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사찰 순례|순천 선암사__주수완

 

 

조계산에서 만난 교종과 선종

 

조계산. 선종의 절대적 존재인 육조 혜능 선사께서 머물던 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산 이름이 불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부분 부처님이나 관음보살과 연관된 것이지 중국의 스님과 연관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혜능 스님이라면 다르다. 그분의 말씀은 이미 『육조단경』에서 보다시피 경전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던가. 그러니 조계 혜능 선사를 기려 조계산이란 이름을 지은 것은 그럴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산 이름을 조계산이라 이름 짓고 이후 우리나라 선종을 대표하는 조계종의 삼보사찰 중 하나가 된 송광사를 창건한 것은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선사였지만, 여기에 먼저 자리를 잡은 분은 선종이 아닌 교종의 천태종을 이끈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스님이었다. 선암사가 바로 이 의천 스님이 중창한 절이다. 산 하나를 두고 이렇게 고려시대의 쟁쟁한 고승 의천과 지눌 두 스님이 각각 선암사와 송광사를 키워낸 셈이다. 그러나 이 두 분이 만난 적은 없다. 의천 스님이 지눌 스님보다 100년 정도 앞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달리했어도 우연인지 필연인지 조계산을 찾은 이 두 스님은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의천 스님은 ‘교관겸수’, 지눌 스님은 ‘정혜쌍수’인데, ‘교관겸수’란 교종과 선종을 함께 수행한다는 뜻이고, ‘정혜쌍수’도 마찬가지로 선종과 교학을 함께 아우른다는 뜻이다. 이 당시에는 교종과 선종이 서로 비판하고 비방해 갈등의 골이 깊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천 스님으로부터 비로소 두 종파의 화해와 절충적 수행 방안에 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렇듯 대통합의 마인드를 가진 두 분이 이렇게 조계산이라는 하나의 산을 찾아 들어왔으니 조계산은 참 넉넉한 산인가 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의천 스님은 문종(재위 1046~1083)의 넷째 아들이라는 왕자의 신분으로 스님이 되었다. 왕족으로서 세상의 이로움을 모두 버리고 출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생각도 되지만, 당시에는 그런 일이 드물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의천 스님의 동생도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 사실상 왕실에서 의도적으로 이름난 승려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고도 보인다. 마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어떻게 해서든 기독교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제를 키워내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다 결국은 교황까지 배출했던 사례와 비슷할 듯하다. 불교계에 있어서 나라를 대표하는 국사의 자리에까지 의천 스님이 올라 대각국사가 되었으니,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왕실이 맨 위에 있는 그야말로 제정일치를 실현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 문종이 불교 개혁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당시 불교계는 교·선의 갈등뿐 아니라 극심히 타락했기에 문종은 승단을 ‘승복을 입은 업자에 다름 아니었다’는 투로 신랄하게 비판하며 부패한 사찰을 폐사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개혁을 승단 내부에서 스스로 완성해주기를 바랐을 문종은 그래서 왕실에서 승단을 이끌 지도자가 나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에 부응해 11세에 출가한 의천은 개경 원통사에서 주로 화엄종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송나라의 정원법사(淨源法師)의 명성을 듣고 편지로 질문을 주고받으며 일종의 온라인 과외 수업을 통해 불교의 폭을 넓혀갔다.

그러나 만약 의천 스님이 출가 후 왕실이 마련해놓은 길을 따라 걷기만 하지는 않았다. 첫 번째 일탈은 송나라 유학이었다. 당시는 동아시아 정세에서 거란이 송을 제치고 맹주로 떠오르고 있었다. 거란은 고려에게 계속해서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만 통교할 곳을 요구해왔다. 그런데 눈치도 없이 의천 스님이 송나라로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왕실에서는 허락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천 스님은 부왕인 문종이 승하하고 형인 선종이 즉위한 이후, 1185년이 돼서야 변장한 채 밀항해 송나라로 건너갔다.

두 번째는 왕실이 추구하던 종파와는 다른 길로 갔다는 것이다. 당시 왕실은 법상종을 주로 지지하였고, 자신이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은 화엄종이었다. 그러나 송나라 유학 동안 스님에게 평생의 학으로 마음잡게 한 종파는 천태종이었다. 그는 천태종을 창시한 지자대사 지의(智, 538~597)의 부도 앞에서 고려의 천태종을 부활시킬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화엄, 법상 모두로부터 환영받을 일은 아니었다.

귀국 후에는 왕실의 배려로 흥왕사 주지로 임명되어 대장경 간행을 이끌었다. 이것이 『초조대장경』에 이은 『속장경』으로 팔만대장경의 기초가 된 사업이었다. 또한 화폐 유통을 추진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속내는 불교의 개혁, 그리고 화엄, 법상의 융합, 교·선의 통합을 위한 구상에 가득차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중심으로 했던 소위 ‘왕자 출신의 국사’로서의 행보는 그간 자신을 뒷바라지했던 왕실에 대한 보답의 차원이자 의무 같은 것이었지만, 자신의 진정한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이곳 조계산의 선암사를 선택했다.

