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중계] “연기법은 자연계서도 적용 가능”

 
불교진흥원 화요열린강좌…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주제 : 양자역학과 반야심경

(재)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이각범)은 7월 17일 서울 다보빌딩 다보원서 〈현대물리학으로 풀어본 반야심경〉의 저자인 김성구 교수를 초청해 화요열린강좌를 열었다. 김 교수는 ‘양자역학과 반야심경’을 주제로 불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반야심경〉을 물리학 관점서 조명하는 내용으로 강의했다.

연기법 이치 따르는 불교,

실체론적 타 종교와 구분
입자-파동 이중성 띠는 빛
양자역학 내 ‘空’ 반영 사례

이번 강의는 반야심경의 내용과 맞닿아있는 물리학적 개념들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 개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부정적인 비난도 존재합니다. 인도 대통령을 역임했던 라다 크리슈난과 철학자 존 노스는 “어떤 불교도들은 자아를 단지 공이라고 여김으로써 그것을 형이상학적 추상으로 던져버린다” “무상·고·무아 개념들은 삶에 대한 인간의 의기를 소침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이 평가들은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생긴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물리학적 접근을 통해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공·중도 VS 이분법·실체론 
먼저 불교만 유독 평화로운 종교로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 3대 종교로 꼽히는 다른 종교들(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은 모두 폭력이 아닌 사랑과 관용을 가르쳤습니다. 성자들의 가르침과 달리 마녀사냥과 종교전쟁이 자행된 것은 어째서일까요?

성자의 가르침만큼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종교인들의 철학과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역시 부처님의 깨달음, 가르침과 더불어 불자들의 실천이 있을 때 비로소 종교로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불교의 ‘실체와 세계관’에 대한 인식은 타 종교들과 다릅니다. 종교가 세계평화와 인간의 영원한 행복을 위한 가르침이라면, 불교의 핵심경전인 〈반야심경〉서 논하는 공(空)과 중도(中道)의 원리에 기반을 둔 철학이 필요합니다. 이는 이분법적 사고와 실체론적 세계관과 대척점에 있는 인식입니다.

만약 공과 중도의 개념이 없다면 무엇이 선이고 정의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공과 중도의 원리대로라면 선과 악의 개념은 달라집니다. 실체론적 입장서 볼 때 과연 마녀사냥은 악행이고 잔인한 일로 받아들여질까요?

타 종교서 언급하는 ‘성인’ ‘성자’는 대승불교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여기는 ‘보살’과는 전혀 다릅니다. 성인은 신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성스러운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과 중세 기독교인들은 악을 멸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자들의 가르침을 그렇게 해석한 것이죠.

사물을 실체론적으로 보는지, 관계론적으로 보는지에 따라 선과 악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분법적 사고의 바탕에는 사물을 실체로서 인식하는 ‘실체론적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선과 악은 대립적인 관계에 있고, 악은 멸해야 할 대상입니다.

반면 선과 정의는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고, 마녀사냥을 하고, 이교도를 정벌·약탈·학살한 일들은 모두 신과 정의라는 명분 아래 인간이 저지른 일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정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잔인하고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어서 우리는 사물의 이중성(二重性)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중성은 양면성(兩面性)과는 다른 개념으로, 한 사물이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을 띠는 것입니다. 즉 논리적으로 모순된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죠.

불교에서는 선과 악을 분리된 다른 둘로 보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 세상 사물의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색심불이(色心不二)’ ‘색즉시공’ ‘생사 즉 열반’ ‘범부 즉 부처’ ‘번뇌 즉 보리’ 등 불교적 표현은 모두 이중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범부 즉 부처로 예를 들어보면, 범부일 때도 있고 부처일 때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범부이면서 부처이기도 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입자-파동의 이중성 
그렇다면 자연에서도 이중성에 해당하는 현상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양자역학 기초 개념인 ‘입자-파동의 이중성’이 바로 그 사례입니다. 양자역학에서 퀀텀(양자, quantum)이란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퀀텀은 덩어리, 덩어리로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양자역학은 ‘힘과 운동’의 이론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양자역학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이론인 것이죠.

