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이성동 박사의 화요 열린 강좌 마인드풀니스란 무엇인가?

마인드풀니스란 무엇인가?
“나를 관찰하고
바로 보면
삶이 바뀐다”

 

 

저는 오늘 조셉 골드스타인이 쓴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는 말 자체가 영어권에서도 그리 익숙한 단어는 아닙니다. 불교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조어에 가깝습니다. 원래는 여러 뜻이 있습니다. ‘집중’, ‘유심히 생각함’ 등이죠. 지금은 불교적 의미로 전혀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사띠(Sati)를 마인드풀니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양 학자들은 보통 사마띠(삼매, samadhi) 자체도 마인드풀니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인드풀니스의 기본은 경전 속에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수행의 결과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현재 마인드풀니스를 구글(google)에 입력하면 무려 7,840만 건 정도의 검색어가 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마인드풀니스에 대한 논문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걸 그래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신비학적인, 정신의학적인 부분뿐 아니라 각 분야에 퍼져서 연구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특히 미국 IT 계통에 계신 분들, 가장 대표적으로 스티브 잡스가 있겠죠. 이런 분들이 명상을 하고 있어요. 구글의 경우 팀을 만들어 따로 마인드풀니스를 베이스로 한 세러피 등을 진행하고 있고요.
사실 마인드풀니스를 서구에 많이 알린 데는 달라이 라마의 기여가 큽니다. 과학자들과 연구하면서 마인드풀니스가 우리 뇌에 어떻게 좋은지 등을 알려줬죠. 그가 많은 작업을 했고, 붐을 일으켰고, 덕분에 관련 논문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에요. 예를 들면 병원에서도 마인드풀니스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합니다. 미국에는 식이장애 환자가 많은데, 그런 환자들에게도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또 팀 라이언이라는 미국 국회의원은 마인드풀니스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거죠. 영국의 경우도 어마어마한 보고서를 마련했습니다. 여기서 사띠는 ‘염(念)’으로 번역합니다.
사띠가 마인드풀니스로만 번역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인드풀니스로 정착된 상태입니다. 사띠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메모리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메모리와는 양상이 다릅니다. 사띠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겠지만 초기에는 서구 학자들이 번역하면서 상당히 혼란을 느낀 부분도 있습니다. 지금은 마인드풀니스로 정착돼 있어요.
원래 마인드풀니스는 서구에서 흔한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14세기 당시 ‘사려가 깊다’든지 ‘의식이 깨어 있다’든지 등의 종교적 의미로 신을 기억한다는 뜻으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친절과 배려 등의 뜻이었지만 사어나 다름없는 형태였던 거죠. 이것을 새롭게 살려낸 것입니다.

그럼 『염처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염이라는 뜻은 원래 사띠에 위빠사나를 더한 것입니다. 지금은 일부의 견해를 대표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띠라는 부분은 늘 주위에 있으면서 확립해나가는 자체, 그것을 사띠 빠타나(Sati patthana)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띠의 경우 팔정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팔정도에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과 정정의 법에 대한 분석적 탐구가 나오는데 정정진과 맨 끝의 정정의 법 사이에 있는 부분을 사띠라고도 하죠. 『염처경』에서 말하는 사띠가 다르지 않지만 훨씬 포괄적 의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양 불교에서도 사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요. 하지만 마인드풀니스라는 개념을 실제적으로 활용하는 부분으로 그 방향이 바뀌고 있죠.
사띠의 기본은 기억입니다. 그 외에도 ‘주의’, ‘떠올려 생각하는 것’, ‘집중해 바라보는 것’이 있는데, 그렇다면 ‘주의’와 사띠가 같으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게 보진 않습니다. 사띠를 더 잘 알기 위해서는 다른 개념과 비교해보면 됩니다. 사마띠와 어떻게 다른지 등의 방법으로요. 염에 대한 기본적인 콘셉트를 갖지 않으면 『염처경』을 읽기 힘들어요. 그동안 사띠 논쟁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해졌습니다. 국내에서 번역의 문제로 촉발됐다가 사띠와 깨달음의 문제로 논쟁이 확대됐습니다. 서양에서는 사띠를 마인드풀니스라고 번역했고, 우리도 현재 마음챙김이라고 쓰지만 그 번역을 옮기는 게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해 사띠의 개념이 수동적인가 능동적인가, 그 개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염처경』의 실제 수행에 들어갈 때 어느 정도 비중이 생깁니다. 사띠가 왜 이렇게 복잡한 논쟁을 일으키는가 생각하면 어떤 것을 명확하게 봐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수행에 들어가야 하는지 비교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띠의 개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염처경』은 다르게 보입니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과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과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과 법에 대한 마음챙김을 해야 합니다. 몸의 경우 해부학적 부분이 있으며, 느낌의 경우 정서적 특징과 윤리적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은 일상적 마음과 더 높은 상태의 마음, 초월적 마음, 현 위치에서 떠나 있는 마음이 있어요. 감각기관은 육체를 이야기합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게 염입니다.
부처님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정형구는 『염처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정형구는 자신의 체험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관찰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상당히 논쟁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내적, 외적, 내외적이라는 것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통일된 의견은 내적인 것은 내가 직접 수행해 직접 알 수 있는 수행 방식, 외적으로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수행하는 모습을 보며 수행한다는 뜻, 내외적이라는 것은 앞의 두 가지보다 더 객관적인 수행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띠를 수동적 과정으로 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패하는 사체를 본다든지 할 때, 사띠적 관점에서는 크게 개념이나 관념, 사전 지식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필요한 정도라는 건 거기까지만 간다는 것입니다. 다른 망상으로 붙이는 정도로 가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필요한 정도’라고 이야기하죠. 물론 학자들에 따라 논란이 있지만 원전이 그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책에서는 지속적인 마음챙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도 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음챙김을 하면서 온전한 앎을 이뤄야 한다든지, 세상의 욕망을 버린다든지 하는 것을 전체적인 의미에서의 마음챙김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삶과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논의들이 생기게 됩니다. 상은 개념인데, 그런 개념적 부분이 과연 사띠로서 정립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런 부분에 지각이 있다 해도 긍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지점까지는 가져가야 합니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마음챙김을 할 수 있어요.