선암사의 창건은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라고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창건과 절의 이름도 매우 풍수적이다. 즉 호남에 3암이 있는데, 광양 백계산 운암, 순천 조계산 선암, 영암 월출산 용암이어서 도선국사가 여기에 각각 운암사, 선암사, 용암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또한 선암이라는 바위는 신선이 내려준 신령한 바위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래서 선암사로 들어갈 때 건너야

하는 아름다운 홍예교의 이름은 ‘승선교’, 즉 선계로 오르는 다리이다.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일주문 역할을 하는 누각의 이름은 ‘강선루’, 즉 신선이 내려온 다리이니, 이렇게 ‘승’과 ‘강’, 즉 ‘오름’과 ‘내림’을 대비시켜 그 접점이 결국 성·속의 경계가 되게 했다. 아마도 승선교의 홍예 아치 사이로 바라본 강선루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한국의 사찰을 소개하거나 관광 안내 책자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그야말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뛰고 있는 듯한 모습처럼 다가온다.

강선루를 지나 조금 더 일주문을 향해 걷다 보면 ‘삼인당(三印塘)’이라고 하는 연못을 만나게 된다. 타원형의 연못은 유례가 없는 매우 독특한 형태인데, 이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의 고풍스러운 연못일 것으로 짐작되어왔다. 그런데 마침 비교적 근래에 남원 실상사 사역 발굴에서 둥근 강돌을 깐 타원형 연못지가 발굴되어 타원형 형태가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이라는 것에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연못을 ‘당(塘)’이라고 하는데, 이는 제방, 둑이라는 의미로 삼인당이 단지 관상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주변에서 행해졌던 경작에 물을 대는데 중요한 시설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곳에 머물렀던 승려들이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사찰 주변의 경사지를 개간해 경작함으로써 자급자족함에 있어 이러한 제방 시설은 실용적 역할을 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삼인당 인근 성보박물관 아래로도 또 하나의 연못이 있고, 경내에도 잘 보이지 않지만 여러 연못이 숨어 있다. 선암사에 이렇게 여러 연못들을 설치한 것은 단순한 감상용 그 이상의 목적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럼에도 삼인당처럼 가운데 섬을 띄워 운치를 더했으니 참으로 세심한 손길이라 하겠다.

일주문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원시림처럼 잘 자란 나무들이 하늘 높이 뻗어 있다. 때문에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 너머에 가람의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선암사의 비밀을 감추는 듯한 작은 일주문은 그럼에도 커다란 지붕을 지니고 있다. 다른 절처럼 위압적인 금강역사상이나 사천왕은 없지만, 대신 이 커다란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듯한 일주문이 압도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주문을 지나 범종루 아래로 들어서면 눈앞에 길게 늘어선 만세루가 시야를 막으며 버티고 있다. 만세루 아래로 지나가라는 것도 아니고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만약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큰 현판이 달려 있지 않았다면 뭔데 길을 막냐고 다그치기라도 하고 싶다. “육조고사”라! 아마도 육조 혜능 스님을 기리는 사찰이라는 뜻인 것 같은데, 뭐 그렇다면 기꺼이 돌아가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혜능 스님을 뜻하는 것이라면 ‘조(朝)’가 아닌 ‘조(祖)’를 썼어야 함에도 왜 저렇게 썼을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으나 시비를 걸 겨를도 주지

않는다. 그저 만세루의 다소 심심한 듯하면서도 장쾌하게 좌우로 벌린 모습과 편액에 쓰인 글자체의 모습이 서로 닮은 듯해 감탄하게 될 뿐이다. 혹 육조(六朝)시대, 즉 남북조시대에 중국에 건너오신 초조 달마대사와 그 여섯 번째 조사 혜능을 동시에 기리는 중의적 표현인 것일까?

만세루를 돌아 쌍탑과 그 사이로 서 있는 대웅전과 대면한다. 선암사의 역사가 대각국사 의천 스님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졌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쌍탑이 서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결코 작은 암자 수준의 절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된다. 대웅전 계단 앞쪽에 놓인 두 쌍의 석조 지주는 선암사 석가모니 괘불탱을 걸기 위한 것이다. 1753년에 그려진 높이 12.5m의 이 괘불은 중앙에 서계신 당당한 석가모니가 압도적인 분위기로 그려졌으면서도 그 세부 묘사를 보면 가사의 촘촘한 꽃무늬가 정교하고 섬세하기 그지없다. 상단 좌우에는 오직 시방제불과 다보탑만을 묘사해 이 장면이 『법화경』 설법 장면이라는 것을 분명하면서도 간명하게 드러낸 걸작이다. 이 괘불을 걸기 위한 지주들은 다른 절에서와 달리 나란히 서 있지 않고 마치 안쪽으로 돌아선 듯 반측면으로 늘어선 것이 독특하다. 때문에 괘불을 걸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 평소에도 마치 대웅전으로 올라서는 계단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듯이 보인다.

