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사찰 순례|양양 낙산사__주수완

바다를 만나 산이 된 절

양양 낙산사

관음보살은 불교문화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보살이시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마치 어머니가 자식의 죄를 감싸주듯이 우리를 변호해주시고 우리를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달래는 그런 보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가 뿌리내린 곳이라면 어디나 관음보살이 나타나신 곳, 관음보살이 기적을 일으키신 곳 등등 관음보살과 연관된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삼국유사』에는 관음보살의 기적을 다룬 장소가 여러 곳 언급되어 있다.
경전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머무시는 곳은 인도 남해 바다에 인접한 포탈락가산이라고 한다. 티베트 라사의 달라이 라마 궁을 포탈라 궁이라고 부르는 것도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이 한자로 옮겨질 때는 포탈락가의 앞을 따서 보타락산, 혹은 보타산이라고 불렸다. 보타산이라는 산 이름이나, 혹은 보타사라고 하는 절 이름은 모두 관음신앙의 반영이다. 이와 함께 ‘포탈락가’를 뜻으로 풀어 한자로 옮기면 백화산(白華山)이 되는데, 우리나라에만도 백화산이란 이름의 산이 대여섯이니 관음보살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관음보살 성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은 역시 강원도 양양 낙산사이다. ‘낙산’은 특이하게도 포탈락가의 뒷부분 ‘락가’를 음차한 ‘낙가산’의 준말이다. 이곳이 관음보살 성지로 유명하게 된 기원은 신라 통일기의 의상대사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상대사께서는 아마도 650년경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서(혹은 661년이라고도 한다) 670년에 귀국하셨는데, 당에 유학하는 동안에는 화엄종의 고승 지엄 문하에서 공부했다. 670년 귀국하게 된 것은 당시 당에 억류되어 있었던 김인문(문무왕의 동생이다)이 당나라의 신라 침공 사실을 급하게 본국에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신라와 당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지만, 이후 정세가 급변, 당은 신라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670년에 급거 귀국길에 올랐지만, 그의 스승 지엄 스님이 668년에 입적했기 때문에, 만약 그러한 급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면 의상은 당에 남아 화엄종의 제3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스님이 귀국함으로써 의상보다 연하이자 동문인 현수 법장이 3조에 오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 낙산사 홍련암. 두 번의 대형 화재 속에서도 영험하게 살아남았다.

