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생명과학 | 불교의 진화2__유선경·홍창성

불교의 진화2

 

 

남전불교와 북전불교

연기(緣起)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무아(無我)를 강조하는 남전불교(南傳佛敎)에서 는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설한다. 아트만 또는 참나(我)는 본질을 가진 실체로서 존 재하지 않지만, 다르마(dharma, 法)는 실재(real entity, 實在)로서 존재한다는 주장이 다. 다르마란 현대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트롭(trope)과 같은 것인데, 속성이 개별 자로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검은 구두가 한 켤레 있다면 각각의 짝에 검정이라는 속성 개별자가 따로 존재하는데, 남전 테라와다 학파에서는 각 각의 짝에 별개의 검정 다르마가 존재한다고 본다. 그리고 구두는 검정 다르마, 무게 다르마, 모양 다르마, 딱딱함 다르마, 건조함 다르마 등이 모여서 만들어진 집합체이다. 이 세상 다른 모든 사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은 다르마들 만으로 이 우주전체가 어떻게 구성 되어 있는가를 설명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북방 대승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주장해왔다. 아 트만 또는 참나뿐 아니라 다르마(法)도 자성(自性)이 없이 공(空)하다는 것이다. 남 전불교에서 다르마가 자성(自性)을 가지고 실재(實在)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반대해 북전불교는 다르마의 공(空)함도 받아들인다. 이 둘 가운데 어느 전통이 붓다의 가르침에 더 가까운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많은 논쟁이 가능하겠고 또 어떤 논의도 간단히 마무리 지을 수는 없겠지만, 필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인 이유 로 대승이 견지하는 법공(法空)이 옳다고 보며 대승이 붓다의 가르침에 보다 가깝 게 진화한 형태의 불교라고 생각한다.

다르마는 (1) 연기에 의해 생멸(生滅)하거나 또는 (2) 연기에 의하지 않고 생멸한 다. 이 둘 이외의 선택지는 없다. 그래서 (1) 만약 다르마 또한 연기(緣起)에 의해, 즉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변화할 수밖에 없다면 스스로의 자성을 가지고 존재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존재론적으로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는데 스스로의 본질 (자성)을 따로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존재하는 시간이 아무리 짧은 찰나 동안이라도예외가될수는없다.한편(2) 만약다르마가연기에의해생멸하지않 는다면 그것들은 스스로로부터 기원했을 것이다(자기 기원, self-origination). 그런데 지난 호에서 필자들이 아트만의 자기 기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전 개한 논증과 동일한 논리로 다르마의 자기 기원 또한 불가능함을 보일 수 있다. 다르마는 자기 기원 당시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2a) 다르마가 자기 기원 당시 존재했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기원할 수는 없으므로 다르마의 자기 기원은 불가능하다. (2b) 다르마가 자기 기원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무(無, nothing)로부터는 나올 수 없으므로, 다르마의 자기 기원은 불가능하다. 따 라서 (2a)와 (2b)에 의해서 다르마의 자기 기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1)과 (2)로부터 우리는 다르마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연기에 의해 생멸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것은 자성을 가지지 못한 채 공(空)하다고 결론지어 야 한다.

연기와 공

‘연기(緣起)가 곧 공(空)’이라는 용수(Nagarjuna)의 유명한 주장에 대해서도 수많은 해 석이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필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간단히 설명해보겠다.

모든 사물(事物)이 조건에 의해서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緣起)인데, 그 렇다면 이 세상 어느 것도 스스로 본성(자성, 自性)을 가질 수 없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해보겠다. 자동차는 수많은 부품들이 모여서 이루어졌다. 부품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 자동차 자체로부터 솟아난 것은 없고, 멀고 가까운 곳에 서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공정을 거쳐 만들어낸 여러 부품들이 모여 자동차라고 불리는 물건이 완성된다. 자동차가 원래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하 나도없다.그리고어떤부품도새부품으로교체될수있다.이자동차에대해서 고정불변한 것은 도무지 하나도 없다.

