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기획|행복 : 마음의 지혜와 과학 9__석봉래

명상과 불교적 행복

 

 

불교적 행복은 행(행운)도 아니고 복(풍부한 자원)도 아니다. 유다이모니즘(자기실현적 행복론)도 아니고 히도니즘(Hedonism, 쾌락주의)도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서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교적 행복론의 고유성이 있다. 이 고유한 불교의 행복론을 명상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앞서 불교적 행복을 설명하면서 불교적 행복을 몰입에 빠진 행복이 아니라 깨달음의 행복이라고 했다. 이 깨달음의 행복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명상의 과정과 효과이다. 먼저 명상의 특징은 의식을 집중 상태로 올리고 마음의 상태를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의식을 집중 상태로 만드는 것은 앞서 논의한 몰입과 비슷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명상의 상태는 칙센트미하이의 몰입과 같이 자기실현이나 자기완성의 과정과 같은 자기 정체성에 기반하는 활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자기 정체성이 아니라 자기 개방성을(자기 의식의 흐름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명상이기 때문이다. 영속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명상이기 때문에 자기실현이라는 궁극의 목표는 명상적 행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명상의 행복은 근본적으로 자기실현적이지 않다. 명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의식을 맑게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이를 통해 자기실현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명상은, 적어도 불교적 명상은 집착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목표가 우선되는 것이므로 명상을 오로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깨달음의 불교적 행복관을 잘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적 행복은 또한 쾌락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앞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적 행복관을 논의하면서 설명했듯이 명상은 마음의 즐거움을 줄 수는 있지만 즐거움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의 목표는 깨달음이며 깨달음이 불교적 행복의 실마리인 것이다.

행복과 좋은 삶에 대한 탐구는 탁월함, 긍정성, 성취감(보람), 번성을 통한 자신의 성장과 확대 등에 초점을 맞춘 것이 많았다. 그러나 불교적 행복은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행복을 바라본다. 불교적 행복은 인간 삶의 실존적 고뇌와 고통과 그 원인들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행복의 출발점에 있어서 불교적 행복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실존의 조건인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를 살펴보면서 행복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고 이것을 극복하는 방안을 찾으며 행복에 관한 논의가 완성된다. 그렇다고 이 모든 문제를 즉석에서 해결하는 초월적 힘을 외부에서 끌어들이거나 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깨달아가야 할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불교적 행복은 고통에서의 해방이지만 그것이 고통의 반대인 쾌락이나 영원한 만족으로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통이라는 것이 우리의 무지한 마음에서 생긴 실재에 대한 허상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음의 반대는 양이지만 허상의 반대는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허상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이 없어지면 쾌락이 무제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허상이 없어지고 담담한 깨달음이 생기는 것이다. 즉 깨달음은 가위에 눌려 고통받는 악몽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깨어나게’ 하는 것이지 고통에서 벗어나 쾌락으로 직행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깨달음이란 고통스러운 냉탕에서 나와 따뜻한 온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목욕탕이라는 굴레에서 짐을 싸서 나오게 하는 것이다. 명상을 통한 깨달음은 인간에 주어진 실존의 고통을 극복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의미 없는 허상으로 만들어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불교적 접근은 행복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행복은 보통 현재 사는 상황에서 더 나은 더 즐거운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행복을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이상적인 투사체로서 생각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이 반드시 욕구에 대한 이상적 투사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행복을 고통이나 어려움의 해결이나 만족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초월이나 해방의 시각으로 보면 불교적 행복관이 잘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적 행복관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불교적 명상의 특징을 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명상은 깨달음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기 때문에 명상을 살펴보는 것은 깨달음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행복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명상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명상을 정의한다면 명상은 특정한 의식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특정한 의식의 상태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된다. 어떤 분들은 명상을 마음이 쉬고 있거나 비활동적 상태로 바뀌는 것을 명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명상은 잠자는 것도 아니고 멍하니 앉아 벽을 마주하는 것도 아니다. 명상은 사실 마음의 근본적인 끈을 지그시 잡고 놓지 않는 상태이다. 마음이 지닌 분산의 성향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과정이다. 물질적 대상들은 아무 외적인 개입이 없을 경우 엔트로피(entropy, 열역학에서 쓰이는 개념으로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낸다)가 증가하는 성향을 띤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그냥 두면 분산되고 온갖 상상과 생각이 나타나는 혼란의 도가니가 된다. 명상은 이 성향의 반대로 가면서 마음의 가장 기본 바탕인 깨달음의 의식을 선명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백조가 떠 있어서 겉으로는 평화로운 것 같지만 물속에서는 부지런히 백조가 다리를 움직이면서 그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명상에서 나타난다.