팔작지붕의 대웅전에서 독특한 점은 정면 3칸 중에서 가운데 칸은 좌우 협간의 문지방보다 한 단 높은 머름을 높게 덧대어 이곳은 오로지 부처님만이 다니시는 길임을 강조한 듯하다. 이런 작은 손길은 부처님에게 다가가는 길을 더욱 엄숙하게 만든다. 대웅전에 모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고찰이 대각국사 의천 대사가 중국 천태산의 지의 대사 승탑 앞에서 맹세한 바, 천태종의 핵심 사상인 『법화경』의 주존 석가모니를 모신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대웅전의 내부는 선이 굵다. 대들보가 큰 용처럼 양쪽 옆에서 솟구쳐 나와 자기들끼리 얽히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이 대웅전 앞뜰에서 보면 선암사는 가람 배치가 상당히 질서 있는 사찰이다. 산지 가람이지만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선 전각들은 마치 엄격한 훈련을 받은 생도들처럼 도열해 있다. 그러나 그런 질서가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비록 전체의 유기적인 배치는 좌우대칭적이지만 건물 하나하나는 매우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리만 지킨다면 그 모습은 편한 대로 해도 된다는 표시 같다. 그래서 공간을 감싸고 있는 전각들이지만 딱딱하고 폐쇄적이라기보다는 그 공간에 들어선 사람을 자연스럽게 감싸주고 있다.

이 대웅전까지의 공간도 아름답지만, 사실 선암사의 진짜 매력은 대웅전 뒤편의 사역에 있다. 보통 산지 가람은 대웅전이 경내의 맨 위이자 맨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까지 보았으면 그 뒤의 전각은 그리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선암사는 다르다. 그래서일까. 일주문에서 범종루, 만세루, 그리고 대웅전까지는 동선이 다소 급한 느낌이다. 영

화의 줄거리가 중간에 모두 소개된 느낌이랄까. 그래서 잠시 당황하지만, 사실 그 뒤에 특별한 반전이 숨어 있다. 선암사는 가람 배치상으로 보면 대웅전이 앞부분으로 돌출되어 있고, 그 뒤로 숨겨진 꽤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대각국사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모든 불교 사상을 아우르려고 했던 마음의 표현인지도 모르겠으나, 대웅전이라는 플래그십이 맨 앞을 인도하고 그 뒤로 다양한 전각들이 뒤따르고 있는 모양새다.

이들 뒤편에 빼곡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자리 잡은 전각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원통전이다. 관음보살을 모신 이 전각은 정자각 형태인 ‘T’형 평면을 하고 있는데, 전각 앞에서 보면 학 한 마리가 고개를 길게 내밀고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이어서 장관이다. 이 전각은 정조대왕이 선암사의 눌암 대사에게 기도를 부탁한 결과 아들이 태어났고, 이 아들이 순조로 즉위한 후 감사의 뜻으로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내려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그 현판은 건물 안에 걸려 있다. 왕실의 기도처였던 때문인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또 하나의 방이 있는 것처럼 이중으로 구획된 것이 눈에 띈다. 왕실 원당 건축의 특징이기도 하다.

평소 개방되지는 않지만, 스님들의 요사채인 달마각의 수조 역시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한 바 있는 유명한 곳이다. 4개의 석조 수조를 높낮이를 차례로 낮춰가며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단계적으로 받아내리는 시설인데, 달마각 안에는 이 물로 차를 다릴 수 있는 차구가 준비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인테리어를 갖춘 스님들만의 카페인 셈이다.

끝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선암사 측간(해우소), 즉 화장실이다. 최소한 1900년대 초반에는 세워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니, 재래식 화장실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재래식이라는 편견과 달리 이 선암사를 찾는 수많은 속인들과 또 스님들의 볼일을 다 받아내고 있는 이 거대한 측간은 의외로 편리하고 정감이 있고, 더구나 친환경적이라 재래식은 무조건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은 여기서 함께 버리고 가야 할 듯싶다.

선암사에는 이외에도 발길 닿는 곳마다 멋진 비석과 승탑, 불화 등이 가득하다. 지면의 제약으로 일일이 소개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있다. 특히 이번에 한국의 7대 산사 중 하나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각별한 아름다움은 이제 세계인의 것이 되었으니 더욱 사랑받는 사찰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 선암사
주소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
전화 : 061-725-5108
홈페이지 : www.선암사.org

 

주수완|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석사를,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저로 『솔도파의 작은 거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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