한편 혹자는 여러 부품이 모여서 수행하는 자동차의 이러저러한 기능(function) 은 자동차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속성, 즉 본성 또는 자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 느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동차가 수행하는 어떠한 기능도 자동차를 이

루는 부품들이 수행하는 기능으로 환원될 수 있고, 따라서 부품들이 자동차 자체 로부터 솟아난 것이 아니듯이 전체로서의 자동차의 기능도 스스로로부터 솟아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부터 가져온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자동차가 가진 어떤 기능도 그 자동차에 원래부터 고유하게 존재하는 고정불변한 본질, 즉 자성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구성 요소의 측면이나 행하는 기능 측면 어디에도 자동차의 고유하고 고정불변한 본질(자성) 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자동차는 자성(自性)이 없다–즉 자 동차는 공(空)하다. 그리고 이 논지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적용된다. 한편 위에 서 살펴보았듯이,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존재한다고 하는 남전불교에서 말 하는 다르마조차도, 그것이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한, 자성을 가지지 못한다. 다르마(法)도 공(空)하다.

윤회가 열반이다

‘윤회가 열반’이라는 용수의 통찰에 대해서도 많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도 필자들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논의를 대신하려 한다. 윤회가 열반 이라는 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반복되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교차하는 이 중 생계도 일단 연기와 공(空)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실은 그것이 곧 열반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열반이란 모든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하는 데, 이 윤회하는 삶의 세계를 공(空)의 관점에서 철저히 꿰뚫어본다면 모든 집착 과 그 집착이 초래하는 번뇌의 불길을 끌 수 있다. 모든 것이 공(空)해서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한 삶의 세계가 어리석음과 집착으로 접근하면 번뇌의 불길로 윤회하는 세계가 되지만 공(空)의 관점으로 파악하면 즉시 열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는 진실로 열반이다.

필자들은 연기(緣起)의 진리를 공(空)으로 표현한 대승의 접근법이 이론적으로 세련미를 더한 가르침의 형태라고 보는데, 이 공(空) 사상은 ‘윤회가 열반’이라는 멋진 명제에 이르러 그 진가를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대승의 반야 계통 공(空) 사 상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상좌부 계통의 아비달마론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혹자는 상좌부에서 지나치게 현학적인 논의를 오래 지속하다 보니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이 원래 대중의 교화와 구제에 있었다는 점을 망각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공(空) 사상을 통해 도달한 ‘윤회가 열반’이라 는 명제는 깨달음과 열반을 추구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생로병사가 거듭되고 희 로애락이 엇갈리는 윤회의 세계와 전혀 유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 래서대승불교는출가승단위주로진행되어중생의삶과거리가생겼던것같은 당시출세간의현학적불교를원래중생구제를위해설해진석가모니부처의가 르침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윤회가 열반’이니까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윤회하는 중생의 세계를 탈출할 이 유가 없다. 이와 같은 대승의 새로운 시도는 당시 불교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 들을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 가운데 하나였겠지만, 결국 이 운동이 성공해서 동아 시아 불교는 대승의 주도 아래 진화하게 되었다. 불교가 또 한 번 진화하는 모습 을목격할수있는장면이다.

선(禪)

중국에서 선불교가 일어나 기존의 교학 중심의 불교를 대체하게 된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필자들은 불교사에 있어서의 변천을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서양 불교 학자들의 견해를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그 논의를 대신해보 겠다. 주지하듯이, 거대한 운석이 지구에 충돌해 생긴 먼지 때문에 생긴 기후의 급격한 변화로 이에 적응하지 못한 덩치가 큰 공룡들은 살아남지 못하고 멸종되 었다. 그런데 다른 작은 생명체들이 오히려 더 잘 적응하며 생존하고 진화해서 결국 지구상 생명체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 불교에도 이와 견줄 만한 역사적 상황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정착할 때까지 근 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는데, 이 동안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던 역경 사업을 거치면서 불교는 대도시를 중심으 로 왕실과 귀족들의 재정적 지원 아래 발전하고 진화했다. 그리고 중국 불교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교학 중심의 불교로 발달했다.