2. 홍련암 바닥을 통해 내려다본 관음보살 진신 현현처

3. 의상대사께서 관음 친견을 위해 재계했다는 의상대

4. 일본 다이토쿠지 소장 고려 <수월관음도>

여하간 의상대사는 급히 귀국해 성공적으로 당의 움직임을 신라 조정에 알렸는데, 실제 670년 3월, 신라가 먼저 당군에 대해 선제공격했던 사실은 아마도 의상대사의 활약 덕분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의상대사였지만, 대사는 임무를 완수하자 곧바로 양양 낙산사로 향했다. 인도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신라의 양양 낙산에 관음보살이 머무신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친견하러 떠나신 것이다. 관음보살은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의 협시로서 정토신앙을 대변한다. 반면 의상대사가 배워 온 중국의 화엄종에서는 일반적으로 오대산에 머무시는 문수보살을 제일로 모신다. 하지만 문수보살은 자장율사가 그토록 뵙고 싶어 했던 대상이었고, 의상대사는-그리고 비록 실패했지만 원효대사도- 오히려 관음보살을 뵙기를 원했다. 관음보살은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찾아 나선 28번째 선지식으로 등장하는데, 이런 이유로 의상대사께서는 관음보살을 특히 뵙고 싶으셨던 것 같다. 화엄종에서 관음보살을 중시하는 성향은 아마도 이렇게 의상계 화엄종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대사는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7일 동안을 재계했는데, 그러자 동해의 용왕이 나타나 관음보살이 현현하실 동굴로 안내하며 수정 염주와 여의보주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7일이 지나서 드디어 관음의 진신을 뵙게 되었는데, 관음보살은 동굴 위에 대나무가 자랄 것이니 그 자리에 금당을 세워달라는 당부를 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의상대사께서 재계한 곳이 바로 지금의 낙산사 의상대이며, 관음보살이 현현하신 곳 위로 대나무가 솟아난 자리에 세워진 절이 홍련암이다. 의상대에는 마치 아직도 의상대사께서 관음보살을 기다리며 계신 듯 외로운 소나무가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당당히 서 있다. 한편 홍련암 안에 들어가면 바닥에 작은 창을 내어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 그 아래로 보이는 절벽 틈새가 바로 관음보살이 현현하신 동굴인 것이다. 홍련암이 『삼국유사』의 설화 그대로 동굴 바위 틈 위에 세워져 있음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다.
고려 불화 중에는 <수월관음도>로 알려진 그림이 다수 전하고 있는데, 원래 이 그림은 중국에서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가 포탈락가산의 관음보살을 만나 뵙고 선지식을 구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일본 다이토쿠지(大德寺)에 전하는 고려 <수월관음도>에는 용왕이 등장하고 있는데, 「입법계품」에는 용왕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왜 여기에 용왕이 묘사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이에 대해 고려 수월관음도는 「입법계품」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삼국유사』에 실린 의상대사의 낙산사 관음보살 친견 설화를 묘사한 것임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 즉 의상대사께 보주를 전했던 동해 용왕을 묘사한 것이 되는 셈이다. 그렇게 보고나니 고려 <수월관음도> 속의 관음보살께서 앉아계신 바위의 모습이나 실제 낙산사 홍련암 아래로 펼쳐진 바위의 모습이나 매우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도 설화 속의 내용을 불화에 담아내던 것에서 발전해 고려시대에 들어와 우리의 설화를 담아내는 것으로 변화한 것은 당시 거란과 여진, 그리고 몽고라는 강대국 속에서 군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버텨내며 싹튼 민족주의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강한 저항 정신 속에서 우리 국토가 관음보살이 머무는 신성한 땅임을 강조하고 또한 그런 성인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음을 믿었던 일종의 ‘신토불이’ 정신이라고나 할까.
의상대사는 홍련암을 세운 후 관음보살의 모습을 본떠 관음상을 조성해 봉안했는데, 아쉽게도 그 상은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대신 원통보전에는 조선시대에 건칠로 조성된 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의상대사가 조성했다는 ‘원만하고 우아한(圓容麗質)’ 관음상의 자태가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듯하다. 마침 형태도 이와 아주 유사할 뿐 아니라 재료까지 건칠로 조성한 관음보살상이 파계사에 전하고 있는데, 이는 세종 29년(1447)에 다시 고쳐 만든 것이라 한다. 워낙에 두 보살상이 유사하므로 비슷한 시기로 보이며, 아마 이보다 조금 더 앞선 건칠보살상은 영덕 장육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아마 모두 조선 초기에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대한 성지순례가 행해지면서 주요 거점마다 의상대사의 관음보살 친견을 기념해 만들어진 상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 세조가 적멸보궁을 비롯해 낙산사에 이르기까지 순례를 했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때 세조가 낙산사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 세운 문이 지금의 홍예문이라고 전하는데, 일반적인 일주문과 달리 마치 성문처럼 생긴 문은 낙산사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 보살상과 함께 낙산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관음보살상은 비교적 근래인 1977년에 조성된 것이긴 하지만 높이 16m에 달하는 거대한 해수관음상이다. 특히 멀리서 보더라도 금방 눈에 띄는 흰색의 밝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는데, 그 때문에 백의관음의 인상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러한 보타락가산 신앙은 중국 절강성 주산시(舟山市)의 보타산이나 베트남 다낭에서도 볼 수 있는데, 낙산사 해수관음상과 매우 비슷한 느낌의 해수관음상들이 세워져 있다. 언뜻 베트남은 우리보다 더 인도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고, 중국은 우리에게 불교를 전해준 나라이기도 하므로, 베트남이나 절강성의 보타산 해수관음 신앙이 더 유래가 오래되었을 것 같지만, 실상 670년에 의상대사에 의해 세워진 낙산사 신앙이 문헌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오히려 신라의 불국토 신앙이 중국과 베트남에 퍼져 나간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불교 수입국에서 불교 수출국이 되었으니, 법흥왕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보면 참으로 엄청난 성장이라 하겠다. 이 낙산사 해수관음은 동해를 바라보고 있지만, 실상은 더 나아가 태평양을 바라보고 계신 셈이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아시아의 동쪽 끝단 신라에 이르러 태평양을 마주하셨으니, 이제 멀리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포교하는 우리 불교 교단의 활약을 지켜보고 계신 것은 아닐까 싶다.
비록 거대한 해수관음상은 근래의 작품이지만, 이러한 신앙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음은

       

 

1. 낙산사 원통보전 건칠관음보살좌상

2. 영덕 장육사 건칠관음보살좌상

3. 낙산사 홍예문

 

   

1. 낙산사 해수관음상. 높이 16m

2. 베트남 다낭 해수관음상

3.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후벽 백의관음도

4. 낙산사의 세 발 달린 두꺼비(삼족섬)

 

조선시대 사찰 법당의 불화가 걸려 있는 벽면 뒤편에 그려진 백의관음보살도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대체로 벽면에 가득하게 크게 그려진 관음보살은 백의를 걸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와는 분위기가 또 다르다. 그런데 예를 들어 무위사 극락보전의 후벽에 그려진 백의관음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쓰여 있다.