그럼 본격적으로, 몸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호흡이 있습니다. 들숨과 날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죠. 경전 자체는 몸에 대한 마음 챙김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전 자체를 다시 보면, 숨을 길게 들이마시면 그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부분을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과 비교합니다. 16단계에 대한 설명이 잘되어 있는데 차이는 나중에 단계가 올라갈수록 깨달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맨 처음 호흡, 자세, 활동, 해부학적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들은 호흡을 처음부터 하는 게 쉽지 않을까, 앉는 자세부터 시작해서 어떤 활동을 하고 그다음 단계로서 호흡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분도 있어요.
해부학적 부분의 경우 제가 많이 놀랐습니다. 피부, 살, 뼈, 근육, 골수, 늑막, 비장, 폐, 담즙, 피, 땀, 지방 등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거든요. 해부학적 지식을 이렇게 알 필요도 없는데 하나하나 나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에 놀란 거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디테일하게 들어가 명상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염처경』 수행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수행을 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기분 좋고, 정신이 맑아지는 경험을 위해서인데 배설물이나 가래, 고름 등 이런 부분들은 우리가 영적 수행을 할 때 기분이 안 좋아지게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거부감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서양 사람들의 책에 논의돼 있습니다.
『염처경』에는 불교에서 다루는 핵심 주제가 다 있습니다. 주마가편으로 이야기하자면, 칠각으로 넘어가고 사성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교의 핵심 이론들입니다. 그냥 고른 게 아니라 사띠, 즉 마인드풀니스라는 개념 속에서 들여다봐야 합니다. 마치 솜씨 좋은 도축자가 우리의 몸을 도축된 소로 생각하고 우리 몸을 보는 것처럼, 그것이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체를 보는 것도 자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관찰할 때는 시체가 부패되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이것도 논란이 되는 부분입니다. 고름이 흘러나오고, 해골이 되고 핏줄이 변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쓰고 있는 거죠. 현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고속도로에서 부딪힌 토끼 등 동물의 시체가 어떻게 돼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사띠하는 심정으로 이것들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보통 시체가 부패하는 과정을 볼 수 없잖아요. 상상 속에서 보는 건데, 이는 마치 고속도로에 버려진 동물의 시체를 보는 것과 비슷한 비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어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을 살펴보겠습니다.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등이 있습니다. 세간적인 것, 출세간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느낌은 이차적 개념이 섞이지 않은, 그야말로 느낌 그 자체를 보라는 것입니다. 개념상의 망상 때문에 갖는 괴로움이 크다고 본 것입니다.
다음은 세간적인 느낌과 출세간적인 느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간적인 느낌은 감각의 접촉에서 일어납니다. 보고 듣고 냄새나고 맛을 느끼는 그런 대상과 생각에 의존한 것입니다. 출세간적인 느낌은 아주 다른 그 무엇인데 이것은 금욕과 연관된 느낌입니다. 금욕과 관련된 게 무엇일까요. 계율에 대한 것입니다. 계율에 대한 철저한 지킴, 금욕을 강조하고 있죠.
이제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입니다. 경전에서는 이를 탐욕이 있는 것은 있는 것이라고 꿰뚫어 알고 탐욕이 없는 것은 없는 대로 꿰뚫어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이야기하는 것은 통합적 느낌입니다. 어떻게 보면 서양적 느낌에서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아요.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이런 부분의 해설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습니다. 이 마음 가운데에도 초월할 수 있는, 없는 마음도 우리가 사띠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장애에 대한 부분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혐오, 나태와 무기력, 들뜸과 회환, 의심이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감각적인 욕망이 마음에 있으면 색깔 있는 염료를 풀어놓은 연못 같고, 혐오가 있으면 연못이 끓는 것 같고, 불안과 걱정은 흔들리는 것 같으며, 의심은 진흙탕 같다’고 하죠. 이것을 벗어나는 것은 골드스타인에 따르면 인식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없을 때 없음을 알고, 욕망 있음과 없음을 조건 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죠.