그 이후에도 왕실과 귀족의 뒷받침으로 삼론종, 천태종, 화엄종 등의 여러 불교 학파가 성립되고 발전했다. 여전히 교학 중심의 불교였다. 그런데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 왕조가 무너지고 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도시가 파괴되면서 대도시에서 이들의 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지속되어오던 교학 중심의 불교는 이제 그 명맥 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워지고 말았다. 생존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런데도시가아닌농촌지역과산골에서는교육을제대로받지못한농민등 을 대상으로 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불교, 즉 선불교가 발전하고 있었다. 이런 지역에 있는 사찰들은 왕실이나 귀족의 지원에 의존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민 족의침입으로교학중심의불교가쇠퇴하고있을때도별다른영향을받지않았 다. 오히려 교학 중심 불교가 사라짐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었다. 한편 송나라 이후부터 정치 세력의 지원을 받은 세련된 성리학의 사상적 압박에 대응하는데 있어서도 교학 중심의

불교보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며 참선 위주의 수행을 강조하는 선불교 가 생존하기에 더 적합한 형태의 불교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보면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선불교로 진화해온 역사적 사실이 잘 받아들여 진다.

그 옛날 동아시아에서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하던 민초들은 교육받을 기회가 적었고 또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이 그나마 접 근할 수 있었던 불교가 선불교였다. 그리고 역사상 수많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적격변이거듭되다보면오랜시간이지난다음에는결국민초들이가장친화감 을 느낄 선(禪)의 문화가 가장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더 많이 꽃피웠을 것 이라는 점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나라에서 선불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민이 교육을 받고 또 과거에 비하면 경제적으로 그리 궁핍 하지도 않은 현대 사회에서도 동서양을 불문하고 다른 불교보다는 선불교가 더 관심을 많이 끌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바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에게 특별한 교리 공부가 필요 없이 쉽게 접 근할 수 있는 참선과 명상 위주의 선불교가 더 경쟁력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래 서 선(禪)은 지금도 계속 생존, 지속, 변이하면서 동서양을 불문하고 여러 다양한 사회에 적응하며 진화하고 있다.

현대의 불교

현대인이 분주한 삶을 산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교육이나 경제적 측면에서 과거 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불교 공부 수행하기에 좋은 여건 속에 살 고 있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 사회에서 21세 기부터는 IT 문화까지 꽃피우게 되면서 그동안 어렵다고 여겨져온 불교 공부를 덜어렵게할수있는많은기회가마련되기시작했다.

먼저 전 국민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어 문맹률이 1~2%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 제는 글을 못 읽어서 경전을 읽지 못하는 일은 없다. 그래서 경전을 읽지 못하던

민초들에게 더 매력적이었을 선문(禪門)이 이제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민초들 을 상대로 그 가르침을 펴야 하는 환경이 되었다. 옛 한문으로 쓰여 있어 스님들 과 일부 지식인들에게만 접근이 가능하던 어록(語錄)과 경전도 많이 번역되어 날 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하나 만있어도인터넷을통해언제어디서나경전과중요문헌그리고관련에세이들 을 읽을 수 있고 또 좋은 법문과 강의 동영상도 얼마든지 있다. 역사상 이처럼 불 교 공부하기 좋은 환경은 없었을 것이다.

전 세계가 점점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가다 보니 전통적으로 대승과 선불교에 만 집중하던 한국 불교계에도 전 세계의 모든 불교가 다시금 소개되어 들어오고 있다. 일본 및 대만 불교와의 활발한 교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새로이 시 작된 초기 불교 열풍으로 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왔고 근래에는 티베트 불교도 많 이 소개되고 있다. 지난 1~2세기 동안 진행되어온 서구 불교학까지도 역수입되 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 불교계는 과거와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환경에 노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한국 불교는 많은 변이를 거쳐 새로운 진화의 단계로 들어 가야할상황에처해있다.

