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생명과학|진화를 다시 생각하다 2__유선경·홍창성

진화를 다시 생각하다 2 :
다윈이 남긴 숙제

유선경·홍창성│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필자들은 지금까지 진화를 비롯해 유전자까지 다루면서 생명현상을 대표하는 몇몇의 개념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로 재해석하며 이러한 새로운 해석이 생명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해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든다고 주장해왔다.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연기적 해석의 관점에서 1859년 찰스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을 다시 살펴보며 다윈 진화론의 한계와 그가 우리에게 남긴 문제점들 가운데 두 가지를 논의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윈의 한계와 문제점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로의 재해석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다윈이 남긴 숙제 하나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 제6장에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법칙들을 도입하며 자신의 진화론인 ‘변이에 의한 유전(descent with modifications)’을 견고히 한다. 두 가지 법칙들이란 형태의 동일성 법칙(the law of Unity of type)과 생존 조건들의 법칙(the law of Conditions of existence)이다. 이 둘의 법칙들은 사실 다윈의 저서가 세상에 나오기 전 19세기 전반 자연과학자들이 자연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두 개의 다른 방식이었다. 일군의 자연과학자들은, 예를 들면, 사람의 손가락들과 물개의 물갈퀴나 새나 박쥐의 날개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기본적인 계획이나 설계에서 조금씩 변이가 일어난 것들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기본적인 자연의 계획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창조주가 설계한 동물들의 형태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형태의 동일성 법칙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자연과학자 군단은 다양한 종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설계가 자연에 존재한다고 믿었고, 이러한 기본적인 설계로 인해 생명체들 간에 동일하거나 비슷한 점들이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 진영과 대립하던 자연과학자들은 사람의 손가락들과 물개의 물갈퀴나 새나 박쥐의 날개 등의 차이점은 이러한 종들이 그들 각각의 생존 환경에 적응하는데 중요한 도구들이라고 이해했다.1) 이처럼 자연을 생존 조건들의 법칙으로 바라보는 자연과학자들은 다양한 생명체들이 각각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에 그들 안에 변이가 생겨 종들 간에 차이점이 생겨나고 이러한 차이점으로 생명체들이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된다고 이해했다.
다윈은 그의 『종의 기원』에서 형태의 동일성 법칙과 이와 대립하던 생존 조건들의 법칙을 자신의 진화론인 ‘변이에 의한 유전’으로 통합한다. 그는 자연에서 동일하거나 비슷한 형태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다양한 생명체들이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형태의 동일성 법칙을 확보한다. 그리고 조상과 후손의 관계를 표현하는 계통적인 측면으로 진화를 설명하려 했다.2) 또한 다윈은 종과 그들이 처한 다양한 생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자연선택 과정이라고 제안하며, 생명체의 변이들과 종들의 차이점을 자연선택의 과정과 결과로 설명한다. 생존 조건들의 법칙을 자연선택의 과정으로 대체한 것이다. 다윈은 19세기 전반 당시 대립하고 있던 두 주장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켰다.
그러나 이런 통합이 모두에게 명쾌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형태의 동일성 법칙을 받아들이며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생명체들이 진화해왔다는 다윈의 통찰은 훌륭하다. 그러나 필자들은 이로써 다윈의 반본질주의(antiessentialism)의 시도가 미완으로 그치고 마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형태의 동일성 법칙은 진화의 과정에서 불변하는 무엇이 있어 생명체의 형태를 동일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다윈은 이러한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여 생명체들이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진화하기 때문에 생명체들 사이에 형태의 동일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윈의 주장은 고정불변한 무엇인가가 다양한 생명체들과 그들의 공통된 조상들 안에 내재되어 있고 또 그들의 계통(lineage) 안에서 고정불변하게 존재한다는 전제를 상정하지 않는 한 전개될 수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된다.3) 따라서 다윈의 논지인 ‘공통된 조상들로부터의 진화’나 ‘계통’은 본질주의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다윈이 형태의 동일성 법칙이나 ‘계통’이라는 개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이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윈 자신의 진화론인 ‘변이에 의한 유전’을 설명하는데 있어 ‘공통된 조상으로부터의 진화’는 단지 자신의 주된 주장인 ‘자연선택’을 설명하기 위한 시발점으로서 또는 편리한 도구(useful tool) 정도로만 간주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나아가 다윈의 관심이 사실은 형태의 동일성 법칙보다는 두 번째 법칙인 생존 환경들의 법칙에 있었다면, 그의 반본질주의의 시도는 미완성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성공이었다고 받아들여야 하나? 이것에 답을 하기 위해 우리는 두 번째 법칙인 생존 환경들의 법칙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다윈은 생존 환경들의 법칙을 받아들이며 자연선택의 논지를 전개했다. 생명체들이 그들이 처한 각각의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은 그들 간의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 때문에 가능하다. 이러한 차이점들로 인해 생명체들이 생존 환경에서 살아남아 번식하는 것이다. 생명체들 사이에 차이점이 없다면 모든 생명체가 쉽게 멸종할 수 있다. 그런데 생존 환경들의 법칙은 생명체와 그것의 생존 환경을 뚜렷이 구분한 이분법적 접근이다. 생명체와 환경이라는 이분법은 생명과학에서 지금까지 의심 없이 쓰이고 있는 방법론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유전자를 설명할 때도 물론 사용되고 있는 접근법이다. 그런데 이런 이분법을 잘 살펴보면 고정불변하다는 본질의 존재가 전제된다. 필자들은 다음 단락에서 이분법적 방법을 택하며 전개된 생명과학의 예를 살펴보며, 이분법이 본질주의에 입각한 방법론이라는 점을 밝히겠다.