명상을 하면 마음이 의식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서 평소와는 다른 마음 상태가 나타나게 되고 이 경험을 통해 마음과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향한 길이 만들어지게 된다. 보통 명상은 집중 상태, 순수 의식의 관찰 상태, 몸과 마음의 일치 상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상태, 마음의 침잠 상태 등등의 특징들을 통해서 설명된다. 하지만 명상의 구체적인 종류와 과정은 명상을 직접 행하는 수행자들의 경험과 명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최근 신경과학의 발전으로 명상의 성격과 그 구체적인 과정이 보다 객관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물론 명상의 깊은 내용과 과정이 단순한 두뇌 영상술로 다 드러날 수는 없지만 그 전체적인 성격은 신경과학의 수단으로 그 중요한 한 단면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명상 수행하시는 분들의 두뇌 영상 자료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을 알려주고 있다. 명상을 하면 두뇌의 구조와 활동이 변화하게 되는데 그중 눈에 띄는 점은 명상이 감각과 감정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를 처리하는 두뇌의 구조와 활동을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명상이 개념적 이해나 판단을 지원하는 두뇌 활동보다는 감각과 지각의 기본 단계에 두뇌 활동이 집중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체의 전체적 감각 상태를 처리하는 뇌섬(insula, 전두엽, 두정엽, 그리고 측두엽이 만나는 지역의 하층 부분에 존재하는 두뇌 기관, 전반적인 신체 감각 그리고 고통이나 혐오감 같은 감정을 다루는 기능을 담당) 같은 부분이 명상을 통해 활성화되고 또한 명상의 장기적 수행을 통해 그 부피가 구조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면 명상은 기본적으로 개념적 이해나 이성적 판단을 강조하는 정신 활동이 아니라 감각의 기본적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반응에 집중하는 활동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개념적 상위 인지 활동은 주로 전두엽이나 전전두엽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이성은 명상, 특별히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의 기본적 수행법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마음챙김 명상은 집중된 상태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 편견이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방법을 이용하는 명상법이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심상을 따로 해석하지 않고 나타나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의 의미는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편견이나 선입견이 나타나는 이유는 주어진 현상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모르게 축적한 개념과 이해의 틀을 가지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과 이해의 틀은 일반화된 관념이나 개인적 성향이나

신념 같은 것인데 이들은 감각이나 지각보다는 인식과 판단의 과정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런 틀과 해석은 주어진 현상을 통념화하고 이념화할 수 있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개념과 완전히 분리되어 지각되는 것은 아니지만 개념적 해석의 정도가 심해지면 주어진 현상 그 자체에는 없는 온갖 혼동이 발생한다. 한국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말이 있다. 솥뚜껑을 솥뚜껑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것을 자라라는 개념을 가지고 급하게 해석해버리면 갑자기 공포감이 생기는 것이다. 명상은 이런 과도한 해석이나 설정을 막고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볼 것을 요청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마음은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과도하게 설정해 없는 것을 가지고 걱정하고 우울해한다. 이런 마음의 거품을 다 제거하는 것이 명상의 과정인데 이 모습이 두뇌 영상에서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뇌의 변화가 불교적 행복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명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의식을 맑게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불교적 명상은, 집착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목표가 우선되는 것이므로 명상을 오로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깨달음의 불교적 행복관을 잘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마음의 즐거움을 줄 수는 있지만 즐거움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의 목표는 깨달음이며 깨달음이 불교적 행복의 실마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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