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기획|행복 : 마음의 지혜와 과학 6__석봉래

감동의 행복과
행복의 감동

 

석봉래|미국 앨버니아 대학교 니액 연구 교수

탁월한 인격의 성공적 실현이라는 이상을 행복(잘 사는 인생)으로 규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자기실현적 행복관의 원형을 보여준다. 자기실현적 행복관은 자신의 능력을 이상적으로 실현하는 것으로 행복을 정의하는 행복관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기실현적 행복관에는 두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다. 첫째로, 그가 말하는 행복에는 짜릿한 행복의 느낌이 약하다. 행복에는 보통 긍정적 정서나 감정 같은 주관적 측면이 있는데 이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에는 강조되지 않는다. 음식으로 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잘 차려진 영양분이 가득한 음식과 같은데, 이 음식은 몸에는 좋지만 자극적인 양념이 첨가되지 않아서 그저 덤덤한 맛이 난다. 흔히 많은 분들이 행복이라고 할 때 가슴 벅찬 느낌이나 짜릿한 황홀감을 기대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강한 느낌이 없다. 오랜 기간 동안 노력하고 발전시킨 인격의 탁월함에서 행복이 나오기 때문에 강한 쾌감이나 순간적 만족감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과 번영으로서의 행복이다. 아마도 행복 자체와 (즉 객관적으로 잘사는 인생과) 행복감(주관적인 짜릿한 느낌)을 분리한다면 전자를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이해할 수 있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짧은 순간 방출하고 짜릿한 느낌을 맛보는 단거리 경주와 오랜 기간 준비하고 치밀한 전략의 실행을 통해 우승할 수 있는 마라톤은 그 지향점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행복관에서 행복감이 전혀 결여된 것은 아니다. 긴 레이스를 달리고 그 성공적 우승을 달성하면 지속적인 만족의 느낌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만족의 느낌을 위해 우승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인생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만족의 느낌이 나오는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 주는 느낌은 감동적 느낌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성공적 행복이 주는 감동이다.

행운인가 행복인가?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 가지고 있는 의문점 중 하나는 운(運)에 관한 것이다. 탁월함의 성공적인 발휘를 위해서는 외적인 조건이 잘 맞아야 한다. 운이 좋아야 한다. 탁월한 인격과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 인생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가? 행복에 있어 운의 역할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운(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우연한 사건)이 가진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운이 나쁘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예를 들어 토너먼트(tournament) 방식(이기는 선수들이 연속적으로 경기해 최종 승자를 가리는 방식)으로 치르는 경기에서는 선수들의 객관적인 능력과 관계없이 대진운(對陣運)이라는 것이 있어서 만일 한 선수가 강한 상대를 피하고 쉬운 상대를 계속 만나면 이 선수는 우승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행복에서 행(幸)이라는 것은 원래 행운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운이 (예측할 수 없는 외적인 요소가) 과연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가?
행복의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인간의 내적인 능력, 즉 잘 개발된 인격의 탁월성, 지적인 능력, 일관된 성격 등이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을 벗어나는 외적인 조건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노예로 태어났다거나, 타고난 건강이 좋지 않다거나, 좋은 학교가 주변에 없는 지역에서 태어났다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가정에 태어났다거나 하면 그 사람의 탁월성을 잘 발휘하는 번창하는 삶을 성공적으로 이룰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행복이 주변 여건에 의해 방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의 덕이나 내적인 능력이 그 사람의 행복에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외부적인 요소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한다. 그래서 궂은 날씨를 대비하듯, 이런 외부적 변수들에 대해서도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되도록이면 좋은 환경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학교를 찾아 이사를 가거나, 좋은 친구를 주변에 두는 것도 중요하다. 또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다. 일찍 죽으면 자신의 덕을 발휘할 기회를 잃을 뿐 아니라 그 자손들이 덕을 발전시키는 것을 도와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행복은 운과 타협하게 된다. 행복이 탁월한 인격의 덕을 발휘하는 것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외적인 조건과 운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덕의 행복 : 스토아의 행복관