현대 유전학의 발전에 공헌한 19세기 자연과학자 아우구스트 바이스만(August Weismann)은 생식기에 있는 생식세포(germ cells)와 그 외의 체세포(somatic cells)를 구별하며 유전 정보는 생식세포로만 전이된다고 주장했다. 바이스만이 생식세포와 체세포를 구분한 것은 생식세포가 가지고 있는 유전 정보가 고정불변하고 이로 인해 생식세포가 생식세포로서의 특성을 갖게 된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생식세포가 지닌 고정불변한 유전 정보가 생식세포의 본질이기 때문에 이러한 본질이 결여된 다른 세포들로부터 생식세포가 구분된다. 다시 말하면, 생식세포와 생식세포가 아닌 세포들의 이분법에는 고정불변하는 본질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고정불변한 본질이 없다면 이분법적 방법은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이분법적 방법은 본질주의를 전제하고 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유명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개념은 복제자(replicator)로서, 진화라는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인데, 그것이 도킨스에게는 DNA이다. 도킨스가 제안한 복제자와 상반되는 매개물(vehicle)의 개념은 복제자와는 다른 어떤 것에 관한 개념으로서, 복제자가 그 안에 자리하면 복제자를 보존하고 전달 번식시키는 명령이 프로그램된 기계라고 제안한다.4) 또 도킨스의 복제자와 상반되는 좀 더 명확한 개념은 데이비드 헐(David Hull)이 제안한 상호작용자(interactor)이다. 상호작용자는 복제자가 활동하는 환경에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어떤 것으로, 생명체나 종 등을 생각할 수 있다.5) 위와 같이 도킨스나 헐의 복제자는 복제자의 고정불변한 본질을 지니고 있기에 기나긴 진화의 세월 동안 복제자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복제자의 고유의 본질이 존재하기에 복제자는 매개물 또는 상호작용자와 구분된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 한 번, 이분법이 본질주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지금까지 다윈이 통합한 두 종류의 법칙인 형태의 동일성 법칙과 생존 환경들의 법칙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본질주의를 전제하고 있다. 필자들이 지난 2년 가까이 논의해왔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200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생명현상에 있어서의 본질주의를 부정하는 다윈의 혁명적인 반본질주의의 시도는 그의 자연에 대한 놀라운 통찰과 함께 위대한 업적이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 호에서 지금까지 논의한 바가 보여주듯이 그의 반본질주의의 시도는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다윈이 남긴 숙제 둘

다윈의 ‘자연선택’은 생명체들과 그들이 서식하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쉽게는 환경에 의한 여과작용(environmental filtration)이라고 이해한다. 마치 여과지가 커피 가루를 거르고 커피물은 통과시키듯이 환경이 다양한 생명체들을 형태에 따라 여과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경 (가)는 삼각형만을 여과하는 환경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정삼각형, 이등변삼각형, 사각형의 생명체들이 있다. 이들 중 정삼각형과 이등변삼각형만이 환경 (가)에 적응(여과작용)해 생존하고 번식할 것이다.6) 다시 말해, 정삼각형과 이등변삼각형만이 환경 (가)에서 자연선택되었고 사각형은 자연선택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선택된 삼각형들의 자식들은 부모와 같이 정삼각형이나 이등변삼각형의 형태이거나, 또 무작위 변이로 인해 오각형, 육각형 등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삼각형들의 자식들이 서식하는 환경도 변화해서, 새로운 환경 (나)는 오각형 또는 육각형만을 선택하는 환경으로 변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정삼각형, 이등변삼각형, 오각형, 육각형의 개체들 중 오각형과 육각형만이 환경 (나)에 적응해 생존하고 번식할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생명체들이 환경 (가)와 환경 (나)와 상호작용하며 생존해 번식하고 또는 소멸하는 과정이 자연선택의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다윈의 이 유명한 ‘자연선택’이 내용이 없는 공허한 개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제리 포도르(Jerry Fodor)와 마시모 피아텔리-팔마리니(Massimo Piatelli-Palmarini)는 다윈의 ‘자연선택’은 실제로 어떠한 생명체들이 진화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7) 왜 어떤 형질을 지닌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들보다 생존율과 번식력이 