해안고절처(海岸孤絶處) 바닷가 절벽 높은 곳
중유낙가봉(中有洛迦峰) 그 가운데 낙가봉 솟았는데
대성주불주(大聖住不住) 대성께서는 머무시는가 아니신가
보문봉불봉(普門逢不逢) 보문은 솟을 것인가 아닌가
명주비아욕(明珠非我欲) 여의주는 내가 바라는 바 아니요
청조시인수(靑鳥是人遂) 오로지 파랑새를 쫓는 것이니
단원창파상(但願蒼波上) 그저 푸른 바다 위에 나투신
친참만월용(親參滿月容) 관음을 뵙길 원할 뿐이로다

여기서의 청조, 즉 파랑새 역시 『삼국유사』의 낙산사 설화에 등장하고 있는데, 즉 의상대사께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셨다고 해 뒤이어 낙산사로 찾아간 원효대사와 연관된 이야기다. 원효대사가 낙산사 인근에 이르러 목이 말라 근처 개울에서 빨래하고 있던 아낙에게 물을 달라 청했는데, 그 아낙은 월수백(생리대)을 빨던 물을 떠서 원효에게 건넸다. 원효는 이에 그 물을 더러워 쏟아버렸는데, 그러나 근처 소나무 위에 있던 파랑새가 “제호(일종의 감로수)를 거절한 화상이여!” 하고는 날아가버렸다는 것이다. 실상 그 파랑새가 바로 관음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이를 통해 파랑새를 노래한 이 무위사 후벽 백의관음도와 함께 쓰여진 시를 통해 사실 이러한 백의관음상이 바로 낙산사 해수관음상과 같은 대형 백의관음상의 원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관음성지 낙산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인근 산불로 전소된 적이 있다. 당시 다른 곳은 탔지만 다행히 홍련암 앞에서 불길이 멈춰 관음보살의 신비한 보살핌이 있는 곳임을 재차 확인했다는 이야기도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2005년에 산불이 났을 때 낙산사가 전소되고 불길이 동해 쪽으로 번져오다가 『삼국유사』가 전하는 바와 같이 다시금 홍련암 앞에서 멈춰 홍련암만은 불타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낙산사는 화재의 아픔을 딛고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옛 모습에 더 충실한 사찰로 거듭났으니, 아마도 홍련암이 만들어낸 기적은 스님들과 함께 사부대중에 힘을 실어준

 

     

1. 단원 김호도가 그린 <낙산사도>

2. 김홍도 <낙산사도>에 의거해 조성된 낙산사(빈일루)

 

덕분이리라.
화재 후 낙산사를 복원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것은 겸재 정선 및 단원 김홍도 같은 쟁쟁한 진경시대의 화가들이 남긴 그림이었다. 특히 단원이 남긴 <낙산사도>에 의하면 네모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앞으로 툭 튀어나온 누각이 보이는 매우 독특한 가람 배치이다. 담장은 유명한 낙산사의 꽃 담장이었을 것이고, 누각인 빈일루(賓日樓)는 화재 후 복원하면서 원 모습을 찾게 되었다. 낙산사의 중창은 거의 무에서 유를 일구는 과정이었지만 오히려 단원의 그림 속 옛 모습을 찾아 복원해 의미를 더했으니 문화재 복원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참고로 낙산사에서 한 가지 더 꼭 챙겨야 하는 것은 바로 해수관음상 아래에 숨어 있는 세 발 달린 두꺼비를 찾아 소원을 비는 것이다. 세 발 달린 두꺼비는 과거부터 행운을 가져다주는 영험한 동물로 알려져 왔다. 이 두꺼비는 두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니 해수관음보살님께 참배 후 이 두꺼비를 찾아 바람을 속삭이는 것도 잊지 마시길.
산은 산이지만 바다와 만나는 산, 낙산. 그곳 바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낙산사는 그야말로 신라 불교가 빚어낸 최고의 문화 콘텐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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