행복과 행운의 타협을 거부하는 행복관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나타나게 된다. 이 행복관은 스토아 철학(Stoa, Stoicism)이라고 알려진 철학 학파에 의해 발전된다. 스토아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로마제국에까지 널리 발전된 학파로서 인간의 덕을 단순한 개인적 복이나 성공을 넘어서서 우주적 이성을 통해 추구하는 학파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행운과 타협하지 않는 덕의 강인함이다. 인간의 행복은 오로지 인간의 노력과 덕의 탁월함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외적인 조건에 의해 방해를 받거나 위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로마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기원후 121~180)나 로마 황제의 참모 역할을 수행한 세네카(Seneca, 기원전 4~기원후 65)에 의해 널리 알려졌지만 스토아학파의 초기 선구자였던 에픽테토스(Epictetus, 기원후 50~135)를 제외하고 스토아 철학을 논할 수 없다. 에픽테토스는 노예로 태어나 갖은 노력 끝에 당대 최고의 철학자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행복의 길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에픽테토스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덕의 탁월성과 내적인 평정을 잃지 않는 자세로 일생을 살아갔다. 에픽테토스가 전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지혜는 스스로가 통제할 수 있는 것(생각, 목표, 욕구, 혐오)과 통제할 수 없는 것(신체, 재산, 명상, 권력)을 구분하고 전자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분노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그것에 의미를 찾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외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행복은 오로지 한 인간의 내적인 탁월성과 덕성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 이외의 다른 것은 행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스토아의 행복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과 마찬가지로 스토아 철학의 행복관은 자기실현적 덕의 행복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과는 달리 스토아 철학의 행복관은 오로지 덕의 탁월성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덕과 지혜의 탁월성만이 행복에 중요하며 다른 외적인 변수는 행복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즉 행복은 행운이나 불운(즉 자신의 노력과 관련 없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복이나 불복)과는 관련이 없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고통스러운 고문을 받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강인한 행복관이다. 실제로 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의 한 획을 그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생의 거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내며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마음의 평정과 지혜를 잃지 않았다. 내적인 덕을 유지한다면 외적인 조건과는 상관없이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행복관이다. 스토아의 행복은 정신의 내적인 완성이며 이러한 완성이 주는 평화는 어떠한 불행이나 외적인 방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굳건한 것이다. 그래서 영어에서 스토익(stoic, 스토아적인)이라는 표현은 쾌락과 외적인 화려함과는 정반대 입장에서 내적인 강인함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다.
월남전에 참전했으나 포로가 되어 7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을 보낸 미 해군의 제임스 스톡데일(James Stockdale, 1923~2005) 해군 중장이 장기간의 구금 생활과 심한 고문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에픽테토스의 스토아 철학 때문이었다고 한다. 스톡데일의 다리가 철제 사슬에 묶이게 되었을 때 그는 에픽테토스의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생각하며 살아남을 용기를 내었다고 한다. ‘병드는 것은 육체의 장애이지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절름발이가 되는 것은 다리를 못 쓰게 만들지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이 점을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적용한다면 너에게 나타나는 장애란 단지 외적인 것일 뿐이고 이런 외적인 것은 너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병은 육체의 장애이나 마음의 결정을 막지 못한다. 절름발이는 다리의 장애이나 마음의 결정을 막지 못한다. 이 점을 한번 생각해본다면 장애라는 것은 단지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마음의 힘과 탁월성을 막지 못한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에픽테토스는 노예였을 때 고문을 당해 다리가 부러졌지만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외적인 고통과 혼란과 장애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내적인 평안을 추구하는 스토아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우주 전체의 깊은 본질을 꿰뚫는 인간 이성의 힘과 덕의 강인함을 달성하는 것이다. 참된 지혜와 덕의 탁월함은 그 어떤 외적인 방해도 다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정신이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 비천한 인간들이 성공 가도를 달리는 경우가 있다. 과연 스토아 철학자들의 믿음처럼 내적인 덕과 지혜만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착하고 덕이 있는 사람들이 시대와 환경을 잘못 타고나서 고통과 실패를 거듭하는 경우 이들의 삶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삶은 가끔 사람들에게 역경을 안겨주지만 덕을 완성한 인격은 이런 외적 상황과 관계없이 항상 행복할 수 있다는 스토아적 행복관의 역설에 대해서는 대략 두 가지 해결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승에서의 고난과 역경은 저승에서 다 보상될 것이라는 종교적인 내세관을 도입하든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부분적으로 외적인 상황을 받아들여 현실의 조건을 행복의 요소로 받아들이든지 하는 것이다. 물론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두 가지 해결책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덕과 지혜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외적인 그 어느 조건도 이 가치를 변화시키거나 방해하지 못한다. 행복은, 스토아 철학에서는, 인격의 탁월함과 지혜 이외의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 고유한 가치인 것이다. 타협하지 않는 영웅이나 뜻을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나 비극적 삶을 살다간 인물들은 모두 스토아적인 행복을 누린 이들이다. 그러나 이 행복의 역설(인생은 고난을 줄 수 있지만 인격은 행복할 수 있다는 역설적 상황)은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어두운 터널이다.