높은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해하는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예를 들면, 검은색 환경에 사는 생명체들 중 변이로 인해 외피가 검은색인 생명체들이 외피가 밝은 색깔인 생명체들보다 더 잘 자연선택된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생명체들의 천적이 검은색 환경에서 서식하는 외피가 검은색인 생명체들보다 외피의 색깔이 밝은 생명체들을 쉽게 찾아 잡아먹기에, 외피가 검은색인 생명체들이 더 많이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 검은색 외피라는 형질이 자연선택의 대상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포도르와 피아텔리-팔마리니는 이러한 자연선택적 설명에서 도출되는 결론대로 하나의 특정한 형질이 자연선택의 대상이라는 의견에 반대한다. 이들은 자연선택의 대상은 어느 하나의 형질이 아니어서 실제로는 수없이 많은 다른 요인들을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위의 예에서도 자연선택의 대상은 검은색 외피가 아닌 검은색 외피로 변이할 때 관여하는 다른 신진대사 물질일 수 있다. 외피가 검은색인 생명체가 그 신진대사 물질로 인해 생존율과 번식력이 증가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또 외피가 검은색인 모든 생명체들 중에서 불임이거나 생존 기능이 떨어지는 검은색 외피의 생명체들은 생존과 번식에 실패할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 자연선택의 대상이 오직 검은색 외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생존과 번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생명체들의 많은 속성들을 자연선택의 대상으로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형질 때문에 그 형질을 가진 생명체들이 자연선택된다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다윈의 ‘자연선택’은 실제로 어떤 생명체들이 진화할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다윈의 ‘자연선택’은 단지 공허한 이름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필자들은 이들의 주장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지만, 거의 모든 생명과학 철학자들이 포도르와 피아텔리-팔마리니의 주장에 반대했으리라는 것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8) 그러나 필자들은 이들의 반대와는 다른 종류의 반대 주장을 한다. 필자들은 포도르와 피아텔리-팔마리니가 제기한 대로 다윈의 ‘자연선택’이 공허한 개념이라는 주장과 이들을 반박하는 생명과학 철학자들의 주장들이 모두 공통되게 ‘무엇이 자연선택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래서 이 둘은 모두 자연선택되는 것과 자연선택을 하는 환경을 따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다. 그리고 엘리엇 소버가 제안한 자연선택에 대한 두 가지 의미인 ‘어떤 생명체가 다른 것들에 비해 보다 높은 생존율과 번식력을 가지나’(“Selection of”)와 ‘어떤 형질이 자연선택에 유리한가’(“selection for”)9)라는 접근도 자연선택되는 어떤 것과 자연선택을 하는 환경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어떤 이분법적 사고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주의에서 자유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필자들은 부처님의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잘 이해한다면 지금까지 제기된 다윈의 진화론이 가진 한계나 다윈의 ‘자연선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일어나는 혼돈들을 모두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환경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연기(緣起)하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생명체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본질을 결여해서 공(空)한 존재자들이다. 우리는 생명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을 두루뭉술하게 구분지어 그것들에 속성을 부여하며 생명체들을 종(種 species)에 따라 나누기도 하지만, ‘종’이란 것도 결국 어떤 고정불변한 본질이 없이 우리의 편리에 따라 만들어낸 허구(fiction)에 불과하다는 점을 필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번 반복해 보였다. 한편 생명체의 발달 과정이나 변이도 생명체 안에 있는 요소들로만 진행되는 현상으로는 결코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오직 주변 환경 등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고려할 때만 이런 생명현상에 대한 의미 있는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도 보였다.
