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1 불교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이해할 것인가__홍창성

불교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 그 방법론에 대한 논의

홍창성│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I. 불교의 현대적 이해란 무엇인가1)

불교는 약 25세기 전 붓다가 설파한 깨달음과 열반 그리고 자비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역사를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 동안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이해됐으며 또 새로운 모습의 가르침으로 출현하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왔다. 불교의 기본 성전이 되는 삼장(三藏, tripitaka)은 한번 완성되어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닫힌 체계가 아니다. 불교는 기존 삼장에 새로운 성전이 추가될 수도 있는 열린 체계이다. 성전뿐 아니라 승가의 교육법과 수행 방식 그리고 대중 교화 체계 등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열린 태도로 그 풍부한 내용을 더해왔다.

붓다의 가르침은 전파되는 장소에 따라 새로 적응하고 변화하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력을 보여왔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 시대의 문화에 맞도록 불교를 새로이 해석하고 이해하며 또 실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지구촌 전체가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오늘날 우리가 불교를 우리 시대에 맞도록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교를 현대적으로 이해하며 우리 시대의 것으로 진화시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대적’이라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현대가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시대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겠다. 그래서 자연과학과 공학을 뒷받침하는 수학적·논리적 사고의 영향력이 강하고 합리적 사고가 가진 장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합리적 판단을 방해하는 권위주의도 쇠퇴 일로에 있어서 이제 현대인은 따져보아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한편 정보 통신 분야의 발달로 모든 곳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우리는 서로 수많은 정보를 순간순간 교환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의 사고(思考)는 어떤 특정 문화에서

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띨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해가고 있다.

나는 불교의 현대적 해석과 이해도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이치에 맞다고 판단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한된 지역의 특정한 역사적 배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현대인에게 붓다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호부터 시작한 이 연재물을 불교적 전통에 익숙한 아시아인뿐만 아니라 서구인에게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용어와 논증 그리고 표현 방식으로 작성하려 한다. 이렇게 진행하는 불교에 대한 해석은 자연스럽게 불교를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한글로 에세이를 한 편씩 발표할 때마다 동시에 그 영어 번역도 인터넷으로 발표할 예정인데, 영어를 읽는 다른 나라 사람의 반응을 관찰하면서 나의 ‘불교의 현대적 이해’ 프로젝트가 얼마나 성공하는지 지켜보겠다.

II. 비교(comparison)와 융합(fusion)

불교가 보편성을 가지고 현대적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와 다양한 종교 및 철학 이론을 비교하면서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공통점을 추출해 그것을 이용하는 길이 쉽고 빠를 것 같아 보인다. 인문학 등에서 말하는 비교 연구(comparative studies)가 이렇게 여러 학문을 비교해 그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어 진리 추구 과정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이런 공통점이 발견되고 또 그 공통적 관점에서 불교가 해석된다면 이것이 불교의 현대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언뜻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런 연구 작업이 철학적으로는 넘을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두 사물을 비교한다는 것은 둘 사이에 닮은 점을 찾는다는 것인데, 이 닮음(similarity)이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투성이다. 우리는 이 둘에 공통점이 전혀 없다면 처음부터 닮은 점을 찾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한편 이 둘이 시공(時空)의 좌표까지도 포함해 모든 속성이 같다면 이 둘은 실제로는 하나인 동일한 대상일 수밖에 없을 테니 닮은 점을 찾는 비교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비교 연구가 가능한

두 사물에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은 곧 그 둘에 닮지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그 반대로 그 두 사물이 닮지 않았다는 것은 그 둘이 닮았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엉뚱한 결론을 도출하는 논의를 철학에서는 패러독스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닮음의 패러독스’라고 명명해보았다.2)

비교 또는 닮음의 패러독스는 본질적으로 닮음에 고정된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와 김정은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닮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두 사람 모두 각기 국가의 행정수반이고 뚱뚱한 남자이며 핵미사일을 누를 단추를 가지고 논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트럼프는 백인이고 북아메리카에 거주하며 부동산 사업가였지만 이 셋은 김정은에게는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 이 많은 비교의 기준 가운데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기준인지 알 수 없다. 닮음에는 절대적이고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비교 연구의 학문적 가치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이 많다. ‘멀리서 보면 모든 사람이 닮았다’는 말이 대변해주듯이, 두루뭉술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이론이 다 비슷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불교와 소립자물리학의 공통점을 논하는 비교 연구가 인기 있는데, 어떤 연구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공통점이 불교가 소립자물리학만큼 위대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연구자들은 다음의 두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 비교 연구가 보여주는 바가 (1) 불교가 소립자물리학과 양립 가능하다(compatible)는 것인가, 아니면 (2) 불교가 소립자물리학을 포함한다(include)는 것인가?