삼라만상이 진화하듯이, 우리 한국 불교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과의 상호 작용에 의해 함께 변화하고 진화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우 리가가져왔던것그리고지금현재우리가가지고있는불교가최적이라거나최 선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좋겠다. 원래부터 고정불변하고 영원히 최적 또는 최선의 공부와 수행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변화하는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생멸하는 중생계에서 영원불변하는 단 하나의 최적 최선의 가르침이 어떻게 가 능하겠는가. 만약 어떤 종파가 자신들만이 가졌다는 완전하고 고정불변하다는 ‘최적 최선’의 가르침과 방법론을 고수한다면, 그 종파는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 지 못하게 되어 결국 소멸될 것이다. 그래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적합한 형태 의 불교도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연기하면서 함께 쉼 없이 변 해나가야 한다. 불교도 언제나 진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어 소멸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런데 현재 서구 사회에서 유행하는 불교의 형태에서 우려되는 점이 있는데, 이 점이 한국 사회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불교는 개인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명상 위주의 수행법 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많다. 서구에서 불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교육을 많이 받고 교양이 풍부하며 전문 지식을 갖추고 경제적으로 그래 도 좀 여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 사회의 오래된 종 교나문화로부터벗어나고싶어하며무언가새로운것을추구할때동양에서온 불교와 명상 센터를 찾곤 한다. 그런데 이들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잘 지 내고 또 나아가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불교에 다가가고 공부와 수행을 하기보다 는 개인의 안심입명을 목표로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부유하고 소시 민적인 사람들의 불교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어서, 오웬 플러네이 건(Owen Flanagan) 같은 철학자는 서구 불교를 ‘부르조아 불교’라고 부른다.

필자들은대승의전통이힘차게살아숨쉬는한국불교가한갓부르조아불교 로 전락할 위험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불국토를 꿈꾸는 한국의 불자들은 지금도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간혹 정치적인 사건에도 깊숙이 관 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도 요즈음 유행하는 것처럼 명상과 개인의 마음공부만을 위주로 불교 공부와 수행을 진행시켜가다가는 나중에 결국 마치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여지게 될지도 모 른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 불교도 서구 불교 철학자들이 조롱하듯 부르는 부르조 아불교와 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지나치게 명상 위주의 개인주의적 불교는 이기주의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 는 것 같다. 자신만 마음 편히 잘 살겠다는 것이니까. 그런데 종(種, species)의 진 화 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어떤 종에 속한 각각의 생명체 들이 이기주의를 넘어 이타적(利他的) 행위를 많이 할 때 그 종이 생존하고 진화해 가는 데 훨씬 유리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려운 이웃을 돕고 나아가 더 큰 규모의 사회에 정열적으로 공헌하라는 가르침에 인색한 개인주의적(이기주의적?) 명상 위주의 종교가 종교로서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 자기 혼자서 마음 편히 잘 살라는 가르침은 종교로서 받아들여주기조차 어색한 마당이니, 만약 불 교를 단지 명상에 대한 가르침의 체계로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가 종교이기를 포기하는 셈이 된다. 이는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誓願)을 간직하고 있는 대승의 전통을 지닌 한국 불교가

절대로 걸어서는 안 될 길이다.
우리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그리고 사회와 사회가 날이 갈수록 더욱 밀

접히 연결되고 함께 어울려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상호작용하 면서 연기(緣起)한다는 점을 매일매일 어디서나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만약 명상 수행법이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속으로만 침잠하라는 가 르침이라면 이것은 부처님의 연기의 가르침과 또 현대 사회의 특성과도 많이 동 떨어져 있다. 지장보살의 서원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다시 연기(緣起)로

결국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요체인 연기(緣起)의 진리로 돌아오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의 가르침이고, 연기에 어긋나는 것은 아무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서 끊임없이 생멸하니 아무것도 어느 한순간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변하지않고남아있어집착할것이아무것도없다.

모든 것이 연기(緣起)해 무상(無常)할 수밖에 없는데, 불교에서 오랫동안 받아들 여온 공부와 수행법이라고 해서 어떻게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에 전혀 상관없 이 모두 잘 적용될 수 있겠는가. 초기 불교, 대승불교, 묵조선과 간화선–이들 모 두는 시절인연에 따라 불교사에 등장했고 또 그렇게 시절인연에 따라 변화하며 때론 물러나고 때론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하나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붙잡을 이유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시절인연에 따라 변이하고 진화해가도록 놔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가르침이 소멸되 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필자들은 이제 우리도 불교가 연기에 의해 진화한 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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