칠각지(七覺支)에 대한 부분은 마음챙김 맨 처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요해요. 사띠의 마음으로 우리가 다른 법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정신을 통해 나오는 기쁨. 그것을 통해 고요함으로 들어가고, 그다음 집중으로 들어가서 그다음 사마띠로 가는 게 칠각지입니다. 그만큼 사띠가 모든 수행의 기반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팔정도(八正道)에 가장 중요한 건 정견과 정사유이고, 두 번째는 득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유익한 것과 아닌 것을 설명하고, 마음과 모든 과정을 탐색합니다. 부처님은 늘 중도를 말했습니다. 지나친 도행도 안 되고 감각적 쾌락에 젖어서도 안 된다고 했죠. 하지만 깨달음은 고행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깨달음 속에서 오는 즐거움도 칠각지에서 중요한 부분이에요. 이 책에서는 순간적인 환희 등 환희도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수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가 아까 말한 마음의 편안함입니다. 고요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죠.
평정을 자세히 이야기하면 마음의 균형입니다, 무량심(無量心)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바로 지혜의 측면입니다. 사성제에서 고통이라고 할 때 ‘고’를 느끼는 부분도 서양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느끼는지 자세히 설명돼 있습니다. ‘고’를 제대로 이해하면 고집멸도까지는 그냥 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존적 이해가 쉽지는 않죠.
고집멸도 마지막에 나오는 팔정도를 이야기하겠습니다. 팔정도는 올바른 깨침으로 인도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입니다. 이 팔정도는 중도의 완전한 수행법입니다. 이 과정 역시, 팔정도가 왜 이렇게 서술돼 있는지가 중요한 의미입니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정사유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수행 과정에서 강조하는 건 뒤에서 세 번째로 나오는 정정진(正精進)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경전 자체를 이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2,500년 전에 쓰인 경전을 우리가 어떻게 만날 것인가의 문제는 개개인의 수행과 삶의 부분에서 직접적 접합이 돼야 합니다. 삶과 수행 사이의 거리는 늘 생기게 마련입니다. 『염처경』의 경우 사띠를 기본 바탕으로 해서 일부분의 수행 단계를 밟아가는 게 현명하다고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몸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이처럼 몸을 먼저 강조한 종교는 많지 않아요. 우리가 일어날 수 있는, 호흡부터 시작해서 마음과 법으로 가는, 이러한 개념이 부처님이 강조하는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게 아나빠나 사띠예요. 그런 부분들을 한 번 더 염두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 수시로 몰려드는 잡다한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반대로,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 ‘멍 때린다’고도 하는데, 이 시간이 명상하는 시간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첫 번째 질문의 경우, 잡다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걸 그대로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다리가 아프면 아픈 대로 보고, 추잡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와서 보고, 보면 해결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을 기르는 게 영적 수행입니다. 두 번째 질문의 경우, 멍 때리는 것과 명상은 완전히 달라요. 멍 때리는 건 멍청한 것이죠. 하지만 명상이라는 건 집중입니다. 우리가 사띠를 한다고 할 때, 무의식중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객관화해서 토막토막내서 나누는 걸 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을 보는 것. 그런 걸 보면서 개념을 생각하지 않는 건 아주 어려워요. 하지만 훈련하는 거죠.

◦ 사사육초 호흡이 좋다는 말을 듣고 가끔 명상시 이런 호흡을 적용해보고 있습니다. 4초 들이마시고 다시 4초 마시고, 6초 동안 내쉬는 호흡은 어떤지요? 더 좋은 호흡법이 있나요?
어떤 호흡법이든 좋고 나쁨은 없어요. 긴 호흡은 긴 대로 알고 짧은 호흡은 짧은 대로 가는 것입니다. 미얀마에서 많은 스승들이 나름대로의 독특한 호흡법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집중하는 산만함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방법론적 차이예요. 있는 그대로, 호흡, 자세, 활동을 그대로 보는 것에서 출발하면 됩니다. 우리 몸에서 접근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몸부터 시작하라고 하는 거예요.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취재·글|황정은(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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