위의 둘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1) 그 두 이론 체계가 양립 가능하다는 점은 학문적으로는 극히 사소한(trivial) 발견이다. 왜냐하면 소립자물리학은 불교뿐 아니라 도교(道敎), 마르크스 변증법, 바이런의 시(詩) 등 그것과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은 모든 것과 양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립 가능성의 증명은 우리에게 별로 해주는 이야기가 없다. 한편 이 비교 연구가 (2) 불교

가 소립자물리학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이라면, 이것은 얼토당토않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물리학자들은 불교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만 해도 소립자물리학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전혀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 철학자들은 비교 연구의 학문적 가치에 대해 회의한다.3)

내가 선호하는 연구 방식은 비교(comparison)가 아니라 융합(fusion)이다. 우리는 비교 연구를 통해 두 이론을 더 잘 이해하고 각자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해야 할 텐데, 비교 연구는 단지 서로 비교가 잘된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융합으로 진행되는 연구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현대 서양 철학에서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이 서양의 자아론(自我論)을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는 무아론이 서양에서도 그 보편적 타당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두 전통의 단순 비교를 통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서양 철학자들이 자아(自我)에 대한 치열한 논쟁 끝에 무아론(無我論)이 가진 장점을 받아들여 나타나게 된 현상이다. 한편 현대 서양 철학의 인과론(因果論)이 가진 다양한 관점과 정교하고 엄밀한 논의가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

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대승(大乘)에서 발전시킨 비인과적인 관계(relation)로서의 연기에 대한 해석도 최근 서양 분석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관계론이 그 이해를 더 깊게 해줄 것이다.

불교를 현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교와 현대 철학 및 타 종교가 가진 공통점을 비교해 그 공통점의 관점에서 불교를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와 다른 이론 체계가 가진 장점을 서로서로 도입해 각각의 이론을 더 잘 이해하고 또 서로가 가진 문제를 더 잘 해결하게 하는 융합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장점을 합리적인 사고로 가려내고 그것이 현대인에게 보편적으로 이치에 맞는 내용이라는 점을 비판적 논의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도입된 장점을 통해 불교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 이해를 더 깊고 넓게 하며 기존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해나가는 것이 불교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III. 공부하는 방법

그러면 합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思考)하며 보편적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는 현대인은 불교 교리를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다른 모든 공부와 마찬가지로 불교도 가능하면 공부할 주제의 수를 줄이고 주제의 폭도 좁히면서 그 대신 깊게 파고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 주제의 수는 적을수록 좋다. 공부할 시간과 읽을 수 있는 글의 분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여러 주제를 다루게 된다면 어느 한 주제도 제대로 집중할 수 없다. 그래서 백과사전 읽듯이 여러 주제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을 열람하는 정도의 공부밖에는 못한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이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으로 여러 종류의 백과사전을 접할 수 있는 시대에는 특별히 공부라고 할 것도 없는 공부 방법이다. 우리는 공부의 넓이보다는 깊이가 훨씬 더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주제의 수를 줄여 하나나 둘로 만들더라도 그 주제가 처음부터 너무 큰 것이라면 효율적인 공부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불교에 입문한 초심자(初心者)가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고 해서 아무 준비도 없이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직접 공부하려든다면, 비록 헤아리지 못하는 이 단어가 그에게 어떤 신비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 공부는 몇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초심자는 공부에 곧 지치게 되고 만다. 그래서 초심자는 깨달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緣起)부터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기에 대한 공부도 그것이 처음에 12연기와 연관되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연기를 인과(因果)로 이해해야 하는지, 연기가 인과라면 어떤 종류의 인과인지, 또 대승(大乘)과 같이 연기를 비인과적인 관계(關係)로까지 확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도 하나하나씩 접해보아야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범위가 좁은 주제로 불교 공부를 시작해야 하며, 그 좁은 주제도 가능하면 더 잘게 쪼개어야 하고, 그 쪼개진 주제 하나하나도 각각 여러 각도에서 논의하며 공부를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연기에 대한 제대로 된 현대적 이해가 가능하다.