 

자기실현적 행복론과 불교의 행복론

좋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문화나 종교를 막론하고 인류의 지대한 관심사다. 고대 그리스에서 체계화되고 발전된 자기실현적 행복론은 가장 기본적 삶의 의미인 인간의 자기실현을 그 기본적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행복에 관한 보편적 주장으로 개진된 이 행복관은 불교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자기실현적 행복론은 행복을 단순한 만족과 기쁨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자기 성찰과 자기 능력의 개발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점에서 불교의 행복관과 연결된다. 먼저 자기실현론에서 행복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과 같이 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므로 한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노력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자기실현적 행복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덕의 함양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인생 전체를 교육과 발전의 장으로 생각한다. 이런 점들은 불교적 행복관과 많은 점을 공유한다. 특별히 이러한 자기 성찰과 덕의 함양을 위한 노력은 불교에서 수행(修行)이라는 개념과도 통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과정은 꾸준한 수행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 수행에는 명상과 같은 자기 성찰적 정신의 함양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내성적 관찰과 집중의 함양은 불교가 단순한 동양의 종교임을 떠나서 전 세계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불교 신자 중 약 30% 정도는 유태교를 믿으면서 불교적 수행을 실천하는 주부(Jubu)라고 한다. 주부(Jubu)는 유태교(Judaism)와 불교(Buddhism)를 혹은 유태교 신자(Jewish)와 불교 신자(Buddhist)를 합성한 말이다. 일신교인 유태교와 초월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가 이런 연결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불교적 수행이 가지는 포괄적 자기 성찰의 힘 때문이 아닌가 한다. 같은 이유로 가톨릭 신자 중에도 불교적 수행을 하는 이들이 많고 이들은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불교적 수행을 자신의 내적 성찰과 집중의 방법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자기실현적 행복관과 불교적 행복관은 행복을 총괄적이며 내성적인 성찰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나 불교적 행복관은 자기실현적 행복관과 매우 다른 점이 있다. 불교에서는 자아의 궁극적 실체가 부정되지만 자기실현적 행복론에서는 자아의 존재와 그 정체성의 심화 확대가 행복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 된다. 전자가 자기부정론이라면 후자는 자기실현론인 것이다. 물론 전자의 자기부정론은 자기의 근본적 실재와 이기적 자기 집착을 부정하는 것이지 자아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실현적 행복론에서 자기는 그 분명한 실재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행복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자기실현적 행복론을 자기중심주의나 이기주의(利己主義, Egoism) 성향이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기실현주의가 자기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무시한다거나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보람 있게 발휘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노력과 도움과 가르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실현적 행복이 자신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능력 발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면 불교에서는 과도한 자신에 대한 관심이나 집착은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을 성공적으로 발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자기실현적 행복관은 깨달음을 통한 불교적 행복관의 기본적 취지와 양립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쾌락주의의 행복관 – 즐기는 행복

자기실현적 행복 혹은 덕의 행복은 자기실현을 성취할 수 있는 성공적인 인생 혹은 번성의 인생을 (번영하고 성공하는 인생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런 행복관은 자기 능력 밖에 존재하는 외적 조건들에 취약한 경우가 많다. 자기실현을 통한 번성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부분적으로 외적인 조건에 의존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외적인 조건과 관계없이 내적인 덕만 갖추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행복을 자기실현의 성취나 성공의 시각에서 보게 되면 내적인 덕을 완성하지 못한 인생이나 덕은 있으나 여러 가지 외적 요인에 의해서 성공하지 못한 인생은 행복하지 않은 인생으로 간주된다.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켜 성공적으로 완성하는 것이 행복이 되다 보니 성공하지 못한 인생은 행복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실현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한 인생은 행복할 수 없는 인생인가?
이러한 자기실현의 행복관과 비교해서 보다 직접적이고 단순한 행복관을 생각해보는 것이 가능할까? 쾌락주의는 바로 그러한 행복관을 제공한다. 쾌락주의에 따르면 행복은 자기실현의 성취와 번성의 인생이 아니라 즐거움과 만족의 인생이다. 즐거움과 만족은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고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나타날 수 있다. 꼭 객관적인 성공이나 목표의 달성과 연결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점에서는 쾌락주의적 접근법은 자기실현적 행복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행복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쾌락주의적 행복관은 마음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덕의 완성이나 성공의 행복을 주장하는 자기실현적 행복보다 더 직접적이며 근본적인 행복의 방법을 보여준다.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차가운 불 – 에피쿠로스의 금욕적 쾌락주의