생명체의 안과 밖에 대한 본질적인 구분이 불가능함은 이제 분명해졌다. 그래서 생명체와 그것이 속해서 상호작용하는 환경과의 경계도 허물어진다. 생명체와 생명체의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던 환경 사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면, 이 구분에 근거해 자연현상을 나누는 것 또한 무의미해진다. 불교식으로 표현해보자면, 생명체의 안과 밖은 둘이 아니며, 생명체와 그것을 둘러싼 외부 환경도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연선택되는 생명체 및 그것의 생명 형질과 자연선택을 하는 주체처럼 잘못 여겨지는 환경 사이의 구분도 모호해지고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결국 자연선택되는 것도 자연선택하는 것도 따로 자성(自性)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없다.
생명과학자들과 생명과학 철학자들이 어느 특정한 생명 형질을 꼭 집어내어 그것을 자연선택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생명계에 존재하는 연기(緣起)의 거대하면서도 촘촘한 망(網) 속에서 그런 것을 꼭 집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다윈의 ‘자연선택’이라는 원리는 자연선택되는 것과 자연선택하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서 제기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연기(緣起)하는 자연세계에서의 생명현상을 설명하는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서구적 본질주의와 이분법에 물든 생명과학 철학자들이 이러한 불교적 통찰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본질주의가 스스로 만들어낸 그토록 많은 문제의 늪에 빠져 한없이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생명현상이 연기(緣起)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생명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본질주의나 이분법적 구분도 무의미해진다는 점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궁극적 관점에서 접근해보자면, ‘자연선택’이라는 용어 또한 처음부터 연기(緣起)하는 자연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자연은 거대하면서도 촘촘한 변화와 관계의 망(網)을 형성하면서 그냥 여여(如如)하게 연기(緣起)할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상을 부여해 개념을 만들고 본질에 얽매여 이분법에 구속되는 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문제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__다음 호에 계속

 

1) Gilbert, S. and M. Barresi, 2016, Developmental Biology 11th ed. Sinauer Associates, Inc. Chapter 26 (page 786).
2)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윈의 생명의 나무를 계통수(phylogenic tree)라고 부른다.
3) 다윈과 동시대에 살았던 자연과학자 에른스트 핵켈(Ernst Haekel)은 ‘진화’를 형태의 동일성 법칙으로 이해하며, 생명체들의 발생 초기의 태아는 모두 형태가 비슷하며, 열등한 생명체의 발생은 짧은 계통 발생을 반복하고 우월한 개체의 발생은 이런 짧은 계통 발생을 포함한 긴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잘못된) 가설을 제시한다.
4) Richard Dawkins, 1976, The Selfish Gene, Oxford University Press
5) David Hull, 1990, Science as a Process: An Evolutionary Account of the Social and Conceptual Development of Scienc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6) 유선경, 2014, 『생명과학의 철학』 pp. 14~15
7) Jerry Fodor and Massimo Piattelli-Palmarini, 2010, What Darwin Got Wrong, Farrar, Straus and Giroux
8) 여러 반박들 중 하나는 포도르와 피아텔리-팔마리니는 실제 생명체들의 진화를 반쪽만 이해했기에 그러한 주장이 나왔다고 한다. 그들이 간과한 진화에 대한 다른 반쪽의 이해란 생명체들이 그들이 서식하는 환경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생존하고 번식해가는지에 대한 생명체의 생태적 니치(ecological niche)에 대한 이해다. (Richard C. Lewontin, 2010, “Not So Natural Selection”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MAY 27, 2010 Issue) 생태적 니치는 생명체들이 서식하는 고정된 환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생태적 니치는 하나의 생명체가 환경에 상호작용하며 생존하고 번식하는데, 이런 생명체들의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그들의 생태계 안에서 그 생명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는, 생명체에 대한 총체적인 고려다. 따라서 위의 예인 검은색 외피를 가진 생명체들의 활동이 그들 생태계에서 어떤 역할들로 나타나는가를 안다면, 어떻게 이 생명체들이 외피가 밝은색 생명체보다 쉽게 자연선택되며, 또 왜 검은색 외피가 자연선택의 대상이 되는지 알 수 있다는 반박의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들은 생태적 니치로 포도르와 피아텔리-팔마리니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9) Elliott Sober, 1984, The Nature of Selection, MIT Press, Cambridge, 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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