하나의 주제를 깊이 공부하고 논의한 경험을 하게 되면 그렇게 형성된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주제도 마찬가지로 깊이 공부하고 이해하며 관련된 논의를 스스로 전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양한 주제를 피상적으로 다루기만 한다면 결코 어떤 한 주제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진리의 길에 더 다가갈 수 있는 논의를 전개할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구체적으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특정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하게 될까? 학자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들의 연구에 깊이를 더해가는 것일까? 불교 초심자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공부 방법은 없을까?

심도(深度) 있는 공부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주제에 대해 여러 다른 각도에서 그 주제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며 이러한 설명에 대해 여러 반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공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붓다의 연기에 대한 가르침을 시간적 선후(先後) 관계를 바탕으로 한 인과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이며 이해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이때 우리는 먼저 인과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능한 설명을 고려해보아야 한다. 그리고는 인과관계에서 원인이 반드시 결과보다 시간적으로 앞서야만 하는가도 검토해야 한다. 동시적 인과(simultaneous causation)는 불가능할까? 또 양자역학에서 결과가 원인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경우라는 후행적 인과(backward causation)의 문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연기를 과거에서 미래로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인과관계로 본다면 이와 같은 반론 때문에

우리가 결국 붓다의 연기법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위의 문제를 해결하고 연기의 가르침을 살리기 위해 시간의 방향과는 상관없이 이해하는 인과관계가 바로 연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승(大乘)에서는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연기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다른 종류의 관계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실제로 좌우(左右), 상하(上下), 남녀(男女), 부부(夫婦), 사제(師弟) 등 많은 관계를 연기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상대성 이론은 어떤 물체의 길이나 두 사건 사이에 걸린 시간은 관찰자가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달리 측정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현상들을 인과관계로 보기는 어렵지만 연기의 개념으로는 포섭할 수 있다.

위와 같이 기존의 설명 또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고려해보고, 그다음에는 이런 반론들에 대한 재반박도 생각해보면서 원래의 주장을 다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계속 검토해야 한다. 이와 같이 제대로 된 공부와 연구는 토론이 진행되고 반대가 허용되며 또 재반박이 진행되는 논쟁의 형식을 띠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

고 이런 논의의 과정을 통해 특정 주제에 대해 점점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게 되고 우리는 진리에 더 다가가게 된다. 나의 이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연재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IV. 공부와 논의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공부는 불법(佛法)의 핵심인 연기에 대한 현대적 이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많은 불자들이 연기에 대한 이해가 불교의 근본이라고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연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접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연기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3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그다음에는 연기의 개념이 대승(大乘)에서 진화한 형태인 공(空)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논하겠다. 연기와 공(空)에 대한 논의를 마친 후에는 연기의 이해로부터 도출되는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의 삼법인(三法印)에 대한 논의를 6개월간 진행하려 한다. 그래서 1년 동안은 주로 연기에 대한 논의에만 집중하겠다. 그다음 6개월 동안은 연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깨달음, 열반, 선(禪), 불성과 여래장, 그리고 자비(慈悲)에 관한 논의를 간단히 다루며 연재를 마무리하려 한다.

공부와 논의는 분리될 수 없다. 어떤 공부도 비판적 시각으로 주제를 분석하고 주어진 주장의 오류 가능성을 고려하며 반론을 제기해보고 또 이에 대한 재반박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붓다의 가르침을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이치에 맞는 방식으로, 즉 현대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연재에서 나는 ‘공부’와 ‘논의’라는 말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겠다.

 

 

1) 엄밀히 말해 본 연재는 불교 교학과 참선, 전법과 대중 교화 등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불교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아니라 그 주제를 좁혀서 불교 교리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주된 목표로 한다.

2) 비교 또는 닮음의 패러독스는 나의 논문 「깨달음의 패러독스와 사적 언어 논증」에서 다룬 적이 있다. 『불교학보』 제62편, 2012, pp. 130~131)

3) 이와 관련된 추가 논의를 위해서는 내가 2015년 12월에 『미디어붓다』에 발표한 「불교와 다른 학문의 비교 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참고하기 바란다(http://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7125).

 

홍창성│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철학박사).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로 있다.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를 집필하고 있으며, 불교의 연기(緣起)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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