입자와 파동에 대해 각각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입자는 아무리 움직여도 개수가 그대로죠. 충격을 가해 다른 입자에게 운동량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잘 알려진 입자의 성질이죠. 하지만 파동은 진동은 있지만 충격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골과 골, 마루와 마루가 겹칠 때 진폭은 두 배가 됩니다. 파동의 세기는 항상 진폭의 제곱으로, 진폭이 1이라고 할 때 세기는 2, 진폭이 2일 때 4 등이 되죠. 그런데 세기가 다른 파동을 잘 조절해서 합친 파동이 모이면 골과 마루가 합쳐져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결국 제로가 됩니다. 즉 보강간섭과 소멸간섭 모두 파동의 성질인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입자는 덩어리로 떨어져 셀 수 있고, 공간에 갇혀 있으며, 몸에 해당하는 ‘실재’고, 개별 입자가 갖는 물리량의 합을 ‘물리량’이라고 합니다. 파동은 연속적이라 나누거나 셀 수 없고, 전파되며, 몸짓에 해당하는 ‘현상’이며, 보강과 소멸이란 간섭으로 아까 말씀드렸듯이 4이면서 0이 될 수 있어요. 이처럼 파동과 입자는 각각 논리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성질들을 띠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물리학자들은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이중 슬릿(double slit)’ 실험이라고 하는데요. 벽면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놓고 빛을 쪼이면 두 개 구멍을 통과한 빛은 반대편 벽면에 명과 암이 교차하는 무늬인 간섭무늬를 만듭니다. 입자는 간섭무늬를 만들 수 없고 파동만 간섭무늬를 만듭니다. 빛이 간섭무늬를 만들기 때문에 빛은 파동이라고 증명된 셈이었죠. 이 실험 전까지 당대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가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다음으로 컴프턴(Compton)의 실험을 보겠습니다. 컴프턴이란 물리학자는 이 실험을 통해 ‘컴프턴 효과’를 발견합니다.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쳐서 튕겨내는 것처럼 빛이 다른 입자를 쳐서 튕겨내고 빛 자신도 튕겨나는 현상이에요. 이성적 사유로 볼 때 빛은 절대 파동인 이상 입자일 수 없습니다. 빛이 파동이라면 입자를 튕겨나가게 하지 못해요. 그런데 빛이 전자를 튕겨나가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빛이 입자라는 증거가 됩니다. 이 발견으로 인해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교는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일 뿐 아니라 사물 전체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깨우친 자가 부처고 깨치지 못한 자가 범부라고 할 때, 범부가 그대로 부처라고 하죠. 여러분이 눈만 뜨면 부처라고 말이에요.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소립자들이 입자이자 파동입니다. 석가모니만 파동이라 생각했는데 우리 모두가 파동이었다는 것과 같죠.

확률파의 공 원리 
입자 파동의 이중성서 말하는 파동을 현대 물리학에선 ‘확률파’라고 해석합니다. 확률파는 ‘공(空)’과 비교할 만한 개념입니다. 독일 물리학자 막스 보른은 입자가 파동처럼 모든 공간에 퍼져 있는 게 아니라, 입자가 존재할 확률이 파동의 성질을 갖고 모든 공간에 걸쳐 분포돼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파동의 전파는 입자가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입자에 대해 알 수 있는 어떤 정보가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입자를 발견할 가능성이 전 공간에 걸쳐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확률파를 이해하려면 측정하지 않고 입자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측정 전에는 ‘입자가 존재할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에요. 측정을 하면 파동은 사라지고 입자가 나타납니다. 즉 측정 후에야 비로소 입자의 존재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죠.

확률파는 입자가 존재할 확률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존재입니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을 깨뜨리는 개념인 것입니다. 소립자는 먼지나 모래알 같은 어떤 알맹이가 아니에요. 미시세계의 소립자란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일 뿐, 객관적 존재일 수 없습니다. 측정장치와 상호작용 이외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불교서 말하는 연기법과 닮았다고 여겨집니다.

연기법과 물리학 
스몰린 리는 〈양자중력의 세 가지 길〉을 통해 사물의 실재성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어떤 것(things)’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서서히 변하는 것과 빨리 변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주에는 물체(object)와 과정(process)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빠른 과정과 느린 과정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반야심경〉이 담고 있는 불교적 진리와 더불어 생각해볼 만한 물리학적 사례들을 살펴봤습니다.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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