것은 성경 구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와서도 아니고, 신에게 새로운 계시를 받아서도 아닐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억압받는 소수가 평등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위해 싸우고 억압하는 다수 가운데 깬 사람들이 그 대의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기독교 교회들이 뒷북을 치며 동성애자들의 인권 해방이 자신들 덕인 양 행세할 것이다.” 이렇듯 인류의 궁극적 진보를 향한 거대한 여정 위에서 과학이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은 ‘인간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삶은 점점 디스토피아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적 질문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분명 도움을 줄 것이다.

저자는 유토피아가 아닌 ‘프로토피아’를 추구한다. 진보(progress)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인 프로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는 완벽한 이상향이 아니라 조금씩 끊임없이 꾸준하게 변화와 진보가 일어나는 현실적 장소를 말한다. 전쟁 억제, 노예제·고문·사형 등의 폐지, 투표권 확대, 동성 결혼 법제화, 동물 보호 등의 노력을 통해 ‘감응적 존재’인 인류가 조금씩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현실적 진보를 가리키는 것이다. 셔머는 우리 인류가 문명 1.0(원시인류의 이합집산)에서 문명 1.4(도시국가와 봉건 왕조)로, 문명 1.7(선거 민주주의와 공화국)에서 문명 1.9(민주 자본주의)로 진화해왔음을 지적한다. 그가 추구하는 프로토피아는 문명 2.0(지구촌과 지구 문명)이다. 문명 2.0은 전 지구적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디지털 정보·지식, 모든 사람이 사회적 계약으로 맺어진 민주주의 정치체, 부족·인종차별의 소멸 등을 포함하는 거시적 프로그램이다. 세계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장소로 만드는 힘, 그것은 과학을 자본의 무기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감응적 존재, 즉 생명체 모두를 향해 더 나은 장소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지극한 공감 능력, 즉 ‘자비(慈悲)’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유토피아가 아닌 ‘프로토피아’를 추구한다. 진보(progress)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인 프로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는 완벽한 이상향이 아니라 조금씩 끊임없이 꾸준하게 변화와 진보가 일어나는 현실적 장소를 말한다. 세계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장소로 만드는 힘, 그것은 과학을 자본의 무기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감응적 존재, 즉 생명체 모두를 향해 더 나은 장소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지극한 공감 능력, 즉 ‘자비(慈悲)’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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