쾌락주의적 행복관을 체계적으로 개진한 철학자는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년~기원전 271년)이다. 에피쿠로스는 우주의 광대한 원리나 인간 본성의 깊은 기원을 논하는 철학자들과는 달리 매우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행복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한 철학자이다. 그는 이상적이며 추상적 세계론을 펼친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와는 달리 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 실재의 근본적 성격은 물질적 대상과 속성이라는 생각) 입장에서 원자론(atomism, 原子論, 원자라는 기본적인 물질적 입자와 이들의 운동을 통해 세계의 현상과 그 변화를 설명하는 철학)을 개진했으며 인생의 문제와 윤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쾌락을 중시하는 입장을 발전시켰다. 그의 철학은 마치 주어진 현상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 요소를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 즉 현상세계는 원자를 통해 인생살이는 쾌락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쾌락이 행복의 본질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먼저 인간적 삶의 목표는 고통의 감소와 쾌락의 증진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쾌락이 유일한 선이고 고통이 유일한 악이라는 그의 독특한 가치론 때문이다. 인생에는 이상적인 가치들이 있지만 인생을 가장 구체적이며 기본적인 시각으로 볼 때 쾌락은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가치이다. 인생을 움직이는 것은 정의나 덕과 같은 커다란 가치가 아니라 작은 미소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줄 수 있는 기쁨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런 기쁨은 교육 수준이나 생활환경과 관계없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쾌락이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행복이 되는 것은 에피쿠로스의 시각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쾌락이라고 하면 보통 짜릿하게 터지는 감각적이며 육체적인 쾌락을 생각하기 쉽지만 놀랍게도 에피쿠로스의 쾌락론은 이것과는 정반대로 매우 정신적이고 깊이 있는 쾌락을 추구하는 철학을 전개한다.
먼저 그는 덕만이 행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 스토아학파에 반대한다. 행복은 덕의 문제나 자기 성취와 같은 목표 달성이나 성공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 상태의 문제이다. 또한 그는 육체적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쾌락 역시 비판한다. 순간적이며 육체적인 쾌락을 주장하는 키레네학파(Cyrenaics,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아리스티포스[Aristippus]의 고향인 북부 아프리카의 그리스 식민지인 키레네[Cyrene]에서 시작된 고대 그리스 철학의 일파)와는 다르게 정신적 쾌락을 추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정제된 정신적 쾌락은 결국 금욕주의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만다. 많은 분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관능주의(Sensualism, 감각적 육체적 쾌락의 추구)나 방종주의(자유의 무제한적 확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그에 따르면 참된 쾌락은 절제되고 정제된 즐거움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쾌락론은 매우 이상한 쾌락주의, 즉 금욕적 쾌락주의이다. 차가운 불이다.
그렇다면 왜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절제된 쾌락주의를 주장한 걸까? 먼저 그는 쾌락이 주는 만족감의 지속적 유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많은 쾌락주의가 방종에 빠지는 이유는 쾌락의 충족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만족감의 지속과 유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탓이다. 인생은 길다. 하루의 기쁨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삶은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쾌락의 지속과 유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쾌락의 심리를 잘 살펴보면 쾌락의 지속과 유지의 길이 보인다. 그 길은 쾌락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욕구의 본성을 잘 살펴보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이 길을 찾아낸 것이다.
쾌락을 가장 효율적으로 일으키고, 지속하고, 유지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는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는 방법이다. 욕구가 효과적으로 만족되면 쾌락을 느낄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욕구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욕구가 최소화되면 손쉽게 만족할 수 있다. 쾌락이 만족과 욕구의 대략적 함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한다.

쾌락 = 만족/욕구

이 등식에서 보이듯이 쾌락의 최대화는 만족의 극대화와 비례하고 욕구의 극대화와는 반비례한다. 즉 만족의 극대화냐 욕구의 최소화냐 하는 것이 쾌락을 최대화하는 관건이 된다. 그런데 전자는 방종적 쾌락주의로, 후자는 금욕적 쾌락주의로 간다. 에피쿠로스는 후자를 선택한다. 욕구의 최대한 만족이라는 것은 제한된 자원과 무제한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욕구의 특성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실행 가능한 쾌락의 증진 방안은 후자에 있다. 즉 쾌락의 증진은 맹목적으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잘 관리하고 되도록이면 최소화하는 데 있다. 욕구가 최소화되면 만족을 얻기가 매우 쉬워진다. 그리고 나면 쾌락은 쉽게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밥 한 공기 김치 하나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진수성찬으로만 만족하는 미식가에 비해 음식에 대한 만족을 쉽게 달성할 수 있다. 욕구의 수준을 낮추면 만족은 더욱 쉬워진다. 즉 낮은 자세로 인생을 사는 것이 만족을 크게 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행복은 주지육림(酒池肉林, 무제한 제공되는 술과 고기의 향연)과 같은 것이 아니라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하지만 평안을 느끼며 도를 따르는 즐거움)에 가까운 행복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최고의 쾌락은 무제한적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아타락시아(ataraxia, 평정심), 즉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만족의 상태가 된다.
__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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